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명운 가르는 ‘시프트의 역설’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0.08.12 14:00
  • 호수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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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는 시프트엔 4가지가 있다”
승승장구 SK와 위기의 롯데·두산의 결정적 차이

변하지 않는 기업은 생존할 수 없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팬데믹) 이후는 더 그렇다. ‘비대면’과 ‘지속 가능한 안전’ 등 달라진 경제 환경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질 수 있다. 

얼핏 사상 초유의 경영 환경이 펼쳐진 것 같다. 하지만 경제 전문가들은 “예상보다 빨리 찾아오긴 했지만 어차피 올 일이었다. 역사의 반복일 뿐”이라고 입을 모은다. 코로나19 사태 이전에도 기술 혁신은 늘 기업의 변화를 강제했다. ‘4차 산업혁명’이 그랬다. 애플의 아이폰처럼 기존의 상식을 뛰어넘는 파괴적 혁신은 그전에 없던 수요를 만들어냈다. 기업의 변화는 숙명이다. 

우리 기업들은 대변혁의 시대에 잘 대처하고 있을까. 산업연구원은 올 하반기 한국의 12대 주력산업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를 전망한 보고서를 7월 내놨다. 12대 주력산업은 자동차, 조선, 일반기계, 철강, 정유, 석유화학, 섬유, 가전, 정보통신기기, 반도체, 디스플레이, 2차전지 등이다. 수출과 고용 모두에서 한국을 지탱하는, 말 그대로 주력산업들이다. 그런데 이들 업종 상당수가 만성 불황과 코로나19라는 리스크 앞에서 흔들리고 있다. 어느 하나 마음 놓을 만한 분야가 없다. 우리가 혁신적 변화를 선도하는 기업은 어디고, 무엇이 다른지에 관심을 갖고 면밀히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 

산업연구원 관계자는 “코로나19 여파로 인해 세계적 수요 침체, 경쟁 심화, 단가 인하 행렬 등 악재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며 “언택트 수혜 분야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산업에서 글로벌 수요 부진이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에 기업들은 실적 회복을 위한 노력과 함께 신(新)성장동력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 변해야만 할 때가 온 것이다. 

7월2일 SK바이오팜 코스피 신규 상장 기념식에서 조정우 SK바이오팜 대표(왼쪽 다섯 번째)를 비롯한 내빈들이 시초가를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7월2일 SK바이오팜 코스피 신규 상장 기념식에서 조정우 SK바이오팜 대표(왼쪽 다섯 번째)를 비롯한 내빈들이 시초가를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수출·고용 떠받치는 주력산업 대부분 ‘흔들’ 

SK그룹은 ‘진화의 귀재’다. 최근에는 신약 개발 계열사인 SK바이오팜을 앞세워 다시금 특기를 세상에 뽐냈다. SK바이오팜은 지난 6월 상장 전 일반 투자자를 대상으로 한 공모 청약에서 31조원에 달하는 증거금(계약금)을 모았다. 역대 최대 기록이다. 상장 첫날 공모가 2배 가격에 시초가를 형성한 후 상한가까지 치솟고, 이어 이틀 연속 가격 제한폭까지 올라가는 진기록도 세웠다. 

SK는 국내 다른 기업들이 복제약 사업을 할 때 신약 개발에 계속 매달렸다. 실패 가능성이 큰 혁신에 도전한 셈이다. 선대 최종현 회장이 1993년 대덕연구소에 관련 팀을 꾸리면서 씨를 뿌렸고, 1998년 9월 취임한 최태원 회장은 이를 계승·발전시켰다. 경영진의 전폭적인 지원은 결국 3년 만에 획기적인 신약(뇌전증 신약 ‘엑스코프리’) 개발이라는 결실을 낳았다. 그리고 코로나19 사태에도 주가가 고공행진하는 ‘대박’을 만들어냈다. 

7월2일 SK바이오팜 상장 기념식에선 주목할 만한 장면이 목격됐다. 미국 유학 중이던 최태원 회장의 장녀 최윤정씨가 참석한 것이다. SK그룹이 3대째 ‘변신 DNA’를 계승할 준비를 마쳤다는 메시지를 세상에 알리는 듯했다. 

SK의 변신 DNA는 선대 때부터 이뤄졌다. 최종현 회장은 신약 개발 사업 도전 외에도 1980년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하고 1994년엔 한국이동통신 경영에 참여하며 그룹의 미래 먹거리를 키워나갔다. 1998년 취임한 최태원 회장은 2012년 당시 모두가 반대했던 하이닉스를 인수했다. 그리고 신약 사업에도 계속 힘을 기울였다. 이 결정들이 지금의 SK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지난 7월24일 기준 SK의 상장 계열사 시가총액은 120조원으로, 삼성그룹(480조원)에 이은 2위다. SK하이닉스 인수 전인 2011년 말 SK의 시가총액은 50조원에 불과했는데 인수 이후 8년여 만에 몸집이 136% 커졌다. 같은 기간 증가율은 삼성(115.2%)을 능가한다. 

 

SK의 압도적인 신성장동력 발굴 능력 

1953년 선경직물이라는 작은 섬유업체였던 SK는 이제 에너지 화학, 바이오, 정보통신, 물류, 금융, 반도체 등을 망라하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기업이 됐다. 업종 하나하나의 경쟁력이 뛰어나다. 최남곤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SK는 바이오를 차세대 먹거리로 부각해 왔다”면서 “앞으로 정유와 통신, 반도체와 함께 바이오가 4개 축을 형성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SK 외에도 삼성그룹(무역업→전자·반도체업)과 동원그룹(어업→금융업)이 변신에 성공하며 ‘퀀텀 점프’를 이뤄낸 기업들로 꼽힌다. 그리고 이 두 기업과 SK의 성공적 진화 과정에서는 3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경영진의 결단과 뚝심, 후대로의 올바른 전수다. 

