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교체 폭풍’ 후 1년, 새판 짜는 대기업들 기상도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0.10.07 14:00
  • 호수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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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화 넘어 가속도 붙은 3·4세 총수 시대…그룹별 표정 엇갈려

최근 최태원 SK그룹 회장 장남 인근씨의 SK E&S 전략기획팀 입사 소식이 모든 언론을 도배했다. 최씨를 평범한 25세 신입사원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최 회장이 향후 장녀 윤정씨(31·SK바이오팜 책임매니저로 근무하다 휴직 후 미국 유학 중)와 차녀 민정씨(29·SK하이닉스 대리급), 그리고 인근씨 중 누구에게 그룹 경영권을 물려줄지에 벌써부터 눈과 귀가 쏠리고 있다. 

ⓒ뉴스1·시사저널 최준필 ·연합뉴스  
ⓒ뉴스1·시사저널 최준필·연합뉴스

‘총수 지정’ 줄줄이 대기하는 후계자들   

이렇듯 여전히 우리나라에선 ‘재벌 총수=물려받는 자리’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3~4세 경영은 이미 막을 올린 지 꽤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18년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3세)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2세)에 이어 지난해엔 구광모 LG그룹 회장(4세),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4세),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3세)을 동일인(총수)으로 지정하며 재계 세대교체의 시작과 본격화를 연달아 알렸다. 구광모·박정원 회장은 공정위가 1987년 총수 지정을 시작한 이후 처음 지정한 4세대 총수다. 

올해는 주요 대기업 총수 명단이 그대로였지만, 사실상 추가 교체는 시간문제란 분석이 나온다. 현대자동차그룹은 2017년부터 정몽구 회장을 대신해 경영 전면에 나서온 장남 정의선 총괄수석부회장(3세)이 대기하는 중이다. 공정위는 대림그룹 총수 명단에 이준용 명예회장을 올리고 있지만, 곧 3세인 이해욱 대림산업 회장으로 바꿀 가능성이 있다. 효성그룹은 2017년 조석래 명예회장 퇴진 후 장남 조현준 부회장(3세)이 회장으로 승진하며 총수 변경 초읽기에 들어갔다. 코오롱그룹 역시 이웅열 전 회장 장남이자 4세인 이규호 코오롱인더스트리 전무가 향후 총수로 지정될 전망이다. 

그렇다면 ‘총수 세대교체 폭풍’ 속에서 수많은 직원, 즉 국민의 미래를 짊어진 대기업들은 어떤 실적을 내고 있을까. 시사저널은 공정위 기업집단포털을 통해 경영권 승계 이슈와 맞물린 기업들의 자산총액, 매출액, 당기순이익, 계열회사 수 등 현황을 들여다봤다. 외부 변수에 구애받지 않고 리더십 교체를 둘러싼 성과를 파악하기 위해 2017년부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직전인 2019년까지를 비교 기간으로 삼았다.  

우선 지난해 3~4세 시대를 활짝 열어젖힌 구광모 LG 회장(2018년 6월 취임), 박정원 두산 회장(2016년 3월 취임), 조원태 한진 회장(2019년 4월 취임)의 성적은 신통치 못하다. LG의 자산총액(일반 자산)은 2017년 123조1270억원, 2018년 129조5860억원, 2019년 136조967억원으로 증가했다. 그런데 매출액은 2017년 127조3960억원에서 2018년 126조4750억원, 2019년 122조2380억원으로 떨어졌다. 당기순이익도 2017년 7조1240억원에서 2018년 3조4100억원으로 반 토막 나더니 2019년엔 870억원 적자를 기록했다.     

LG·두산·한진 등 초반 성적 ‘부진’   

두산의 자산총액은 2017년 30조5260억원에서 2018년 28조4710억원으로 줄었다. 이어 2019년 29조2690억원으로 반등했다. 매출액은 12조6850억원, 12조5780억원, 12조30억원으로 계속 감소했다. 당기순이익은 1230억원에서 마이너스 8970억원으로 고꾸라졌다가 1년 후엔 1000억원으로 회복됐다. 하지만 이후 두산은 두산중공업의 부실로 124년 역사상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한진의 자산총액은 2017년 30조3070억원에서 2018년 31조7300억원, 2019년 33조5490억원으로 계속 늘어났다. 매출액은 15조5310억원에서 16조7360억원으로 증가했다가 조원태 회장 취임 첫해에 다시 16조3790억원으로 소폭 떨어졌다. 당기순이익은 1조2220억원에서 450억원으로, 마이너스 5630억원으로 곤두박질쳤다. 올해 분위기는 바닥을 뚫고 지하로 내려가는 형국이다. 항공업계가 코로나19 여파로 직격탄을 맞아 대다수 항공편 운항을 중단하는 등 고사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이들 기업보다 앞서 세대교체를 이룬 삼성과 롯데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삼성 매출액은 315조8520억원, 326조6550억원, 314조5120억원 등으로 지지부진했다. 당기순이익도 35조5380억원에서 40조6330억원으로 증가했다가 19조6160억원으로 쪼그라들었다. 이재용 부회장은 창업 2세 이건희 회장이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부터 삼성을 이끌어왔다. 

