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면과 철조망⑤] ‘서울대생·26만 유튜버’ 탈북민 허준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1.05.09 16:00
  • 호수 164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프리허그 등 ‘통일 실험’…“북한 사람 이해해 달라”
트럼프 행정부에 “北은 나라 아닌 지구 최대 감옥” 일갈도

[편집자주] 분단 후 76년이 흘렀다. 한 사람이 태어나 노년에 이르는 기간이다. 앞서 숱한 위기 혹은 기회를 지났지만, 한반도 문제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일각에선 “이제 변화는 사실상 물 건너갔다”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갈 통일에 더 이상 목맬 필요 없다”는 회의론까지 제기한다. 정말 그럴까. 아이러니하게도 북한 권력구조가 하나도 움직이지 않는 사이 북한 사람들은 참 많이 변했다. 시장 원리를 체득한 가운데 체제에 불만을 느끼는 이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런 각성에는 ‘먹고살기 힘들다’는 현실적인 문제와 더불어 남한으로부터 전해진 소식, 문화 등도 적잖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증언해 주고 있는 탈북민들은 “남한이 변하고 있는 북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만 한다”고 입을 모은다. 결코 통일불가론을 주장할 만큼 늦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사저널은 남한에 정착한 뒤 남북 간 가교 역할에 앞장서온 탈북민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2021년 현재 북한 사람들의 삶과 문화, 추구하는 가치 등을 면밀히 파악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졸업학기고 대학원 준비 중입니다. (대학원 합격이)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는데, 일단 열심히 준비해 도전하려고요(웃음).” 휴대전화 너머로 들려온 허준씨(30)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밝았다. 탈북민이자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4학년생인 그는 현재 이 대학 국제대학원 진학을 꿈꾸고 있다. 유튜브 세상에서는 구독자 26만여 명에게 콘텐츠를 제공하는 인기 유튜버이기도 하다. 허씨가 열심히 공부하고 활동하는 이유는 한 가지다. 바로 북한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서다.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이 여전히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허씨는 안타까워했다. 그는 “대부분 북한에 대해 ‘핵무기’나 ‘공산주의’ 정도만 떠올린다. 북한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은 빠뜨리고 있다”면서 “북한 사람들이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걸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1053만 명이 시청한 인사동 프리허그 영상 

허씨가 유튜브라는 소통 창구를 통해 북한 사람을 생각하게 하는 방식은 다양하고 색다르다. 자신과 다른 탈북민의 이야기를 한국어나 영어로 전하는 한편 길거리 프리허그·악수, 눈맞춤 등 실험적인 소통도 많이 시도했다. 그는 이를 ‘통일 실험’이라고 명명했다. 특히 서울과 부산, 일본 도쿄, 프랑스 파리 등에서 진행한 프리허그는 허씨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프리허그의 출발은 2017년 5년 서울 인사동 거리에서였다. 해당 장면을 촬영한 영상을 보면 허씨는 거리 한복판에서 ‘저는 탈북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를 보고 간첩, 반역자라 말합니다.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도 저를 믿으시나요?’라고 쓴 팻말을 옆에 두고 서 있다. 처음엔 두 팔을 활짝 벌린 허씨를 무심하게 지나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팻말을 읽는 이도 있다. 그러다 한두 명씩 허씨를 와락 껴안아주기 시작한다. 그 사람이 한국인인지 외국인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동은 조회 수와 댓글로 이어졌다. 이 영상은 전 세계에서 1053만여 명이 시청했다. 세계 각국의 언어로 달린 댓글도 6만여 개에 달했다. 

허씨는 “사실 길에서 이상한 자세로 한 시간 넘게 서 있는 게 정말 두렵다”며 “만난 적 없는 사람들에게 탈북민이란 신분을 밝힌다는 것도 나에겐 무서운 일”이라고 털어놨다. 그럼에도 여러 실험이 통일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거라 믿었기에 시도할 수 있었다. 허씨는 “한국에는 탈북민을 간첩 혹은 북한을 배신한 반역자로 여기는 부정적인 인식과 그렇지 않은 인식, 무관심 등이 공존한다. 이 밖에도 탈북민과의 사이에 다양한 심리적 장벽이 있다”면서 “낯설고 쑥스러워도 프리허그가 탈북민과 북한 사람을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해 길 위에 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렇게라도 해야 앞으로 한 발짝씩 나아갈 수 있다. 그만 생각하고 행동할 때”라고 강조했다. 

북한 문제에 관한 허씨의 열정은 통일 실험에서 그치지 않았다. 북·미 대화 국면이 한창이던 2019년 허씨는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을 향해 공개적으로 영상 편지를 보냈다. 그는 유창한 영어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인민들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또 핵무기를 포기할 생각도 없다”며 “왜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은 포악한 독재자를 만나려 하느냐”고 일갈했다. 이어 “북한은 나라가 아니라 지구 최대의 감옥”이라며 북한 인권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트럼프 행정부를 비판했다. 허씨는 미국 ABC, 영국 BBC 등 외신 인터뷰에서도 북한의 현실을 고발했다. 

평소 조용하고 수줍음 많은 허씨를 이토록 거침없이 뛰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는 다양한 유튜브 콘텐츠를 게재할 때마다 자신의 탈북기를 소개한다. 1992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난 허씨는 2000년대 초반까지 북한 정권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집안에서 자랐다. 그의 할아버지는 인민군 사단장 출신이었고 부모는 모두 노동당원이었다. 그는 “항상 집안에서 ‘조국’ ‘수령님’ ‘충성’ 따위의 단어들을 귀에 못이 박이게 들었다”고 회상했다. 평범한 삶의 균열은 1990년대 중반부터 불어닥친 이른바 ‘고난의 행군’(식량난) 이후 생겨났다. 

