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솨이 폭로로 드러난 중국의 권색(權色) 치부
  • 모종혁 중국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11.21 14:00
  • 호수 1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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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테니스 스타, 장가오리 전 상무위원 부부로부터
성폭행 등 당한 엽기적 사건 털어놔

11월14일 세계여자테니스협회(WTA) 트위터에 한 성명이 올라왔다. 스티브 사이먼 WTA 최고경영자(CEO)는 “펑솨이(35)가 주장하는 전직 중국 지도자의 성폭력은 진지하게 다뤄져야 한다”며 “그녀가 주장하는 행위는 어느 사회든 묵인되지 않고 조사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펑솨이는 중국의 프로 테니스 스타이고, 전직 중국 지도자는 장가오리 전 부총리 겸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75)을 가리킨다. 펑솨이는 11월2일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에 ‘장가오리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오랜 기간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는 장문의 글을 올렸다.

사이먼 CEO는 “앞으로 나선 펑솨이의 놀라운 용기와 힘에 대해 칭찬한다”면서 “전 세계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냄으로써 부당함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우리는 이 문제가 검열 없이 공정하고 투명하게 조사되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펑솨이의 폭로 후 2주가 지났지만, 중국 정부는 관련 사안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11월15일 외교부 정례 브리핑에서 한 외신기자가 사이먼 CEO의 발언에 대한 입장을 물었으나, 자오리젠 대변인은 “그 사건을 들어보지 못했다”면서 “외교 문제가 아니다”고 발뺌했다.

‘펑솨이 미투’ 다룬 중국 언론보도 전혀 없어

현재 중국에서는 펑솨이가 당국에 의해 강제로 연금당했다는 소문이 은밀히 퍼지고 있다. 왜냐하면 펑솨이가 작심하고 ‘미투’를 감행했지만, 그 뒤 아무런 행보를 보이지 않고 연락마저 두절됐기 때문이다. 진실을 폭로한 펑솨이의 웨이보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바이두’에서는 검색되지 않는다. 또한 펑솨이의 폭로를 다루는 뉴스는 일절 없고, SNS와 커뮤니티의 포스트는 관리자에 의해 바로 삭제된다. 그나마 외부로 목소리를 내는 이는 일부 여성인권 운동가다. 11월15일 ‘자유 중국 페미니스트’는 트위터를 통해 펑솨이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의 테니스 스타 크리스 에버트 등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들도 펑솨이의 안부를 걱정했다.

이런 움직임에도 중국 당국은 요지부동이다. 펑솨이의 폭로로 중국 최고 권부의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웨이보에서 밝힌 내용을 중심으로 펑솨이의 미투 사건을 재구성해 보면 이렇다. 그는 1986년 후난성 샹탄에서 태어났다. 8세 때부터 테니스 선수였던 외삼촌에게 정식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실력이 일취월장한 펑솨이는 10세에 전국어린이대회에서 우승했고, 13세에는 국제테니스연맹 주관 청소년대회에서 우승했다. 그리하여 1999년에는 톈진시 테니스팀에 뽑혀 톈진으로 이주했다.

2002년 펑솨이는 중국테니스협회의 추천으로 미국으로 가 유학했다. 또한 미국 스포츠매니지먼트사와 정식 계약을 맺고 활동했다. 중국 테니스 선수로는 최초의 특급 대우였다. 이에 부응하듯, 2004년부터 그는 국제무대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중국인으로는 최초로 세계 랭킹 31위까지 올랐다. 2007년부터는 복식에 전념하면서 크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2009년부터 여러 국제대회의 복식 경기에서 우승했다.

이 시기 펑솨이에게 접근한 이가 장가오리였다. 당시 장가오리는 톈진시 당서기였다. 그는 자신의 관할 시 테니스팀 소속이었던 펑솨이를 불러 함께 테니스를 친 뒤 성폭행했다. 그 후 장가오리는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승진해 베이징의 최고 권부로 옮겨갔다. 그는 펑솨이에게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2013년 펑솨이는 대만의 셰수웨이와 짝을 이뤄 윔블던 복식에서 우승했다. 꿈에 그리던 첫 그랜드슬램 대회 제패였다. 이듬해에는 프랑스오픈에서 우승했고, 세계 복식 랭킹 1위까지 올랐다. 하지만 3년 전 장가오리가 상무위원직을 퇴임하면서 다시 펑솨이에게 연락해 왔다.

상무위원은 중국공산당에서도 최고 이너서클로 단 7명뿐이다. 비록 장가오리가 은퇴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펑솨이는 장가오리의 집에 가서 테니스를 쳤고, 장가오리의 요구에 성관계를 다시 맺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엽기적이다. 공식적으로 펑솨이를 초대한 사람은 장가오리의 부인인 캉제였다. 게다가 캉제는 남편이 펑솨이와 성관계를 나누는 사이에 문밖에 서서 망을 봤다는 것이다. 그 뒤 펑솨이와 장가오리는 3년 동안 불륜 관계를 지속했다. 그러는 사이 캉제는 남편 앞에서는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지만, 펑솨이와 단둘이 있을 때는 조롱하고 냉소했다.

이렇게 암암리에 증폭되던 펑솨이와 캉제의 갈등은 10월30일 대판 싸우면서 터졌다. 또한 장가오리가 계속 사태를 회피하자, 펑솨이는 자신이 권력자의 노리개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렇기에 폭로를 감행했던 것이다. 펑솨이의 글에는 권력 앞에 힘없이 무너졌던 자신의 무력감, 장가오리와 겪었던 여러 일에 대한 회한과 자책, 장가오리에 대한 애증 등이 복잡하게 담겨 있다. 또한 오랫동안 장가오리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했던 과정이 구체적으로 기록됐다. 따라서 장쩌민 전 국가주석 계파인 장가오리를 몰락시키기 위해 시진핑 국가주석 측이 폭로를 사주했다는 일부 외신의 음모론은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AP 연합· EPA 연합
ⓒAP 연합· EPA 연합

독재와 人治가 불러왔던 각종 성추문

비록 펑솨이의 글은 20분여 만에 삭제됐으나, 파장은 굉장히 컸다. 펑솨이의 웨이보 팔로워가 56만 명에 달했기에 폭로 내용은 SNS를 통해 곧바로 퍼져 나갔다. 흥미로운 점은 중국인들의 반응이다. 적지 않은 이들은 “이런 스캔들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중국에서 최고지도자의 성적(性的) 일탈은 전통처럼 있어왔다. 중국의 국부인 마오쩌둥은 정식 결혼만 네 번 했고, 혼외 관계의 여인이 적지 않았다. 네 번째 부인인 장칭은 문화대혁명 기간에 마오쩌둥의 침실에 들어갈 여인을 직접 선별하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견제 없는 공산당 독재와 인치(人治)로 인해 권색(權色) 거래, 축첩, 혼외 자녀 등 각종 성추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펑솨이의 미투처럼 공개되는 경우는 드물다. 미투를 경원시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강한 데다, 후환이 두렵기 때문이다. 중국 언론지상에 성추문이 대대적으로 드러나는 경우는 권력 다툼에서 패배한 이들이 항상 타깃이 되었다. 시진핑 집권 이후 몰락한 보시라이 전 충칭시 당서기, 저우융캉 전 상무위원, 링지화 전 통일전선부장 등은 권색 거래와 축첩 혐의로 난도질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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