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태의 시론] 능력주의의 위험
  • 김윤태 고려대 교수·사회학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7.02 17:00
  • 호수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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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대선을 앞두고 ‘능력주의’가 중요한 용어가 되고 있다. 이 개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1958년 《능력주의의 부상》이라는 제목의 풍자소설을 출간한 마이클 영이다. 그는 런던정경대학 사회학과에서 영국 동부 빈민지역의 가족에 관한 논문을 제출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젊은 시절부터 노동당의 싱크탱크에서 활동했으며 훗날 상원의원이 됐다. 영은 예술개방학교, 사회적 기업가 학교, 상호부조 센터 등 시민단체를 설립하고 열정적인 사회운동을 벌였다.

노동당에 실망한 마이클 영은 자신의 소설에서 2034년 영국 사회의 어두운 미래를 묘사하는데, 지능지수와 학습 능력에 따른 철저한 위계질서의 사회가 등장한다. 실제로 1950년대 영국에서는 초등학교를 마친 후 ‘11플러스’ 시험 결과에 따라 대학 진학을 위한 그래머스쿨과 직업학교로 분리됐다. 지금도 약 30%의 학생은 대학에 진학하지만, 대다수 학생은 실업학교를 거쳐 노동자의 삶을 살아간다. 이렇게 ‘능력’에 따른 계급 불평등이 재생산된다.

마이클 영의 책이 출간된 후 ‘능력주의’라는 단어는 영어 사전에 올랐다. 영은 능력주의를 부정적 의미로 사용했지만, 1960년대 이후 능력주의는 점차 성취를 강조하는 긍정적 개념으로 사용됐다. 21세기 한국에서도 능력주의는 개인의 실력을 제대로 인정받는 공정한 이념으로 널리 유포되고 있다.

그러나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주장한 대로 능력주의는 사회적 세습을 교묘하게 은폐한다. 사람의 능력은 단지 개인의 노력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부모의 유전, 경제력, 문화자본, 사회적 영향에 의해서도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정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긍정적 우대 조치가 필수적이다. 형식적 평등만 보장되는 대학과 공무원 시험처럼 성적순 선발이 정당하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실제로 대학입시 성적은 부모가 가진 경제력의 영향을 받으며, 공무원 시험조차 부모가 가난하다면 제대로 준비하기 어렵다.

자녀 입시비리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6월25일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 출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자녀 입시비리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6월25일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 출석하는 모습 ⓒ 연합뉴스

2019년 조국 사태가 터지면서 다시 능력주의가 뜨거운 쟁점이 됐다. 교육을 통해 부모의 사회적 지위를 세습하는 엘리트의 행태에 대한 비판이 증가했다. 결국 능력주의도 세습을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당시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는 국회에서 말로는 공정을 강조하면서 조국 사태에 대한 사과는 거부했다.

민주당이 왜 청년들이 분노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동안 20~30대의 지지를 받은 이준석이 국민의힘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이준석은 “실력 혹은 능력 있는 소수가 세상을 바꾼다”고 말하면서 ‘능력주의’를 옹호해 ‘88만원 세대’와 ‘3포 세대’로 불리던 청년들을 현혹시켰다. 이준석은 적자생존의 사회 진화론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공정 경쟁’을 강조하고 청년과 여성 할당제를 비판했다. 여성과 빈곤층 등 약자를 교묘하게 무시하고 생존 경쟁에서 실패한 사람을 외면한다. 민주당이 공정의 가치를 무시하는 동안 국민의힘에서 괴물이 탄생했다. 그때서야 송영길 민주당 대표는 조국 사태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더 이상 상향 사회이동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올해 1월 리서치앤리서치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6명 이상은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게 하는 ‘계층 사다리’가 끊어졌다고 답변했다. 한국 사회를 ‘헬조선’이라고 불렀던 젊은이들이 촛불시위에 나섰지만, 이제 거대 정당에 실망하고 분노하고 있다. 균등한 기회와 사회정의의 가치가 지켜지지 않는다면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도 더욱 확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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