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산실 ‘JP 청구동 자택’도 역사 속으로
  • 이근용 자유기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6.29 10:00
  • 호수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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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1997년 대선 앞두고 YS·DJ 모두 찾아
지자체 매입 계획 흐지부지되며 사라져

“현재의 대한민국은 전진하지 못하고 있고, 선진국가로 발돋움해야 하지만 그 문턱에서 정체돼 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김종필 전 총리님께 빚을 지고 있다.”

6월23일 ‘운정 김종필 총재 3주기 추도식’이 열린 충남 부여군 외산면 김종필(JP) 전 국무총리 가족묘원. 2018년 92세를 일기로 타계한 JP를 기려 정진석 국회의원은 이렇게 고인을 추도했다. 정 의원은 특히 “총리님은 대한민국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뤄낸 정치 거목이었다”면서 “1970년대 초반 조선·철강·반도체 등 우리 먹거리를 만들어 주신 분”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추도식은 코로나19 방역 등을 고려한 주최 측이 일반인을 초청하지 않아 유가족과 재단 관계자, 고인이 생전에 아꼈던 국회 관계자 수십 명만 참석한 가운데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엄수됐다.

6월23일 김종필 전 국무총리 3주기를 맞아 충남 부여의 가족묘원에서 가족들과 고인을 기리는 지인들이 참석해 업적과 정신을 기리는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시사저널 이종현
6월23일 김종필 전 국무총리 3주기를 맞아 충남 부여의 가족묘원에서 가족들과 고인을 기리는 지인들이 참석해 업적과 정신을 기리는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시사저널 이종현

“한국과 동북아 현대사, JP 없이 논할 수 없어”

정 의원이 추도사에서 언급했듯 김 전 총리는 1961년 5·16 쿠데타를 주도한 이래 50년 가까이 한국 정치의 증언자였고, 보수 진영엔 정신적 지주였다. JP가 생전에 펴낸 회고록 《김종필 증언록》에서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는 JP를 일러 “대한민국의 정치사와 동북아시아의 현대사에 대한 이해는 그를 빼고는 논할 수 없으며, 역사의 산증인”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날 정 의원과 함께 추도사에 나선 김태흠 의원은 “김 전 총리는 멋과 예를 아는 정치, 촌철살인의 비유와 풍류를 담은 어록으로 정치사에 큰 획을 그었다”고 회고했다. JP는 한국 정치사에선 드물게 격조와 품위를 갖춘 언어를 통해 듣는 사람의 머리와 마음을 사로잡았던 정치인이다. 말의 멋과 맛은 그의 지성, 독서량, 사고력 그리고 여유에서 우러나왔다. 화술은 유창함을 넘어 짙은 호소력을 뿜어냈다. 그래서 숱한 어록을 남긴 이가 바로 JP다.

그는 정치에서 늘 2인자였다. 1인자가 그를 가까이 두면서도 항상 경계했다. 자신의 입지가 그러하다 보니 일도양단(一刀兩斷)식이 아닌 여백에 함축을 더하는 어법으로 국민으로 하여금 내막을 유추하도록 했다. 1963년 증권 파동 등 군부가 연루된 4대 의혹 사건과 관련해 외유에 나서면서 남긴 한마디 “자의 반 타의 반”이 그랬고, “보기 싫은 것은 타다 남은 장작, 나는 완전히 연소해 재가 되고 싶다”(1997년 자민련 중앙위원회 운영위)는 발언은 정치적 야망을 에둘러 대변했다. 그는 못 다 이룬 정치인으로서의 소명과 신념을 서양의 명시에 빗대어 옹호했다. “시인 프로스트가 ‘잠들기 전 가야 할 몇 마일이 있다’고 한 것처럼 저도 앞으로 가야 할 몇 마일을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겠다(1998년 10월 동의대 명예박사학위 수여식 특강).”

철학과 셈법을 인문학적 명언에 접목하는 감각은 독서의 힘에서 비롯됐다. 유년시절 독서광이었던 JP는 감명 깊은 문장이나 시구를 줄줄이 외울 정도도 책을 읽고 또 읽었다. 특히 인물의 전기(傳記)를 좋아했으며 동서양을 가리지 않았다. JP는 회고록 《김종필 증언록》에서 “감수성이 풍부한 10대 성장기 때 섭취한 지식과 교훈, 충격과 감명은 내 일생을 연면(連綿)히 좌우했다”고 돌이키기도 했다.

