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가동된 마블의 세대교체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7.04 12:00
  • 호수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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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위도우》와 나타샤 아이덴티티

“Let me go. It's OK.”(날 보내줘. 괜찮아.)

이토록 담담하고도 애잔한 마지막 인사라니. 《어벤져스: 엔드게임》(2019)에서 블랙 위도우(스칼렛 요한슨)는 소울 스톤을 얻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마블에서의 퇴장을 알렸다. 그것은 정말이지 갑작스러운 작별 인사였다. 블랙 위도우 솔로 무비 제작이 예고된 상황에서 맞은 죽음이라 더욱 그랬다. “솔로 무비를 도대체 어떻게 풀어가려는 거지? 결말을 공개한 인물과의 이별식을 어떻게 치를 작정이지?” 《엔드게임》 이후 2년 만에 찾아온 《블랙 위도우》는 잠시 유예했던 블랙 위도우와의 이별을 진짜 그려내는 작품이다.

본명 나타샤 로마노프. 코드명 블랙 위도우는 마블 스튜디오의 성공신화를 일군 개국공신 중 한 명이다. 《아이언맨2》(2010)로 데뷔전을 치른 후 7개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를 오갔다. 시작은 미미했고, 끝은 창대했다. 《아이언맨2》에선 ‘섹시한 비서’로 더 주목받았지만, 시리즈와 함께 영웅으로서의 존재감을 늘려나갔다. 타노스의 손가락 튕기기로 인류 절반이 사라진 《엔드게임》에서는 남아 있는 어벤져스를 규합하는 리더십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블랙 위도우는 마지막 순간까지 어벤져스 멤버 중 비밀이 가장 많은 인물이었다. 이는 기밀 유지를 사명으로 하는 스파이 출신이라는 정체성에서도 기인하지만, 원년 멤버인 아이언맨(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캡틴 아메리카(크리스 에반스), 토르(크리스 헴스워스), 헐크(에드워드 노튼→마크 러팔로)가 독자 시리즈를 통해 전사를 쌓은 것과 달리, (호크 아이와 함께) 개별 작품 안에서 충분한 서사를 제공받지 못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늘 적재적소에 나타나 동료들을 도왔지만, 홍일점이란 이유로 여러 히어로와 핑크빛 구설에 오르는 운명도 도맡아야 했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11년 만에 빛을 본 솔로 무비

솔로 무비가 나오기까지 11년이 걸린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여성 히어로 무비에 대한 편견이 초반엔 걸림돌로 작용했을 것이다. 2015년 마블 엔터테인먼트(마블 스튜디오 모회사) 전 CEO 아이작 펄머터는 여성 히어로 완구는 인기가 없다는 이유로 블랙 위도우 관련 제품 제작을 대폭 줄이기까지 했는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솔로 무비 계획이 구체화될 리는 만무하다. (참고로 아이작 펄머터는 지금의 MCU를 이끈 마블 스튜디오 회장 케빈 파이기와 히어로 방향성으로 두고 여러 갈등을 빚었던 인물이다.)

블랙 위도우 솔로 무비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흘러나온 건 2018년. 경쟁사인 DC가 갤 가돗의 《원더우먼》(2017)으로 페미니즘 이슈를 선점하고 흥행까지 거머쥔 이후다. 마블의 첫 여성 솔로 영화로 《캡틴 마블》(2019)이 확정된 이후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존 솔로 무비들이 인물을 소개하는 프레젠테이션으로 첫 포문을 연 것과 달리, 《블랙 위도우》는 히어로의 마지막을 기리는 은퇴식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특별한 위치에 놓인다.