 

너도나도 뼈를 깎는 자구 노력 

2011년 2월부터 신동빈 체제에 들어선 롯데 역시 2017년 이후 급격히 흔들리고 있다. 자산총액은 2017년 144조7650억원에서 2019년 129조1550억원으로 줄었다. 아울러 매출액은 72조1810억원에서 65조2710억원으로, 당기순이익은 3조2020억원에서 4660억원으로 급감했다. 

대림의 경우 지난해 초 이해욱 회장 취임 후 자산총액이 성장한 반면 매출액과 당기순이익은 감소했다. 2017년 초 정의선 총괄수석부회장을 수장으로 맞은 현대차는 2년 새 자산총액, 매출액, 당기순이익 등 모든 지표에서 성장세를 나타냈다. 효성은 자산총액, 매출액 성장 속 당기순이익은 감소했다. 코오롱은 세 가지 지표 모두에서 하락세를 보였다.  

2017년 말에서 2019년 말 사이 계열회사 수는 LG(-5개)와 두산(-1개), 삼성(-3개), 롯데(-21개), 현대차(-2개), 코오롱(-2개) 등 대다수 기업에서 감소했다. 기존에 해 오던 체질 개선 노력은 올해 들어 생존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됐다. 만성 불황에 겹친 코로나19 리스크로 기업들은 뼈를 깎는 구조조정, 실적 회복 노력과 함께 신(新)성장동력 확보에도 사활을 걸고 있다. 

위기의 두산은 9월21일 이사회에서 그룹의 상징적 건물인 두산타워를 8000억원에 매각하기로 의결했다. 이번 매각에 대해 두산 측은 “그룹 재무구조 개선을 위한 목적”이라고 밝혔다. 3조원 규모 자구안 이행의 일환이라는 설명이다. 올해 초 자금난으로 채권단으로부터 총 3조6000억원을 지원받은 두산은 유상증자와 계열사 매각을 통해 연내 1조원을 포함해 3조원의 자금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위기 수습이 차질 없이 마무리되면 경영 정상화와 신경영에 시동을 걸겠다는 복안이다.  

코로나19 직격탄과 경영권 분쟁이란 이중고에 빠진 한진은 조원태 회장의 개인 능력에 명운을 걸고 있다. 조 회장은 지난 3월27일 열린 한진칼 주주총회에서 출석 주주 과반(56.67%)의 찬성으로 사내이사 연임에 성공했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과 행동주의 사모펀드 KCGI, 반도건설로 구성된 ‘3자 연합’의 공세에도 경영권 방어에 성공한 조 회장은 위기 극복, 미래 대비 등을 위해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조 회장은 “경영환경이 정상화되면 국가 기간산업으로서의 소명 의식을 바탕으로 국가와 국민 여러분을 위해 더욱 헌신하겠다”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에 대해 늘 부채 의식을 갖고 사회에 더욱 환원하는 기업이 되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시사저널 박정훈 

불황 속 각종 악재 더해져…여전한 불안감 

현대차 역시 요즘 ‘정의선 리더십’으로 대표된다. 50세 젊은 총수 체제에서 현대차는 첨단 모빌리티 솔루션 업체로 전환하고 있다. 정 총괄수석부회장은 “미래에는 자동차가 50%가 되고 30%는 개인비행체(PAV), 20%는 로보틱스가 되리라 생각하며, 그 안에서 서비스를 주로 하는 회사로 변모할 것”이라고 첨단 모빌리티 솔루션 업체의 그림을 제시하고 ‘인간 중심 모빌리티’ 철학을 세웠다. 전기차 개발과 수소 분야 리더십 유지에 매진하는 한편 투자와 개방형 혁신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장밋빛 미래가 기다리는 건 결코 아니다. 글로벌 자동차 산업 대변혁기에서 조금만 ‘삐끗’해도 도태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LG와 삼성은 전자산업 역성장 국면에서 그 어느 때보다 내부 리더십이 절실한 상황이다.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KEA)가 정부의 ICT 주요 품목 동향 조사를 바탕으로 8월13일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생산·내수·수출이 모두 전년보다 감소하고 수입만 증가했다. 미·중 무역분쟁, 한·일 갈등, 글로벌 수요 부진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첩첩산중인 상황에서 각사 총수들에게 더욱 시선이 쏠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삼성은 ‘오너 리스크’를 완전히 떨치지 못하며 불안감에 휩싸였다. 서울중앙지검 경제범죄형사부는 9월1일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한 삼성 관계자 11명을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행위 및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재판 절차는 오는 10월22일 시작될 예정이다.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이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주도로 이뤄졌다는 게 검찰 판단이다. 이 부회장 측은 “합병은 경영상 필요에 의해 이뤄진 합법적인 경영활동”이라며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대내외 불안감을 잠재우려는 듯 이 부회장은 9월9일 서울 강남구 삼성디지털프라자 삼성대치점을 ‘깜짝 방문’하며 공개 경영 행보를 재개했다. 