“20대 6·25전쟁에서 발휘된 용기와 정밀한 사고, 30대 나이로 일으킨 5·16의 열정과 상상력, 이후 정치적 고비마다 난국을 헤쳐나가면서 떠오른 영감과 지혜들은 그 시절 독서로 열고 다져진 내 정신세계에 차곡차곡 자랐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이 음미해 볼 만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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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27일 92세로 별세한 고(故) 김종필 전 총리의 노제가 열리기 전 서울 청구동 자택ⓒ시사저널 이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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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22일 김종필 전 총리 자택이 사라지고 현재 원룸으로 재건축된 모습ⓒ시사저널 임준선

YS와 DJ, JP에 도움 청하는 태도도 전혀 딴판

JP의 반세기 정치 여정의 가장 충실한 목격자는 서울 신당동 자택이 아닐까. 그는 1965년 이 주택을 매입한 뒤 작고할 때까지 53년 동안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행정구역이 바뀌기 전에는 청구동에 자리했기에 JP 주변인들에게는 지금도 청구동 자택으로 불리는 사랑방이었다.

권력의 생리를 일깨우는 숱한 일화들이 이곳에서 생산된다. 5·16 이후 3·4공화국의 2인자였던 JP는 박정희 대통령 추종 세력의 집중 견제를 받았다. 1971년, 1978년 대선을 앞두고 유력 주자로 분류되던 그의 자택 주변에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진을 치고 출입자들의 신분을 확인했다. 그때를 일러 JP는 “사실상의 연금이자 백주대낮의 지옥”이라고 회고했다.

또 신당동 자택은 1980~90년대 3김 시대를 상징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김종필 증언록》에 따르면 신당동 자택을 찾은 김영삼(YS)·김대중(DJ) 두 정치 거목의 언행은 살아온 역정만큼이나 극과 극을 달렸다. 1992년 216석의 거대 여당 민자당은 그해 3월 총선에서 과반 획득에 실패했고, 김영삼 민자당 대표는 중대 위기에 직면한다. 1992년 3월29일 YS가 예고 없이 신당동 자택을 불쑥 찾았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거실 소파에 앉더니 그해 12월 치러질 14대 대선 당내 후보 경선과 관련해 “나를 지지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JP는 딱 부러지는 언질을 주지 않았다.

15대 대선을 앞두고 1997년 10월27일 밤엔 DJ가 사전 양해를 구하고 신당동(구 청구동) 자택을 찾았다. DJ는 거실 소파에 앉아 인사한 뒤 갑자기 바닥에 내려앉으면서 “김 총재님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간절히 부탁합니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JP는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화답했다고 한다. 대통령 선거에 세 번이나 떨어진 DJ는 신당동 자택을 방문한 뒤 집권에 성공했다. 신당동 자택이 한국 정치의 중간지대, 때론 패자부활전이 가능한 포용의 공간으로 기억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뒤로도 야망을 품은 사람들은 JP를 찾았다. 이명박·정운찬·나경원·이완구·반기문·황교안·추미애·유승민·홍준표 등 한국 정치의 주역들이 파노라마처럼 신당동 자택을 스쳐갔다.

‘한국 정치의 1번지’ 김 전 총재의 신당동 자택은 이제는 어디에서도 자취를 찾을 수 없다. JP 사후 두 자녀가 경제적 사유로 자택을 매각한 뒤로 이 자리에는 5층 크기의 신축 원룸 빌딩 두 동이 들어섰다. 당시의 사정을 잘 아는 김 전 총리 측 인사에 따르면 거액의 상속세 납부 부담에다 낡은 가옥 유지관리비도 많이 들어 불가피하게 집을 넘기게 됐다고 한다.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 3년간 살았던 서울 중구 신당동 가옥은 서울시가 복원해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JP의 신당동 자택 역시 정부나 지자체가 매입해 역사의 현장으로 남겨두는 방안이 JP 생전에 논의됐다고 한다. 김 전 총리 측에 따르면 서울 중구청이 신당동 자택을 사들여 기념관 등으로 꾸미는 방안을 검토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2018년 6월13일 지방선거에서 중구청장의 소속 정당이 자유한국당에서 민주당으로 바뀌고, 며칠 뒤인 6월23일 김 전 총리마저 타계하면서 매입 논의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당시 정국은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세몰이로 요동쳤다. 김 전 총리의 한 측근 인사는 “그런 기세등등한 분위기 속에서 중앙정부나 지자체, 기업 어디에도 신당동 자택 보존에 힘써 달라고 요청할 엄두가 나지 않더라”고 토로했다. 지성과 풍류를 겸비한 위대한 노정객의 자취와 손때가 묻은 신당동 자택은 이렇게 역사 속으로 속절없이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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