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 자녀 입양, 99% 행복합니다”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1.08.01 13:00
  • 호수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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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면과 철조망 ⑨] 가슴으로 낳은 3남매 건강한 사회구성원으로 키워낸 임재훈 前 의원

“막내딸이 영어 천재예요. 내가 걔 앞에선 영어를 못 쓴다니까.” 

영락없는 팔불출 아빠다. 임재훈 전 바른미래당 의원(56)은 요즘 자식 자랑에 여념이 없다. 국민대 교수, 국민의힘 인재영입위원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어딜 가든 4남매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다. 4남매 중 3명은 가슴으로 낳았는데, 모두 탈북민이다. 

임 전 의원은 장녀 A씨(33)와 장남 B씨(31) 남매를 2012년에, 차녀 C씨(25)는 지난해 입양했다. 주위에서 “어떻게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면 임 전 의원 부부는 곧바로 “입양한 아이들이 우리에게 채워준 게 훨씬 많다”고 답한다. 26세 친아들은 9년 전 누나와 형이, 1년 전 여동생이 생길 때 누구보다 기뻐했다. 

C씨는 최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탈북한 지 2년여밖에 안 된 C씨는 부족한 기초 학력을 극복하고 초단기간에 유학 준비를 끝마쳤다. 일단 커뮤니티칼리지에 진학한 뒤 명문대 법대로 편입할 계획이다. 먼저 부모와 자식의 연을 맺은 A씨는 국내 최상위권 간호대를 나와 간호사로 일하고 있고, B씨는 전문대 전기과 졸업 후 전기기사로 진로를 정했다. 임 전 의원은 “차남까지 미국 유학 중이라 4남매를 언제 한자리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막막하다”면서도 “아이들이 잘 커가고 서로 돈독하게 지내니 그렇게 뿌듯할 수 없다”며 웃었다. 

ⓒ시사저널 최준필
ⓒ시사저널 최준필

2012년 탈북민 남매 첫 입양 

새로운 가족의 탄생 과정에서 어려움이 전혀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임 전 의원이 26년 정치 경력 가운데 의원 배지를 단 기간은 1년8개월이다. 그는 2018년 10월 오세정 당시 바른미래당 의원(현 서울대 총장)의 사퇴로 20대 비례대표 의원직을 승계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당직자로, 그것도 크고 작은 58차례 선거에 투입돼 악전고투한 임 전 의원에게 물질·시간적 여유가 있을 리 만무했다. 큰 상처를 안은 탈북민 아이들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보듬어야 할지도 숙제였다. 임 전 의원은 고비때마다 아내와 상의하고 기도하며 문제들을 해결해 나갔다. 

탈북민 자녀를 입양해야겠다는 생각을 먼저 한 사람은 누구였나. 

“아내다. 우리 부부가 출석하는 교회에서 아내에게 ‘탈북 청년과 결연을 맺어 도와주지 않겠느냐’고 제안한 데 따른 것이다. 결혼 전부터 북한 주민들에 대한 선교와 후원 활동에 참여해 오던 아내였다. 나도 크게 고민하지 않고 오케이했다. 당시 24세이던 장녀의 이름만 알고 6개월간 기도하면서 준비했다. 첫 만남이 아직도 생생하다. 모여있는 탈북 청년 열댓 명 중 맏딸을 보자마자 내 아이라 확신했다. 동시에 딸도 우리에게서 바로 아빠, 엄마란 느낌을 받았다고 나중에 회상하더라.” 

A씨의 친동생 B씨도 몇 달 후 임 전 의원 부부와 만나 한 가족을 이뤘다. 가족회의 끝에 법적 입양 절차는 밟지 않기로 했다. 북한에 남매의 생부·생모가 있다는 점을 고려했다. 아이들이 이미 성인이라 집에 들어와 살도록 종용하지도 않았다. 대신 수시로 만나 같이 대소사를 논의했다. 대소사에는 남한에서의 문제 외에 북한의 친부모와 관련한 일들도 포함됐다. 

문제 하나하나가 만만찮았을 텐데. 

