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기의 과유불급] 노소영씨의 ‘아버지의 소리 없는 울음’
  • 전영기 편집인 (chunyg@sisajournal.com)
  • 승인 2021.11.01 08:00
  • 호수 1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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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면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재임 시(1988~93년) 이룬 공적 중 북방외교를 빼놓을 수 없다. 1989년 헝가리를 시작으로 92년 베트남과 수교할 때까지 공산권 37개 국가와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니 역대 어느 대통령도 갖지 못한 기록이다.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동방의 강소국 한국한테 차관 30억 달러를 빌려 달라고 손을 벌렸다. 대한(對韓) 수교의 선수를 소련한테 뺏겨 위기감을 느낀 중국 지도자 덩샤오핑은 북한 김일성에게 “한국과 외교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사정을 이해하라”며 한·중 수교에 박차를 가한다. 세계 공산주의의 양대 열강이 앞다퉈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목을 매게 되자 급해진 건 북한의 김일성이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향년 89세를 일기로 사망한 가운데 10월27일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조문이 시작되고 있다. ⓒ 연합뉴스
노태우 전 대통령이 향년 89세를 일기로 사망한 가운데 10월27일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조문이 시작되고 있다. ⓒ 연합뉴스

김일성 “공화국의 붉은 기, 언제까지 나부낄지 몰라”

1990년 가을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 주석은 덩샤오핑에게 “남조선 정부를 승인하지 말아 달라. 승인하더라도 최대한 시기를 늦춰 달라”고 사정했다. 김일성이 덩샤오핑한테 “공화국의 붉은 기가 과연 얼마나 나부낄 수 있을까”라며 걱정했다는 얘기(돈 오버도프, 《두 개의 한국》)는 노태우 북방외교의 드라마틱한 장면이다.

1990년을 전후해 노 전 대통령이 추진한 북방외교는 한국이 중국·러시아·북한을 쥐고 흔든 동아시아의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그럴수록 한·미 동맹을 긴밀하고 견고하게 다졌다. 그러면서 아버지 부시 대통령에게 “남북대화는 우리가 주도적으로 하겠다. 미국은 옆에서 협조만 해달라”고 말했다. 북한은 한국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노태우 북방외교의 수단은 평화 무드와 개방 압력이었다. 서울올림픽 개최국의 문화력과 급성장한 경제 국력을 한껏 활용한 전방위적 압박 외교의 성과는 컸다. 북한은 노 대통령 임기 중 단 한 건의 잠수함 침투도, 서해상 무력시위도, 육상에서 우발적 도발 사건도 펼치지 못했다.

노태우 시대로부터 20년이 흐른 오늘, 북한은 동아시아의 핵강국 지위를 내세워 시도 때도 없이 각종 미사일 협박을 일삼고 중국은 한국을 무슨 조공국가처럼 취급하며 미국은 한국 내 반미 분위기에 넌더리를 내고 있다. 미국이 언제 한국에 등을 돌려도 별로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한국과 한국인은 노태우 때보다 먹고사는 문제가 좀 더 나아졌을 뿐 죽고 사는 외교안보 문제에서 더 퇴행하고 초라해지지 않았나 자괴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노태우의 북방외교에 김대중·노무현·문재인 빚져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녀 노소영씨는 지난 4월 페이스북에 ‘아버지의 인내심’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글을 올렸다.

“한마디 말도 못 하고 몸도 움직이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워 어떻게 십여 년을 지낼 수 있을까? 소뇌위축증이라는 희귀병인데 대뇌는 지장이 없어서 의식과 사고는 있다(이것이 더 큰 고통이다). 때로는 눈짓으로 의사표현을 하시기도 하는데 정말 하고픈 말이 있을 때 소통이 잘되지 않으면 온 얼굴이 무너지며 울상이 되신다. 아버지가 우는 모습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다.”

노 전 대통령이 ‘소리가 나지 않는 울음’ 속에 남긴 몇 마디 유언 가운데 “위대한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하고 영광스러웠다”는 대목이 있다. 그의 봉사·감사·영광의 목록엔 틀림없이 1990년대 북방외교가 들어있을 것이다. 국가는 계속되며 역사는 연속한다. 노태우는 과도 많지만 그의 북방외교 공 덕분에 김대중·노무현·문재인의 대륙시대가 전개되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너무 많은 돌을 던지지 말 일이다.

전영기 편집인
전영기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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