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선의 시시비비]이슈 선점하며   변화 중심에 선   ‘차르’ 김종인 
  • 유창선 시사평론가 (realsong@sisajournal.com)
  • 승인 2020.08.31 14:00
  • 호수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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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라는 말 쓰지 말라” 강조해 중도층 이목 집중 
1인 플레이 넘어 주도 세력 교체해야 지속 가능 

더불어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난 4·15 총선 이후 불과 네 달 만에 이런 변화가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김종인 비대위가 이끄는 미래통합당이 지지율에서 더불어민주당을 역전한 여론조사 결과들이 최근 한동안 나왔다. 코로나 재확산으로 정부에 힘을 실어주자는 심리가 생겨나고 광화문 집회가 보수 혐오를 유발한 탓에 다시 재역전됐지만, 여야 두 당이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지지율 경쟁을 벌이게 된 사실 자체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과거에는 민주당 지지층이 이탈하더라도 ‘차마 통합당을 지지할 수는 없다’는 심리적 장애 때문에 부동층으로 자리하곤 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곧바로 통합당 지지로 이동해 버리는 전례 없는 현상이 생겨난 것이다. 민주당 지지율이 하락한 데는 열 가지도 넘는 이유를 쉽게 댈 수 있지만, 통합당은 무엇을 했길래 여권 이탈층을 흡수해 간 것일까.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김종인 위원장이 자리하고 있음은 이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됐다. 김 위원장에 대해서는 여야를 넘나드는 행보에 대한 철새 정치인 시비, 노년 정객의 등장에 따른 식상한 시선 등이 따르기도 했지만, 어찌 됐든 그의 등장이 관심권 밖으로 밀려났던 통합당을 다시 뉴스의 한복판으로 이끈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비대위가 출범할 때 김 위원장은 “진보, 보수라는 말 쓰지 말라. 중도라고도 하지 말라”면서 이념을 내걸지 않는 정당의 길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진보세력의 전용 상품이다시피 했던 약자·불평등·비민주·불공정 같은 용어들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의 중도성 강화 노선은 주효했고 민주당에 등을 돌린 중도층의 유입이라는 효과를 거둔 것으로 나타났다.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8월19일 광주시 북구 국립 5·18민주묘지를 방문해 열사 묘역을 참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몇몇 행보에선 민주당보다 앞서나가

김 위원장은 노정치인답지 않은 발 빠른 행보를 보여주곤 했다. 물난리가 났을 때 전남 구례에 민주당보다 먼저 간 것도, 질병관리본부를 방문해 전문가 의견을 듣고, 총파업을 예고한 대한의사협회 관계자를 만나 파업을 자제해 달라고 당부한 것도 그였다.

김 위원장 행보의 절정은 광주 5·18 묘역 참배였다. 김 위원장은 대구에 가서는 “대통령 당선 후 선거 때 약속한 글자도 안 남기고 지웠다”며 박근혜 전 대통령을 전면으로 비판했다. 그러고는 다음 날 광주 5·18 묘역에 가서 “진실한 사죄를 드린다”며 무릎 끓고 울먹이는 모습을 보였다. 통합당을 대표하던 누구도 하지 못했던 장면들을 김 위원장은 거침없이 보여줬다. 불과 네 달 전 국민적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통합당의 모습을 떠올리면 격세지감의 장면들이었다.

코로나 사태와 관련한 대응도 이전과는 달라졌다. 광화문 집회와 통합당을 연결시키려는 민주당의 공세가 계속되자 김 위원장은 “코로나 사태를 지나치게 정치화하려고 하는 여권의 상식을 이해할 수 없다”며 대안 제시를 통해 논점을 전환시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당내에 코로나 특위를 만들고 재난지원금 지급을 위한 4차 추경 필요성도 먼저 들고나왔다. 그런가 하면 “백신 접종이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하면 엄청난 갈등과 분열을 초래할 수 있다”며 “1차 방역에 종사하는 사람, 건강이 연약한 사람, 사회적 약자 순으로 접종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백신 개발 이후의 문제까지도 선제적으로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4·15 총선 때 정부의 코로나 방역 앞에서 존재감을 잃었던 그 당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광경들이다.