“특히 북한발(發) 문제로 인해 아이들이 너무나 힘들어했다. 북한에 있는 아이들 친부모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하면서, 이분들을 한국으로 데려오려던 계획도 불투명해졌다. 이 밖에 북한에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소식이 들려올 때가 종종 있었다. 한번은 아이들 생모의 신변에 중대한 문제가 생겼다. 딸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방법이 없었다. 아내와 함께 딸의 손을 잡고 계속 기도만 했다. 온 집안이 눈물바다였다. 다행히 문제가 해결됐지만, 두고두고 마음에 사무친다.” 

양부모로서 해결해줄 수 없는 문제가 생길 때 안타까움이 클 것 같다. 

“초반에는 ‘우리가 어느 부분까지, 언제까지 이 아이들을 케어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됐다. 지나 보니 불필요한 걱정이었다. 부모가 자식과의 관계에 제한을 둘 수가 있나. 아이들과 연을 맺은 이상 그저 부모로서 무한한 사랑과 관심을 베풀게 되더라.” 

경제적인 부담은 없었나. 

“탈북민들은 정부로부터 학비와 일정 금액의 생활비를 지원받는다. 나는 가끔 아이들에게 용돈을 줬을 뿐이다. 오히려 맏딸은 대학 생활 중 아르바이트를 수없이 하면서 스스로 물질적 기반을 다졌다. 우리 부부에게 때마다 선물을 사주기도 해서 너무 미안했다.” 

임 전 의원은 남한 사회에서 꿋꿋이 일어선 장녀 얘기를 전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간호사인 A씨는 2018년 11월 결혼했다. 사위도 탈북민이었다. 임 전 의원 부부는 상견례부터 예식장 선정, 하객 초대, 신혼집 마련 등 딸의 결혼에 관한 전 과정을 그 어떤 부모보다 살뜰히 챙겼다. 결혼식 직전 예기치 않게 의원직을 승계하게 된 것까지 ‘딸의 지난날을 위로하고 기를 살려주려고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해석할 정도였다. 

ⓒ임재훈 전 의원 제공
큰딸의 결혼식 날 임재훈 전 의원이 하객들에게 인사 말을 하고 있다.ⓒ임재훈 전 의원 제공

결혼식 날 임 전 의원은 혼인 서약을 하는 딸을 보며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A씨의 결혼식은 축제였다. 임 전 의원 부부의 일가친척과 탈북민 140여 명이 A씨의 결혼식을 지켜보며 크게 감동했다. 참석한 탈북민들에겐 남한 사회에 대한 불신과 상처를 희망으로 덮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A씨 부부가 큰 사랑을 받고 성공적으로 인생 3막을 열어젖혔기 때문이다. 

“너무 귀엽죠?” 인터뷰 중 임 전 의원이 대뜸 어린아이의 사진을 보여줬다. 임 전 의원의 자랑 목록에는 A씨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세 살 손주도 추가됐다. 앞서 임 전 의원 부부는 외할아버지·외할머니가 되자마자 또 한 명의 탈북민 딸 C씨를 입양했다. 탈북과 남한 정착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은 C씨를 임 전 의원 부부는 ‘구출했다’고 표현한다. C씨는 친부모를 여의고 탈북한 후 중국에서 지내는 동안 극심한 트라우마에 사로잡히게 됐다. 수많은 여성 탈북민의 인권이 유린되는 모습을 목격해서다. 

2년여 전 천신만고 끝에 한국에 와서는 폐쇄적이고 외로운 삶을 살았다. 주중에 탈북민 대안학교에서 공부하고, 주말에는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사는 곳은 월 40만원짜리 고시원 방이었다. 그런 C씨가 숨통을 틔우는 시간이 있었다. 바로 임 전 의원 아내 문현숙씨와 함께하는 영어 수업이었다. C씨는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하나원)에서 나온 직후부터 문씨와 소통했다. 이때 영어를 배우고 싶다는 열의가 생겼다. 15년가량 영어강사 일을 해온 문씨가 일주일에 한 번, 세 시간씩 가르쳐주기로 약속했다. 북한에 살 때 C씨는 제대로 영어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 공부가 시작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C씨는 6개월 과정의 교재를 한 달이 채 안 돼 마스터하는가 하면 인터넷을 통해 필요한 공부도 스스로 찾아서 해나갔다. 