삼성전자 반도체 산업 성장의 주역인 권오현 고문은 삼성전자가 반도체 기술 초격차를 유지하는 동력으로 ‘중단 없는 경영 리더십’을 꼽는다. 삼성은 이병철 창업주가 1983년 반도체 사업 진출을 전격 선언한 뒤 9년 만인 1992년 세계 첫 64메가 D램 개발을 계기로 세계 1위에 올랐다. 이후 메모리반도체 세계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권 고문은 “과거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한다는 자체가 난센스였다”며 “이병철 회장이 반도체 사업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경영권을 이어받은) 이건희 회장이 어려움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투자해 성공하게 됐다”고 말한다. 

동원 창업주 김재철 명예회장은 원양어업·양식어업 등으로 회사를 일구다가 1982년 한신증권을 인수하며 금융업에 뛰어들었다. 자칫 외부에선 뜬금없다고 여길 수 있는 도전이었다. 하지만 동원의 금융업은 동원증권에서 한국투자금융지주(한투)로 쑥쑥 성장하며 기업 내실을 더욱 튼튼하게 했다. 지금은 장남 김남구 한투 회장, 차남 김남정 동원 부회장이 쌍두마차로 경영 전면에서 활약하고 있다. 

성공적인 변신의 비결과 관련해 김 명예회장은 결단, 뚝심, 올바른 전수에 ‘본업 유지’란 키워드를 더한다. 김 명예회장은 지난해 11월29일 서울교대 특강에서 ‘본업을 버리는 자는 망한다. 본업만 하는 자도 망한다’는 일본 격언을 인용하며 도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새로운 (사업) 시도를 할 때 ‘이 일이 잘 안돼도 본체가 망가지진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항상 했다”며 본업인 어업을 버리지 않았기에 금융업 도전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증권회사(한신증권)를 인수하고 한동안은 어려움을 겪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머리 좋은 사람들이 들어오는 회사(한투)가 됐다”면서 “원양어선의 임금 체계(인센티브 형태로 지급)를 증권사에도 적용했더니 직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일했다”고 설명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7월14일 웹 세미나 형태로 ‘2020 하반기 VCM(옛 사장단회의)’을 주재했다. ⓒ롯데그룹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7월14일 웹 세미나 형태로 ‘2020 하반기 VCM(옛 사장단회의)’을 주재했다. ⓒ롯데그룹

롯데·두산의 이유 있는 위기 

SK, 삼성, 동원 등은 본업을 지키며 새로운 사업에도 도전해 성장의 한계를 깨뜨린 성공 사례다. 표면적인 도전 과정은 비슷한데 실패의 고배를 마신 기업도 많다. 롯데그룹이 대표적이다. 롯데의 미래, 신동빈 회장의 야심작으로 불리던 롯데케미칼은 올 1분기 적자 전환한 데 이어 2분기에도 불안한 상황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올 2분기 연결기준 영업이익은 3461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50.6% 급감한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석유화학 업황이 기울고 있는 가운데 지난 3월 대산공장 폭발 사고, 코로나19 여파까지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롯데는 기존 주력사업인 유통업까지 부진의 늪에 빠져 회복될 기미가 없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석유화학은 애초에 롯데가 잘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고 본다. 이를 뚫고 보란 듯이 성공하지 못해 더 아쉬움이 짙게 남는다”며 “전성기의 신격호 명예회장이 경영 일선에 있었다고 가정하면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식품 제조, 유통 등을 내실 있게 가져가며 끊임없이 혁신해야 했다”고 말했다. 이런 일각의 지적을 의식한 듯 신 회장은 지난 7월14일 그룹 사장단과의 회의 석상에서 “어려운 상황일수록 본업의 경쟁력이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인 두산그룹도 두산중공업의 부실로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맥주 제조를 주력으로 하는 소비재 기업이었던 두산은 2000년대 들어 중공업 기업으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결단, 뚝심은 있었으나 롯데와 마찬가지로 올바른 전수, 본업 유지 등에서 약점을 노출했다. 결국 글로벌 금융위기, 건설 업황 부진 등의 직격탄을 맞으며 흔들리고 있다. 

 

급변하는 세상, 재계 순위는 지각변동 중 

일부 대기업이 변화의 흐름에 올라타지 못하고 헤매는 사이 재계 순위에도 변화의 물결이 밀려오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 5월3일 지정한 ‘2020년 자산총액 5조원 이상 공시대상기업집단(대기업집단)’에 따르면, 카카오는 계열사를 26곳 늘리며 지난해 32위에서 올해 23위로 뛰어올랐다. 게임 기업 넷마블도 공격적인 사업 확대로 57위에서 47위로 성장했다. 네이버(45위→41위), 넥슨(47위→42위)도 순위가 상승했다. 

반면에 중흥건설그룹(37위→46위), 태광그룹(40위→49위), 유진그룹(54위→62위)의 순위는 크게 떨어졌다. 14위 한진그룹의 대한항공, 20위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아시아나항공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바람 앞 등불 신세다. 한때 재계 7위까지 올라갔던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아시아나항공을 HDC현대산업개발에 팔고 60위권 밖으로 밀려날 예정이었는데,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지금은 매각 성사조차 불투명하다. 

5위 롯데그룹, 11위 신세계그룹, 15위 두산그룹, 22위 현대백화점그룹 등도 파괴적 혁신 없이 주춤하는 사이 입지를 크게 위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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