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외교로 ‘26년 독재’에 맞서는 벨라루스 여성들
  • 클레어함 유럽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12.09 11:00
  • 호수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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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유례없는 ‘절대군주제 대통령’ 루카셴카의 탄압에 맞서 비폭력 저항 전개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은 26년간의 악명 높은 공포정치로 인해 ‘유럽의 마지막 독재자’로 불린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그의 퇴진을 외치는 벨라루스 민주화운동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벨라루스 국민은 8월9일 치러진 대선이 부정선거라며 크게 반발하면서 선거 직후부터 대규모 시위와 파업을 시작했고, 현재까지 4개월간 매주 집회를 이어오고 있다. 집권세력은 구소련 붕괴 후 최대 국민 저항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지나친 폭력을 행사하고 있어 세계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아나이스 마린 유엔 인권특별조사위원은 지난 9월18일 열린 긴급토론회에서 “현재까지 국가기관에 의한 강간·전기사형 등 500건 이상의 고문 사례를 보고받았다”고 밝혔다. 세계고문방지기구(OMCT)는 “이 수치는 아직 증언에 나서지 못한 이들을 고려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며 “현 상황은 국가가 기획하고 조직한 고문이라는 명확한 증거가 있고, 이런 반인류 범죄에 국제사회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독일 타게샤우방송은 코로나 전염 상황과 의사 인력난이 이미 심각한데도 집회에 참가한 180여 명의 의사가 체포되었다고 보도했다. 온라인 매체 ‘벨삿(Belsat)’에 따르면, 이번 집회로 총 7명이 사망했고 약 3만 명이 체포·구류되었다.  

10월26일(현지시간)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에서 대선 결과에 불복하는 시민들이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있다. ⓒEPA 연합
10월26일(현지시간)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에서 대선 결과에 불복하는 시민들이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있다. ⓒEPA 연합

뜻밖에 큰 호응 얻은 여성 트리오의 대선 캠페인

벨라루스국립대의 마리나 강사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전국의 가정과 핸드폰에 대한 인터넷 공급을 독점하고 있는 정부는 선거 직후인 8월9일부터 며칠간 인터넷을 아예 차단시켰고, 현재도 주말에 간헐적으로 막고 있다”며 “이는 시민들의 저항과 소통을 막으려는 시도”라고 말했다. 또 “혹시나 경찰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최근에는 집 밖을 나서는 것조차도 무섭다”고 현지 상황을 전했다.   

벨라루스에서 선거의 공정성에 대한 논란이 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6년과 2010년 대선 때도 부정선거 논란이 심각했고, 이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대규모 집회가 열렸으나 내무부 산하 군대 및 경찰·전경의 폭력진압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1996년 이래 벨라루스의 선거는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데, 선거 결과가 자주 문제시되는 것은 1994년 집권한 루카셴코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된 정치 시스템에서 비롯된다. 그는 수차례에 걸쳐 헌법을 개정해 식물국회를 만들었고, KGB·행정부·검찰·사법부·언론을 모두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2004년 개헌을 통해 종신집권의 길을 열며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절대군주제 대통령’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서방-러시아 간 냉전 재현될 가능성

루카셴코 정권은 2010년 대선에서는 경제위기로 외환융자가 다급해지자 야권 인사들도 경선에 참가하게 허용했다. 하지만 투표 결과 전망이 어두워지자 야권 후보들을 2~5년형에 처했다. 올 8월 대선에서는 유력한 야권 후보 3명의 후보등록 자체가 불허되었다. 인기 블로거 세르게이 티하노브스키는 5월 대선 출마를 선언한 지 이틀 만에 수감되었고, 전직 외교관이자 사업가 출신의 발레리 트삽칼라는 기소를 당해 7월 망명길에 올랐다.

