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지 않는 나라, 이제 해가 저물 위기에…
  • 사혜원 영국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11.21 10:00
  • 호수 1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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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여왕 ‘건강 악화’에 영국 국민들 걱정
“인기 없는 왕세자 찰스가 왕위 계승하면 영연방 허물어질 것”

1952년 여왕이 된 이후 엘리자베스 여왕(95)은 명실상부 영국 왕실의 상징이자, 영연방 국가들을 하나로 모으는 인물이다. 여왕의 건강이 나빠졌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영국인들은 하나같이 가슴을 졸이고, 왕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여왕의 건강 관련 뉴스에는 귀를 쫑긋 세운다. 내년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왕위에 오른 지 70년 되는 해이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임시 공휴일을 하나 추가할 예정이다.

이처럼 상징적인 존재인 여왕은 최근 한 달간 중요한 일정에 ‘건강상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고, 심지어 영령기념일(현충일) 추도예배 행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여왕이 세계 1, 2차대전 참전 용사들을 기리는 추도예배 행사에 빠진 것은 그가 임신 중일 때 두 번, 그리고 왕실 공식 일정으로 해외에 있었을 때 네 번뿐이다. 더군다나 행사를 2시간 앞두고 갑자기 참석할 수 없다고 밝혀 위독한 게 아니냐는 대중의 걱정은 더 심해졌다.

그러나 11월17일 오전, 엘리자베스 여왕은 윈저성에서 퇴임을 앞둔 닉 카터 영국 국방참모총장을 맞이했다. 부쩍 야윈 모습에 걱정하는 시민들도 있었지만, 다시 건강한 모습을 볼 수 있어 기쁘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여왕이 건강하다는 뉴스에는 ‘대단한 그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랑하는 여왕님, 신의 가호가 있길, 그리고 우리를 오래 다스려 주시길’ ‘우리가 유일하게 믿는 지도자인 여왕님, 건강하세요!’ 등 댓글이 일제히 달렸다. 영국 시민들이 여왕을 얼마나 각별하게 생각하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6월11일(현지시간) 엘리자베스 여왕(앞 오른쪽)이 영국 식물원 ‘에덴 프로젝트’에서 열린 왕실 주최 G7 정상 환영 만찬에 찰스 왕세자(왼쪽) 부부, 윌리엄 왕세손 부부(뒤쪽)와 함께 참 석하고 있다.ⓒAP 연합

비난받는 찰스 대신 왕세손 윌리엄에게 더 관심

이처럼 영국 여왕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질 때마다 사람들의 큰 관심사는 여왕의 뒤를 이을 차기 후계자에게 쏠린다. 왕위 계승 1순위인 장남 찰스 왕세자(73)가 당연히 물려받겠지만, 그의 인기나 영향력은 어머니 엘리자베스 여왕에 비해 너무 떨어지는 탓이다. 심지어 그의 아들인 윌리엄 왕세손(39)에 비해서도 형편없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찰스를 건너뛰고 바로 윌리엄이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는 얘기마저 나올 정도다. 왜 그럴까.

먼저 찰스 왕세자가 영국 국민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다이애나 왕세자비와의 결혼생활 도중 다른 여성과 바람을 피웠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몇십 년이 지난 일이지만, 다이애나비를 각별히 아끼던 영국 국민에게는 지금도 용서할 수 없는 행위로 기억되는 것이다. BBC 인기 드라마인 《더 크라운》에도 찰스가 다이애나를 배신한 악역으로 등장할 만큼 지금도 여전한 영국 국민의 비판적인 여론을 볼 수 있다.

