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골든아워’
  • 김재태 편집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3.08 09:00
  • 호수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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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하게 한 권의 책을 읽었다. 《나의 가해자에게》. 학창 시절에 학교폭력(학폭)을 당한 경험이 있는 청년들과 인터뷰한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글쓴이가 직접 만나 대화한 10명 외에 설문지를 통해 응답한 사람들의 사연도 함께 담았다. 책 속에는 10명의 청년이 겪은 고통스러운 피해의 경험이 적나라하게 적혀 있다.

ⓒ알에이치코리아
ⓒ알에이치코리아

공교롭게 이 책을 읽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학창 시절의 폭력을 고발하는 ‘학폭 미투’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스포츠 선수부터 유명 배우·가수에 이르기까지 가해자로 지목된 인물의 직업군도 다양하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학폭의 그림자가 넓고 짙게 깔려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SNS를 기반으로 피해 고발이 이어지면서 그 진위를 둘러싼 공방도 잇따르는 상황인데, 이 같은 학폭 미투의 파고가 어디까지 솟구칠지는 현재로서 쉽게 가늠할 수 없다. 어쩌면 다른 사례들처럼 잠시 휘몰아쳤다 가라앉는 돌풍으로 그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학폭이라는 악폐 자체는 잠깐 눈여겨보았다가 이내 외면해도 좋을 만큼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무엇보다 그 피해의 크기와 깊이가 극도로 심각하다. 피해자로서는 당시뿐만 아니라 그 후 생애 전체에 걸쳐 엄청난 고통에 시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 중 대다수는 초·중·고교 시절이 지난 뒤에도 극심한 우울증, 수면 장애, 대인기피증 등 다양한 ‘2차 피해’를 일상에서 겪고 있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학폭 가해자들이 궁지에 몰려 내놓은 반성문 중에서 가장 흔하게 등장하는 문구는 ‘철없던 시절의 일’이다. 그들은 말하고 싶을 것이다. 다 옛날 일일 뿐, 지금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만 피해자들에게는 그 아픔이 그냥 옛날 얘기에서 멈춰지지 않는다. 그 일로 인해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린 기억이 그만큼 쓰라리기 때문이다. “가해자들이 TV에 나오거나 잘나가는 모습을 보면 속이 뒤집히는 느낌을 받는다. 그 고통의 시간이 계속 떠오른다”는 피해자 부모의 분노는 그래서 가슴에 깊이 와 닿는다.

지난 2011년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대구 중학생 자살 사건 이후 학교폭력예방법이 더욱 강화됐지만, 학교 내 폭력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학교 가기를 지옥에 들어가는 것처럼 여기며 홀로 가슴앓이를 하는 학생이 우리 주위에 적지 않다는 얘기다. 그들이 그때의 일로 인해 오래도록 고통을 받지 않도록 돕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다. 힘들겠지만, 피해자들의 폭로가 나오기 전에 가해자들이 먼저 과거의 잘못을 고백하는 ‘반성의 릴레이’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누군가에게, 그것도 합당한 이유 없이 눈물 짓게 한 사람이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지내거나 승승장구하기까지 하는 ‘불공정·불합리의 일상’이 더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외톨이인 채로 그 모든 상황을 아프게 견디고 있는 피해자가 없는지 우리의 귀와 눈을 지속적으로 더 많이 열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이 그들에게는 금쪽같은 ‘골든아워’일 수 있다.

“왕따가 사라질 수 있냐고 묻는다면, 사실 대답할 수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면 언젠가는 왕따가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어요. 이 아픈 일들을 겪는 사람들이 사라졌으면, 줄어들기라도 했으면 좋겠어요.” 《나의 가해자들에게》에 나온 한 인터뷰 참가자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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