유튜브 채널 ‘허준’ 영상 캡처
유튜브 채널 ‘허준’ 영상 캡처

“‘북송’ 꼬리표 때문에 군인 꿈 포기”  

식구들이 보름가량을 미역만으로 연명한 적도 있었으나, 상황은 좀체 나아지지 않았다. 이웃들은 굶어 죽어가고 거리엔 꽃제비(집 없이 떠돌면서 구걸하거나 도둑질하는 아이)가 넘쳐났다. 참다못한 허씨의 어머니가 먼저 탈북을 감행했다. 2000년대 초반이었다. 허씨가 어머니를 다시 만난 곳은 북한 수용소였다. 국경을 넘었다가 붙잡혀 북송된 것이다. 10세였던 허씨는 수용소 면회실에서 15분간 어머니와 이야기하며 가치관의 변화를 경험했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어머니 모두 오랫동안 나라를 위해 봉사해 왔는데, 어떻게 우리 가족에게 이럴 수 있는지 분노감이 들었다”면서 “내가 믿었던 나의 나라, 내 조국에 대해 처음으로 회의를 느꼈던 순간”이라고 말했다. 그 후 어머니는 재탈북해 대한민국 품에 안겼다. 

2005년 어머니 뒤를 이어 탈북한 허씨 역시 한 차례 북송당했다. 중국 베이징 은신처에 머물러 있다가 공안의 급습을 받은 것이다. 불과 며칠 동안이었지만, 베이징에 체류한 경험은 열네 살 허씨에게 충격 그 자체로 다가왔다. 북한에서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다’ ‘무릉도원이다’라고 배운 게 베이징에 가 보니 전혀 맞지 않았다. 도로에 가득한 자동차, 몇 미터 단위로 줄지어 서서 환하게 켜져 있는 가로등, 높은 빌딩 등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씨의 달콤한 중국몽(夢)은 공안 요원이 휘두른 곤봉에 산산조각이 났다. 머리에 곤봉을 맞고 기절했다가 깨보니 손에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허씨 나이 열네 살 때다. 아직도 공안 차량에 실려 북송되던 당시 상황이 생생하다. 그는 “어렸던 나는 북송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앞으로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아무런 의식이 없었다”면서 “반면 함께 차에 타고 있던 어른들은 펑펑 울고 있었다”고 기억했다. 

이후 보위부를 거쳐 수용소에 3개월간 갇히면서 허씨는 북한 체제에 대해 완전히 돌아서게 됐다. 북한 정권은 수용소에서 나온 14세 허씨를 가택 연금시키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할아버지처럼 군인이 되는 것이었던 허씨의 꿈도 ‘북송’ 꼬리표가 붙어 불가능하게 됐다. 결국 허씨는 2008년 10월 재탈북했다. 함경북도 무산에서 두만강을 넘어 중국 상하이로 이동해 2년간 숨어 지냈다. 북한과 전혀 다르게 휘황찬란한 외부세계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가장 자유롭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나라’ 대한민국을 머릿속에 그렸다. 

허씨는 2010년 10월29일 한국에 도착했던 그날을 결코 잊지 못한다. 그는 “대한민국 국민이 된 첫날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편하게 잤던 것 같다”며 “(거리상으론 가까워도) 수만 리 길이었다. 자유로움을 얻기 위해 정말 많은 걸 포기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남한 정착 후 지난 시간을 기준으로 하면 허씨는 11세다. 그는 “사람들을 만나 인사할 때 농담처럼 진짜 몇 살인지가 아닌, 남한 정착 후 몇 년 지났는지를 기준으로 나이를 말하곤 한다”면서 “북한에서 경험한 17년의 시간이 인간다운 삶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북한에 있는 내 친구들은 그렇게 살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11세’를 맞은 그의 인생은 북한 사람들을 위해 더욱 바쁘고 간절하게 흐르고 있다.  

 

특별전형으로 서울대 들어왔지만 더 중요한 건 졸업 

허준씨는 남한 정착 후 재수 끝에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13학번으로 입학했다. 서울대는 ‘정시모집 기회균형선발특별전형Ⅱ’를 통해 탈북민과 특수교육대상자를 뽑고 있다. 정원 외 전형이라 일반 모집에 미치는 영향은 없다. 올해는 탈북민 지원자 중 합격자가 한 명도 없을 정도로 문턱이 꽤 높다. 허씨는 “원래 1년만 준비해 입학하고 싶었는데, 공부하면 할수록 부족함을 많이 느껴 재수를 결심하게 됐다”고 전했다.  

서울대 외에도 탈북민들은 대부분 정원 외 특례입학 제도를 통해 대학에 들어간다. 탈북민이 대학에 들어가면 등록금을 지원받을 수 있다. 등록금을 지원받으려면 고졸 이상 학력을 확인할 수 있는 서류를 구비해야 한다. 또 자신이 거주하는 해당 지방자치단체에서 ‘교육지원대상자 증명서’를 발급받아 학교에 제출하면 된다. 

그러나 통일부 산하 남북하나재단에 따르면, 탈북 대학생들은 경제적 이유 등으로 중간에 자퇴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수업이나 교우 관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례도 있다고 재단은 지적했다. 

허씨는 “특별전형으로 일단 대학에 들어올 순 있지만, 더 중요한 건 졸업”이라며 “성급하게 대학에 입학하려 하기보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준비하는 게 10~20년 뒤를 내다보면 훨씬 더 좋은 선택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요즘은 과거에 비해 소위 ‘SKY대’ 등 명문대에 대한 탈북 청소년들의 관심이 늘어났고 희망 직업의 수준도 높아진 것 같더라”며 “(탈북 청소년들에게) 남한 사회에선 치열하게 노력해 경쟁을 뚫어내야 원하는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현실 감각을 우선 가져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