또한 ‘국민 불륜녀’로 불리는 지금의 부인 카밀라 파커 볼스가 찰스 왕세자의 왕위 즉위와 동시에 왕비가 된다는 점에 여론은 더 냉소적이다. 찰스 부부도 이와 같은 영국 국민의 여론을 의식한 듯 2005년 결혼 당시 “찰스 왕세자가 왕이 된다 하더라도 카밀라 불스는 ‘Queen consort’(왕비)가 아니라 ‘princess consort’(왕자비)라고 불릴 것”이라고 선언했고, 지난해에도 이 결정은 변하지 않았다고 다시 선언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왕세자 재단(The Prince’s Foundation·찰스의 자선재단)에서 일어난 ‘기부 스캔들’ 때문에 여론이 더 나빠졌다. 150만 파운드(약 23억원)를 왕세자 재단에 기부한 사우디아라비아 후원자의 기사 작위와 영국 시민권 획득을 도왔다는 것이다. 2011년에도 비슷하게 찰스 왕세자의 자선단체가 정부 측에 로비를 벌였다는 스캔들이 있었다. 이와 같은 스캔들 때문에 왕세자 재단의 회장인 마이클 포셋이 사임하기도 했다.

여기에 찰스의 나이와 성격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들린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25세에 왕위에 올랐다. 찰스 왕세자는 왕위에 오르기도 전에 벌써 일흔이 넘었다. 영국 왕실이 실질적인 권력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것은 맞지만, 그만큼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직책이기도 하다. 이처럼 국민을 안정시켜야 하는 왕이 자주 바뀌는 것은 영국 국민뿐만 아니라 영연방 국가들에도 불안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또한 영국 왕실에 대한 책이나 심지어 찰스 자신의 자서전에서조차 ‘거만하고 권위적’이라고 표현되는 찰스 왕세자의 성격이 왕위에 걸맞지 않는다는 비판도 따른다.

 

“영국 왕실 아닌 엘리자베스에 대한 사랑”

찰스 왕세자가 나이도 있고, 다이애나비의 죽음 이후 영국 국민에게 인기도 없다 보니 여왕의 손자인 윌리엄이 바로 차기 왕이 돼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하지만 이런 논란과는 별개로 찰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 왕위에 오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영국 내 정설이다. 영국 왕실 웹사이트에 따르면, 왕위 계승 순위는 법으로 정해져 있다. 찰스 왕세자, 윌리엄 왕세손, 그리고 윌리엄의 자녀들인 조지 왕자와 샬럿 공주로 이어지는 계승 순위는 이미 24위까지 확고하게 정해져 있다. 전통과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영국 왕실이 여론을 따라 예외를 두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공통된 의견이다.

영연방 국가들을 하나로 모아주는 여왕이 사라진다면, 향후 ‘영연방’이 과연 계속 존재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 영연방 국가 중 호주·캐나다·뉴질랜드·자메이카 등을 포함한 16개국은 아직도 엘리자베스 여왕이 공식적으로는 국가원수다. 실질적인 역할이 크지는 않지만, 굉장히 큰 상징적 의미를 갖는 자리인 것이다.

다만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 대다수 나라가 이미 독립한 지금, 영연방 국가들은 여왕이 없는 상황에서 굳이 다른 왕을 계속 국가원수로 모실 필요는 없어 보인다. 특히 21세기 들어 다문화·다국적화되면서 영연방 국가들 사이에서도 왕실의 존속에 대한 논의가 잦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때문에 영국 왕실의 권위가 사실상 엘리자베스로 끝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영국 내에서 제기되고 있다.

영국의 한 언론은 이미 1999년 공화국으로 변경하자는 국민투표를 한 적이 있는 호주를 포함해 대다수 영연방 국가가 찰스 왕세자가 왕위에 오르는 시기의 분위기에 따라 (영연방 탈퇴 여부를) 결정할 것 같다고 예측했다. 런던 킹스칼리지의 리처드 드레이튼 역사학자도 “바베이도스(11월30일 영연방 탈퇴)를 기점으로 카리브해의 다른 나라들 역시 영국 왕실의 역할을 없애거나 아예 축소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영연방 국가들의 공통적인 의견은 한 언론이 지적한 다음 내용에서 잘 드러난다. “엘리자베스 여왕 개인의 인기는 엄청나다. 여왕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이와 같은 존경과 사랑은 영국 왕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왕의 후계자에게 영연방 국가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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