실적 부진과 성장 정체의 늪에 빠진 롯데에선 8월 신 회장 최측근이자 2인자로 불렸던 황각규 롯데지주 대표이사 부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신 회장의 경영 능력에 계속 물음표가 붙는 가운데 연대책임을 진 황 부회장이 퇴장한 것으로 풀이된다. 황 부회장 후임으론 이동우 롯데하이마트 대표이사 사장이 선임됐다. 이 사장은 그룹 안팎에서 철저한 자기 관리와 실적 창출 능력으로 유명하다. 신 회장은 롯데의 체질 개선과 성장동력 확보를 위해 과감히 ‘오른팔’을 쳐냈다. 

 

재벌 자녀 세대 주식 비중 ‘껑충’…세습 놓고 의견 분분 

대기업 총수 일가의 경영권 승계는 일각의 우려와 비판에도 아랑곳없이 점점 더 활발해지고 있다. 경영 능력 검증에 대한 날카로운 잣대도 3세대 이후로 넘어가며 무뎌지는 모습이다.   

최근 기업평가 사이트 CEO스코어가 올해 8월을 기준으로 공정위 지정 64개 대기업집단 중 총수가 있는 55곳의 핵심 계열사 지분 변화를 조사한 결과 총수의 자녀 세대가 5년 전(2014년 말)보다 지분을 늘린 곳은 전체의 55%인 30개로 조사됐다. 

특히 5년 새 자녀 세대의 주식 규모가 부모 세대를 뛰어넘은 그룹은 LG와 한진, 대림, 호반건설 등 4곳으로 집계됐다. 대림과 호반건설은 자녀 세대가 지주사 등 핵심 계열사의 지분 확보를 통해 주식 비중을 높였다. 

호반건설은 2018년 ㈜호반건설이 ㈜호반을 흡수합병하면서 자녀 세대인 김대헌 부사장이 ㈜호반의 주식을 ㈜호반건설 주식으로 교환받아 지분율 54.7%의 단일 최대 주주에 올랐다. 대림과 롯데, 한국테크놀로지그룹은 총수 일가가 보유한 핵심 계열사 주식자산을 100% 자녀 세대가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태영·현대백화점·KCC·애경·효성 등 15개 그룹에서도 자녀 세대가 보유한 주식 비중이 50%를 넘어섰다. 사실상 경영권 승계가 마무리되거나 빠른 속도로 진행 중이라고 파악할 수 있는 대목이다. 

가속화하고 어느덧 당연시되는 경영권 승계 작업에 갑론을박이 따라붙고 있다. 이경상 대한상공회의소 경제조사본부장은 “해외 선진국 대기업들의 경우 지분이 많이 분산되면서 (오너가 아닌) 전문경영인 체제로 넘어가는 사례가 있어왔는데, 우리나라에선 창업주 가문이 계속 그립(장악력)을 쥐고 끌고 나가는 형태”라며 “일각의 반감도 없는 게 아니나, 결국 재벌 시스템이 효과적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에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전봉걸 서울시립대 경제학부 교수도 “우리나라 경제구조에서 이제 재벌 시스템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서 “(독주와 전횡 등) 부정적인 측면을 막기 위한 규제의 범위 밖에서 이뤄지는 자율적 역할에 대해선 선입견 없이 인정해 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태생, 과거의 과오 등에 얽매이기보다 실적, 새로운 먹거리 창출 등 경제적·미래지향적 측면을 놓고 논하는 게 옳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오세형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재벌개혁본부 팀장은 “대기업들의 경영권 세습이 더 세밀하고 집요해진 느낌이다. 최근의 차등의결권 도입·기업주도형 벤처캐피털(CVC) 설립 시도 역시 향후 경영권 승계를 위한 정지작업으로 본다”면서 “우리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해당 제도와 세습을 막아내기 위한 움직임이 갈수록 무력화되는 것 같아 허탈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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