《블랙 위도우》는 시간 흐름상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2016)와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2018) 사이에 위치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두 영화를 짧게 브리핑하자면, 《시빌워》에서 우리의 영웅들은 히어로 규제안인 ‘소코비아 협정’을 두고 캡틴 옹호파와 아이언맨 옹호파로 쪼개져 ‘팀 킬’의 난장을 벌인 바 있다. 정부를 지지하는 아이언맨의 편에 섰던 블랙 위도우는 그러나 절체절명의 순간 캡틴 아메리카의 도주를 도움으로써 유엔으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리고 《인피니티 워》에서 어벤져스가 다시 봉합되는데, 그사이 블랙 위도우가 자신의 뿌리와도 같은 가족을 만나는 게 《블랙 위도우》의 주된 내용이다. 정체성 찾기란 점에서 부제를 ‘본 아이덴티티’를 카피한 ‘나타샤 아이덴티티’라 해도 좋을 듯싶다.

 

여전히 반짝이는 마블의 ‘떡밥 줍기’ 신공

언제나 그렇듯, 마블이 잘하는 건 ‘떡밥 줍기’다. 영화는 그동안 블랙 위도우의 과거에 대해 뿌려놓은 떡밥을 제대로 회수한다. 그러니까 그녀에 대해 속 시원하게 설명되지 않았던 것들, 가령 부다페스트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블랙 위도우는 그의 절친인 호크 아이(제레미 레너)와 이날을 《어벤져스》(2012)와 《엔드게임》에서 특별히 언급한 걸까. 로키(톰 히들스턴)가 블랙 위도우를 가리켜 “드레이코프(레이 윈스턴)의 딸”이라고 한 것은 무슨 의미일까. 스칼렛 위치(엘리자베스 올슨)가 염력으로 깨운 블랙 위도우의 트라우마는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이와 연관된 ‘레드룸’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여전히 팬들의 머릿속에 의문으로 남아 있는 것. 왜 블랙 위도우는 《엔드게임》에서 망설임 없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었을까.

먼저, 레드룸에 주목해야 한다. 레드룸은 소비에트연방 시절, 살인 병기이자 스파이인 ‘위도우’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KGB 산하 조직이다. ‘레드룸 프로젝트’의 대상은 어린 여자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이곳에 끌려와 피도 눈물도 없는 혹독한 훈련을 받고, 경쟁에서 도태되면 죽음에 처해지고, 정신적 세뇌를 당하는 것도 모자라 졸업 기념 선물로 ‘자궁 적출술’을 강제로 받는다. 여성 요원의 약점이 될 수 있는 모성이 싹틀 가능성을 애초에 차단하겠다는 게 불임시술의 이유였으니, 이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블랙 위도우의 얼굴이 왜 늘 그늘져 있었는지.

능력치 면에서만 보면 블랙 위도우의 전투력은 여타 히어로에 비해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생각해 보라. 신도 있고, 마법사도 있고, 괴물도 있고, 나무 인간도 있는 마블 히어로 무리에서 블랙 위도우는 일개 인간(?)일 뿐이다. 아이언맨처럼 첨단 슈트가 있는 것도, 캡틴 아메리카처럼 혈청을 맞아 ‘탈인간’으로 거듭난 것도 아니다. 토르와 아이언맨이 5G급 사양의 히어로라면, 블랙 위도우는 아날로그(1G)급이랄까. 이러한 태생적 한계를 영화는 현실감 넘치는 액션으로 막아내려 한다. 전반적으로 흥겹고 타격감도 좋고 멍때리며 즐기기에도 손색없는 액션이지만, 뇌리에 남는 액션 시퀀스가 없는 건 아쉬움이다.

첩보물(《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 강탈물(《앤트맨》), 오컬트물(《닥터 스트레인지》), SF(《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등 다양한 장르를 품어온 마블이 《블랙 위도우》에 강하게 녹인 것은 홈드라마적 분위기다. 블랙 위도우는 가족복도 유별나지, 블랙 위도우의 어두침침한 과거로 미뤄 짐작했을 때 이들 가족은 셰익스피어형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콩가루다. 아빠 알렉세이(데이빗 하버)는 허풍쟁이고, 엄마 멜리나(레이첼 와이즈)는 괴짜인데, 동생 옐리나(플로렌스 퓨)는 깐족거림에 일가견이 있다. 덕분에 이들이 모인 밥상머리에는 긴장감 대신 유머가 튄다. 장면과 대사로 인물의 개성을 구워내는 마블의 신공은 이번에도 탁월하다. ‘한 가족’으로 퉁쳐질 수 있는 캐릭터 개개인의 퍼스낼리티를 확고하게 심은 것 역시 점수를 줄 지점이다.