이런 상황으로 티하노브스키의 배우자인 스뱌틀라나 티하노브스카야가 대신 선거 출마를 선언하게 된다. 또 다른 후보였던 은행가이자 자선사업가인 빅타르 바바리카도 6월 체포되고 경선 참가가 불허되자 그의 캠페인 매니저였던 마리야 칼레스니카바는 발레리의 배우자인 베라니카 트삽칼라와 협력해 티하노브스카야의 선거 캠페인에 참여하게 된다. 이 여성 트리오의 캠페인은 뜻밖에 폭풍적인 호응을 얻었다.      

국제사회는 2020년 대선과 민주화운동을 이끌고 있는 여성들의 리더십과 참여에 큰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다. 유럽의회가 올해의 ‘사하로프인권상’을 이들 여성 지도자에게 수여한다고 발표한 가운데 꽃을 든 여성들이 인간띠를 만드는 모습이 전 세계로 보도되면서 비폭력 저항을 지향해 온 벨라루스 민주화운동에 큰 힘을 실어주고 있다. 

시민들은 ‘공정한 선거’를 대표 공약으로 내걸었던 전직 영어교사 티하노브스카야가 승자라고 믿는다. 그는 감옥에 수감된 남편을 살해하겠다는 협박을 받은 이후 리투아니아에 망명 중이고, 지금은 벨라루스의 열악한 인권 상황을 알리고 민주화운동의 지지를 호소하고자 유럽과 북미의 정치 지도자를 만나며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특유의 카리스마로 유명한 뮤지션 출신 칼레스니카바는 선거 후 집회현장을 찾아 “벨라루스인들은 대단하다”는 취지의 연설을 하며 시민들을 독려해 왔다. 그는 수시로 자국민 모욕과 여성 비하 발언을 일삼아 국내외에서 비난을 받아온 현직 대통령과 비교되면서 대중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그는 9월 복면마스크를 한 요원들에 의해 거리에서 납치된 후 우크라이나로 출국을 강요당했으나, 자신의 여권을 찢으며 거부했다고 전해진다. 현재까지 구속되어 있고,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선동죄로 기소되어 최고 5년 징역형에 처해지게 된 상태다. 유럽과 북미 29개국 국회의원 270명은 그와 또 다른 정치범들의 석방을 요청하는 공식 서한을 루카셴코에게 보낸 바 있다.

유럽연합과 미국은 10월2일 부정선거 및 야권 탄압에 연루된 40명의 벨라루스 관계자에 대해 비자 금지와 자산 동결을 결정했고, 유럽연합은 11월6일 루카셴코와 14명을 제재 리스트에 추가했다. 아울러 유럽의회는 경찰의 구타로 숨진 교사 라만 반다렌카를 비롯한 집회 사망자들과 관련한 철저하고 독립적인 수사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11월26일 채택했다. 특히 벨라루스와는 16~18세기 같은 나라였고 반러시아 성향이 강한 폴란드가 적극적인 지원에 나서고 있다. 폴란드의 마테우슈 모라비에츠키 총리는 벨라루스 야권 세력이 임시 구성한 시민위원회(Coordination Council)의 지도자들과 만남을 가지며 이들에게 사무실을 제공하고, 폭력 피해자를 위한 무료 의료지원과 벨라루스 경찰의 정치적 망명도 지원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친러시아 성향의 루카셴코는 늘어나는 서방의 압박으로 러시아에 더 의존하려 해 이 사태를 둘러싼 모스크바의 영향력이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라디오프리유럽(RFE/RL)’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루카셴코에게 15억 달러의 긴급융자와 아울러 필요시 군사지원도 언급한 상태라며, “현 상황의 주도권은 서방보다 러시아에 있다”고 지적한 미국의 전직 외교관 스티븐 파이퍼의 분석도 보도했다.

현재 러시아는 벨라루스 정부 부채 60%(102억 달러)의 채권자이기도 하다. 또한 다수의 정치평론가도 푸틴은 향후 정세의 유불리에 따라 루카셴코 개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가능성은 있지만, 벨라루스를 러시아 영향권하에 두려는 의지가 강하다고 평가한다. 과거 서방과 러시아의 냉전이 벨라루스에서 되살아날 가능성이 조심스레 점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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