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문 이제 닫자] ‘온라인 그루밍’에 우리 아이들이 위험하다
  • 김종일 기자 (idea@sisajournal.com)
  • 승인 2020.11.24 10:00
  • 호수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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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생 11%, 온라인서 성적 유인 피해 경험
신상공개 비율, ‘온라인 그루밍’이 일반 성범죄보다 낮아

몇 가지 전제부터 명확히 하자. 당신은 잘못이 없다. 온라인 그루밍을 포함한 디지털 성범죄가 일어난 원인은 가해자가 잘못된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행동에는 잘못이 없다. 만약 피해자가 됐다고 해도 그것은 성범죄 피해 예방수칙을 지키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어떤 범죄든 완벽한 피해 예방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켜야 하는 것은 국가의 몫이다. 지금의 문제는 좀 더 촘촘한 법과 제도를 만들지 않은 국가와 그것을 끈질기게 요구하고 관철해 내지 않은 정치권의 직무유기 때문이다. 당신은 잘못이 없다. 어른들의 잘못이다. 

#. 가해자는 2017년 트위터에 게시된 당시 중학교 2학년 피해자(여·15)의 사진을 보고 호감을 느꼈다. 댓글을 달아 피해자의 관심을 산 후 트위터 메시지를 통해 피해자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피해자에게 “하루 봤지만 매력이 넘친다. 얼굴이 예쁘다” 등의 칭찬을 건네며 친분을 쌓았다. 이후 밥도 사주고 공부도 도와주겠다며 환심을 샀다. 친분을 유지하고 경계를 허물어뜨리기 위한 가해자의 이런 연락은 3개월간 지속됐다. 충분한 신뢰가 쌓였다고 생각했을 때 첫 만남을 유도한 뒤 오프라인에서 만나 성관계를 맺었다. 대가로 현금을 줬다. 가해자는 이후 피해자를 속여 자신의 집으로 유인해 피해자를 성폭행하고 그 장면을 촬영했다. 가해자는 이를 자신의 친구에게 촬영하게 해 피해자에게 더 큰 정서적 학대를 가했다. 가해자는 동영상 폭로를 미끼로 피해자를 계속 성적으로 학대하고 음란물을 제작했다. 학대를 이기지 못한 피해자는 재판 진행 중 자살했다(한국형사정책연구원). 

이 천인공노할 범죄를 ‘온라인 그루밍 성범죄’라고 한다. ‘온라인을 통해 취약한 상대에게 접근해 성적 학대를 저지르는 행위’라는 뜻이다. 아직 법적·학술적으로 명확히 합의된 정의는 없다. 이게 문제다. 이로 인해 한국 사회에선 이 천인공노할 범죄가 아직 범죄로 명확히 인식되지 않고 있다. 범죄를 예방하고 확실한 처벌을 내려야 할 정치권과 사법 당국 모두 마찬가지다. 

범죄를 범죄로 대하지 않는 대한민국

그렇다 보니 이 성범죄는 빠른 속도로 퍼지고 진화하고 있다. 온라인 그루밍 피해는 다른 성범죄에 비해 상대적으로 피해 지속 기간이 길다. 영상과 사진 등이 유포되는 디지털 성범죄의 특성이다. 그렇게 온라인 그루밍은 다수의 피해자를 만들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피해자들의 연령이 매우 어리다는 점이다.  

10명 중 1명. 눈을 의심했지만 그랬다. 우리 중·고생 10명 중 1명은 지난 3년간 디지털 성범죄의 위험에 노출됐다. 여성가족부가 지난 6월 발표한 ‘2019년 성매매 실태조사’ 자료에 따르면, 전국 중·고등학생 642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713명(11.1%)은 지난 3년간 인터넷을 통해 원치 않는 성적 유인 피해를 당한 것으로 파악됐다. 성적 유인 피해 사례는 다양했다. 성에 관한 대화 유인이 9.3%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성적 정보에 관한 대화 유인(3.3%), 나체·신체 일부를 찍은 사진·영상 송부 유인(2.4%), 화상채팅 시 야한 자세·자위행위 유인(1.6%) 등이 뒤를 이었다. 만남 유인 피해까지 경험한 비율은 전체의 2.7%였다. 
가해자는 누굴까. 남성이다. 김지영 형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발표한 ‘온라인 그루밍 성범죄의 실태와 대책’에 따르면, 2017년 성범죄를 저질러 신상정보 등록 대상이 된 4201건 중 ‘온라인 그루머(가해자)’의 성별은 남성이 98.4%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김 연구위원은 당시 판결문 4201건을 전수조사했다. 

피해자는 누굴까. 여성(97.8%)이다. 그리고 아동·청소년이다. 온라인 그루밍 피해자들의 연령대는 16세 이상이 45.5%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다. 13~15세(42.7%), 7~12세(11.8%)의 피해 비율도 상당히 높았다. 13~15세 피해자 비율은 해당 연령의 일반 성범죄 피해자(31.5%)보다 10%포인트 이상 높았다. 

우리 아이들은 이처럼 범죄에 노출돼 있지만 법과 제도는 허술하기 짝이 없다. 아동·청소년 피해자에게 접근해 촬영물 전송을 유도하는 행위에 적용할 법은 아직 없다. 현행법은 아동·청소년을 ‘성 구매’를 위한 목적으로 유인하는 행위만을 처벌한다. 온라인상에서 성적 목적으로 아동·청소년에게 접근해 대화를 하거나 유인하는 행위 자체는 처벌하지 못한다. 가해자들의 신상정보 공개 비율도 터무니없이 낮다. 김 연구위원의 조사에 따르면, 비공개 처분이 92.4%로 일반 성범죄자(86.3%)보다 비공개율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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