K팝이 미국에서 ‘정치 운동’으로 확장되는 이유
  • 하재근 문화 평론가 (idea@sisajournal.com)
  • 승인 2020.07.18 12:00
  • 호수 160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팬들의 활동 영역 점차 확장
진보 운동의 연결고리로 자리매김

뉴욕타임스는 지난 6월 K팝 관련 기사에서 “한국에서는 비정치적이고 상업적인 K팝 문화가 미국에서는 하위문화로 자리 잡으며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된 시기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한국 가요가 미국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뜻이다.

이는 미국 K팝 팬들의 정치사회적 활동 때문이다. 최근 벌어진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BLM)’라는 이름의 흑인 인권 시위에 방탄소년단이 지지 선언을 하며 연관 단체에 100만 달러를 기부했다. 그러자 미국의 방탄소년단 팬(아미)들이 같은 액수인 100만 달러를 모금해 함께 기부했다. 방탄소년단 팬들은 ‘우리는 흑인 아미를 사랑한다(We Loves Black Army)’라는 해시태그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 밖에 싸이, 보아, 씨엘, 현아, 에릭남, 제시, 마마무, 갓세븐, NCT, 레드벨벳 등 많은 K팝 가수가 SNS를 통해 BLM 운동 지지 선언을 했고, 가수 박재범의 힙합 레이블 ‘하이어 뮤직’과 그룹 갓세븐의 멤버 마크는 각각 2만1000달러(약 2540만원)와 7000달러(약 846만원)를 BLM 단체에 기부했다. 이러자 미국 매체들이 주목하게 됐다.

방탄소년단은 최근 벌어진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BLM)’라는 이름의 흑인 인권 시위에 지지 선언을 하며 연관 단체에 100만 달러를 기부했다. ⓒ뉴시스
방탄소년단은 최근 벌어진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BLM)’라는 이름의 흑인 인권 시위에 지지 선언을 하며 연관 단체에 100만 달러를 기부했다. ⓒ뉴시스

트럼프 유세 흥행 실패에 영향 미친 K팝

더 화제가 된 사건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오클라호마주 털사 유세 흥행 실패였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석 달 만에 트럼프 대통령이 크게 홍보하며 진행한 행사였다. 당초 트럼프 측은 수많은 사람이 운집할 거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막상 행사 당일에 빈자리가 많아 빈축을 샀다.

바로 그 사건에 K팝 팬들이 관여했다. 뉴욕타임스는 미국 10대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끄는 SNS 틱톡 사용자와 K팝 팬들이 털사 유세 입장권을 예약했다가 당일에 가지 않는 방식으로 행사를 공격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캠프에서 유세 입장권 예약 공지를 띄우자마자 K팝 팬들이 이 내용을 공유하며 신청을 독려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일에 가지 말자고 모의했다는 것이다. 공화당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대다수 사용자가 게시물을 일정 시간 후에 지웠다고 한다. 이른바 ‘노쇼(예약하고 가지 않기) 공세’다.

K팝 팬들의 노쇼가 실제로 얼마만큼 털사 유세 실패에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시도가 있었다는 것 자체가 미국에서 이목을 끌었다. 일명 AOC로 불리는 민주당 스타 정치인,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 하원의원은 “K팝 동지들이여, 정의를 위한 투쟁에 헌신해 줘서 고마워(KPop allies, We see and appreciate your contributions in the fight for justice too)”라는 글을 SNS에 올렸다.