영화 《블랙 위도우》의 한 장면
영화 《블랙 위도우》의 한 장면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블랙 위도우가 남긴 유산

《블랙 위도우》는 MCU 페이즈4의 첫 포문을 여는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금 이상하지 않나. 이미 《엔드게임》에서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와 거대한 작별식을 치렀고, 《엔드게임》 이후를 그린 《스파이더맨: 파 프럼 홈》(2019)도 나온 마당에 굳이 과거로 돌아간 《블랙 위도우》를 페이즈4의 첫 영화로 내세운 게. 힌트는 레드룸과 맞짱 뜨는 블랙 위도우의 목표가 ‘복수’가 아닌, ‘구원’에 찍혀 있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위도우’라는 명명은 나타샤만의 것이 아니다. 이 영화에는 수많은 위도우가 등장한다. 암살자이기 이전에 피해자였던 위도우들에게서 나타샤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본다. 그것은 그녀 자신과 화해할 시간이자, 자신을 옥죄는 과거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갈 기회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힌트는 나탸사의 동생 엘레나다. 《블랙 위도우》는 스칼렛 요한슨과 작별하는 영화인 동시에 새로운 시대로 걸어나갈 플로렌스 퓨를 소개하는 무대이기도 하다(퓨는 월트 디즈니의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인 디즈니+가 준비 중인 드라마 《호크 아이》에도 캐스팅된 상태다). 요한슨에게도 퓨에게도 지금의 이 바통터치 시기는 의미심장하다. 이전과 달리 지금은 여성이 히어로물 안에서 결정권을 가질 수 있는 시대. 선배인 스칼렛 요한슨이 11년간 구르고 노력하며 획득해낸 기회들이 이렇게 퓨에게 이어진다. 그것은 블랙 위도우, 스칼렛 요한슨이 남긴 거대한 유산이다.

 

페이즈4 포문을 연 마블의 포부

2008년 마블은 꺼져가던 배우(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커리어에 인공호흡기를 달아주는 것을 시작으로, 예술영화에서 사랑받아온 배우(베네딕트 컴버배치)의 활동 영역을 넓히고, 현실의 슈퍼 스타(크리스 에반스, 톰 히들스턴)를 만들어내고, 배우의 숨은 목소리 매력을 발굴하고(빈 디젤, 브래들리 쿠퍼), 블랙 히어로(채드윅 보스만)를 탄생시키며 종적·횡적으로 발전을 거듭해 왔다. 《블랙 위도우》로 페이즈4의 포문을 연 마블의 포부는 더욱 원대하다. 케빈 파이기가 품은 세대교체의 핵심은 인종은 물론 성 정체성까지 성역 없이 품는 다양성이다. 결과물이 속속 대기 중이다. 마블 최초 아시아인 히어로가 주인공인 《샹치 앤 더 레전드 오브 텐 링스》가 9월 출격을 앞둔 가운데, 마동석을 비롯한 다인종 배우들이 뭉친 《이터널스》가 10월 개봉을 확정 지었다. 국내 팬들로서는 박서준의 《캡틴마블2》 합류도 비상한 관심 사항일 것이다. 사실 마블의 이러한 전략이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는 뚜껑을 열기 전엔 아무도 모른다. 특히나 MCU의 구심점 역할을 해온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크리스 에반스, 스칼렛 요한슨의 공백은 여전히 확인되지 않은 불안 요소다. 지난 10년간 팬들과 함께 성장해온 마블이 앞으로도 팬들과 추억을 공유할 수 있을까. 이 세계의 구심점 역할을 해낼 영웅이 나타날까. 마블이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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