하지만 아직 통합당이 보여주고 있는 변화의 폭은 좁고 강도는 미약하다. ‘김종인’이라는 개인의 구두 약속이 곧 당의 지속 가능한 약속일 수 없는 것이고, 국민들은 일시적인 구두선으로 끝날지 모른다는 의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로 대표되는 ‘아스팔트 보수’와 불가역적인 결별을 하는 것은 통합당 변화의 진정성을 가늠할 시금석이다. 물론 광화문 집회에 대한 통합당의 연루 책임 공세를 연일 벌이는 민주당의 모습도 정략적이기는 하지만, 위험천만한 광화문 집회에 대해 통합당이 진작부터 비판적인 입장을 분명히 했다면 논란 자체를 없앨 수 있었을 것이다.

선을 그었다고는 하지만 모호한 입장이 유지되는 가운데 전·현직 의원 몇 사람이 집회에 참여했다고 하니, 책임의 일단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게 됐다. 통합당으로서는 극단적인 ‘아스팔트 보수’와의 관계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이번에 실감했을 것이다. 통합당이 국민의 더 많은 지지를 얻으려면 차제에 ‘아스팔트 보수’와는 결별한다는 선언을 해야 한다. 아스팔트에 나간 2만 명을 잃을까 주저하다가 200만 명을 잃는 우를 범할 수 있다.

미래통합당 의원들이 7월30일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주택임대차보호법에 대한 송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토론이 시작되자 퇴장하고 있다. ⓒ시사저널 박은숙

개인 플레이 아닌 당 체질 바꾸는 게 더 중요

현재 진행 중인 통합당의 변화가 김종인 위원장의 1인 플레이 성격이 강하다는 점도 한계다. 이는 김 위원장이 물러나고 나면 통합당이 다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어느 한 사람이 있고 없고에 따라 당이 달라지지 않으려면 통합당의 주도세력이 교체되어야 한다. 과거 보수정당을 주도했던 극단적 이념과 막말의 정치인들이 뒤로 물러서고, 새롭고 합리적이며 공감 능력을 가진 정치인들이 당을 이끌어 나가는 주도세력이 될 때 통합당의 변화는 지속 가능한 것이 될 수 있다. 문제는 그만한 정치적·정책적 능력을 가진 인물들이 당 안팎에서 얼마나 발굴되고 성장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통합당 초선인 윤희숙 의원이 의정활동에서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경제학자 출신인 윤 의원은 임대차 3법 통과에 항의하는 5분 연설, 국세청 세무조사 남용에 대한 지적, 부부 공동명의 때 종부세를 더 내게 된다는 사실 등을 잇따라 제기하면서 단시간에 화제의 인물로 부상했다.

그의 어법은 ‘좌파’ 같은 이념적 용어를 사용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면서도 상대를 꼼짝하지 못하게 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이념을 앞세우거나 거칠게 싸우지 않고도, 합리적 논리로 국민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보수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준 셈이다.

보수정당의 변화 여부를 관심 있게 지켜보는 것은 단지 그들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쁜 보수가 나쁜 진보를 만들고, 좋은 보수가 좋은 진보를 만든다. 보수가 형편없게 되어 국민적 혐오의 대상이 되니 진보는 긴장을 해제하고 거리낌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광경들을 보아왔다. 서로가 긴장해 우리가 잘못하면 저쪽에게 넘겨줄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항상 가져야 좋은 정치가 가능해진다. 통합당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진정성 있는 변화가 될지, 아니면 위기 모면을 위한 ‘쇼’가 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쉽게 환호할 일도, 쉽게 폄하할 일도 아니다. 쇼가 될 것 같으면 비판하고, 진정성이 보이면 격려하는 것이 좋은 정치를 만드는 국민의 태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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