트럼프 대통령 생일 축하 사건도 있다. 트럼프가 생일을 맞아 축하 메시지를 요청했는데 K팝 팬들이 엉뚱하게 가수의 영상을 대량으로 보낸 것이다. 미국 댈러스 경찰이 흑인 인권과 관련된 불법 시위 영상을 보내 달라고 하자 K팝 팬들이 일제히 신고앱 서버에 접속해 서버를 다운시킨 적도 있다. 미국의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백인 목숨도 소중하다(White Lives Matter)’는 해시태그 운동을 벌이자 거기에 맞서 같은 해시태그로 K팝 영상이나 이미지를 대량으로 올려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운동을 무력화시키기도 했다. K팝 팬들은 “인종차별주의자가 되지 말라. 이는 옳지 않다. 대신 우리 가수 얼굴이나 보고 가라”와 같은 메시지도 올렸다. 이른바 ‘해시태그 빼앗기’ ‘해시태그 납치 사건’이다.

K팝 팬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과시하자 매체들의 보도가 이어졌다. 포브스는 “K팝 팬들이 인종차별주의자들의 해시태그를 빼앗아 인종 평등을 부르짖는 이들과 연대를 표시했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음원 차트를 휩쓸고 콘서트 티켓을 매진시키며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아이돌을 화제로 만들어온 K팝 팬들이 이제는 미국 정치로까지 활동영역을 넓혔다”고 했다. ‘(흑인인권 시위대의) 예상치 못한 동맹군’(AP통신), ‘소셜 미디어계의 가장 강력한 군대’(CNN), ‘K팝 혁명’(워싱턴 포스트), ‘21세기 펑크 운동’(르 피가로) 등의 보도들도 나왔다. 아미가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을 저지하는 가장 강력한 온라인 집단이 될 것이라는 주장도 등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털사 유세 흥행 실패에는 K팝 팬들의 조직적인 운동이 자리했다. ⓒAP 연합
트럼프 대통령의 털사 유세 흥행 실패에는 K팝 팬들의 조직적인 운동이 자리했다. ⓒAP 연합

K팝 자체에 담긴 정치적 의미

K팝은 정치적 메시지가 약하다. 하지만 K팝의 출신 그 자체에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 바로 비(非)백인·비미국·비영어, 즉 타자 소수인종의 음악이라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주류 백인만을 배타적으로 결합시키는 정치를 하자 소수자 타자 인종 이슈가 미국에서 점점 중요한 정치 현안으로 부상했다. 페미니즘 운동도 소수자 이슈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었다. 그러다 코로나19 사태 등으로 트럼프의 인기가 떨어진 상황에서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이 발생하자 소수자 이슈는 폭발했다. 그런 이슈에 분노하는 사람들과 K팝 팬층이 겹쳤다.

소수자 이슈에 적대적인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동양인의 동양 언어 노래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질적인 소수자의 노래에 마음을 여는 사람들은 그 자신이 소수자이거나, 트럼프식 사고방식과 정반대로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일 가능성이 크다. 또는 트럼프와 같은 기존 기득권 집단을 ‘꼰대’라고 생각하며 자신들만의 새로움을 적극적으로 찾으려는 젊은이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트럼프에게 반발하는 건 당연한 귀결이다. 그 결과 K팝 팬들이 정치 운동에 나선 것 같은 상황이 된 것이다. 

K팝 팬들이 처음엔 10대 중심이었지만 점차 20~30대로 확장됐다. 이들은 ‘인터넷 문화에 익숙하고 진보 성향이며, 개방적이고 사회문제에 적극적 관심과 행동을 보이는 젊은 세대’로 분석된다. 이들이 아이돌 팬덤 활동을 통해 키운 응집력과 인터넷 전투력을 정치활동에 투입하는 것이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K팝 팬들은 공동의 목표를 위해 소셜미디어에서 뭉칠 수 있다는 것을 여러 차례 증명했다. 이제는 반대 의사를 표시하고 싶은 일에 열정과 의지를 보이고 있다”고 했다.

이런 움직임을 통해 K팝에 진보적 운동의 연결고리라는 정치적 의미가 생겨나고 있다. 물론 아직 K팝이 미국 주류 문화 수준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건 아니지만 무시할 수 없는 하위문화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K팝에 이런 정치사회적 의미까지 더해지면 인기 수명이 더 길어질 수 있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