ⓒ임재훈 전 의원 제공
임재훈 전 의원에게 막내딸이 선물한 의자ⓒ임재훈 전 의원 제공
ⓒ임재훈 전 의원 제공
지난해 입양한 막내딸과 같은 티셔츠를 입고 포즈를 취한 임재훈 전 의원 부부ⓒ임재훈 전 의원 제공

막내딸이 이토록 열심히 공부하게 한 동력은 뭐였을까. 

“일단 언어적으로 천재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본다. 이를 발현시킬 계기가 없었을 뿐이다. 남한에서도 주변 사람들이 아이에게 ‘미용 기술을 배워라’는 등 당장 취직에 유용한 진로만 추천했다고 한다. ‘해외 대학에 가서 공부해 봐라’ ‘할 수 있다’ ‘네가 원하면 어떻게든 유학길을 제시해 주겠다’고 말해 주는 사람이 아내(문씨) 한 명이었다. 막내딸이 다른 사람보다 아내의 말을 잘 따르게 됐다.” 

이후에 어떤 조치를 취했나. 

“대안학교의 영어교육 수준이 막내딸에게 맞지 않는 것 같았다. 학교에 양해를 구하고 딸이 유학에 필요한 영어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또 열악한 고시원에서 사는 모습이 딱해 우리 집으로 들어오게 했다.” 

안정감이 생긴 C씨는 공부에 더욱 고삐를 죄었다. 영어를 배운 지 1년3개월여 만에 유학에 필요한 토플(TOEFL) 점수를 가뿐히 따냈다. 미국 중부의 명문대로부터 입학 허가서도 받았다. 학생비자 인터뷰까지 무사히 통과했다. 그야말로 인생 역전이었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부유하던 C씨는 국제변호사의 꿈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뜻이 있으니 길이 생겨났다. C씨의 실력과 비전을 알아본 미국의 기독교인 독지가들이 유학비와 생활비 전액을 지원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제3국 출생 탈북민도 지원해야” 

얼마 전 임 전 의원 집으로 대형 택배가 배달됐다. 고급 서재 의자였다. 누가 보내온지 몰라 잠시 소동이 일었다. 이는 C씨가 임 전 의원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었다. 임 전 의원에게 미리 말했으면 못 사게 만류하리라 짐작하고 몰래 주문해 놓은 것이다. 과거 상처와 친부모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아직 ‘아빠’라는 말도 쉽게 꺼내지 못하는 막내딸이었다. 고스란히 전해지는 진심에 임 전 의원은 “마음 아프면서도 고맙고 행복해 미치겠더라”며 먹먹한 심정을 에둘러 전했다. 

이런 기적들을 체험하며 임 전 의원 부부는 주변에 자신 있게 탈북민 자녀 입양을 추천하게 됐다. 임 전 의원은 “선뜻 동참하는 사람이 없을지라도 계속 우리 경험을 전하다 보면 세상이 조금은 바뀌어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완전한 행복이 100%라면 현재 99% 행복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탈북민 자녀들이 상처와 편견을 극복하고 완전한 행복감을 느낄 때까지 나머지 1%를 채워넣지 않을 예정이다. 

앞으로의 비전은. 

“탈북민 3만5000여 명 중 대부분이 월 소득 200만원 이하 비정규직 노동자다. 전문직 종사자는 200명도 채 되지 않는다. 탈북민들이 느끼는 경제적 어려움과 고립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탈북민도 알려지지 않는 것뿐이지 많다. 중국·몽골 등 제3국 출생의 탈북민 자녀들이 늘어나고 있는 점도 우려스럽다. 북한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부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탈북민들의 여러 어려움을 해소하고, 이들이 건강한 사회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 임재훈 전 의원은 1966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나 숭실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행정대학원 정치학 석사 과정을 마쳤다.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조직부장으로 정치에 입문한 뒤 23년여 동안 주로 정당 사무처 당직자로 일했다. 2016년 국민의당 창당에 참여해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 국회의원(14번)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이후 2018년 10월1일 오세정 바른미래당 의원이 서울대 총장 재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사퇴하면서 같은 달 2일 의원직을 승계했다. 의원 임기 중 탈북민 지원를 위한 법안 발의, 토론회 개최 등에 활발히 나섰다. 임기 종료 후 국민대 교수로 재직해 왔고 최근 국민의힘 인재영입위원에 임명되며 정치 행보를 재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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