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정권 바뀌면 약속 뒤집어”…‘황장엽 망명 동지’ 김덕홍의 마지막 호소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1.11.28 12:00
  • 호수 1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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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인 김길선씨 통해 근황·심경 밝혀

“회복된 명예를 살아있는 동안 보장하겠다던 약속이 또 뒤집혔다.” 

고(故)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망명 동지’인 김덕홍 전 노동당 중앙위원회 자료연구실 부실장(83)이 시사저널에 병상(病床) 메시지를 전해 왔다. 그가 6년 전 회고록 출간 이후 대외에 심경을 밝힌 건 처음이다. 

1997년 2월12일 황 전 비서와 함께 대한민국으로 망명한 뒤 진보정부 집권기마다 고초에 시달린 김 전 부실장은 “정부의 반복되는 외면과 무시에 더 이상 동요하진 않는다”고 했다. 이 입장이 평온함에서 비롯됐다고 해석하면 오산이다. 김 전 부실장은 2004년 자신의 여권 발급을 거부한 노무현 정부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고, 3년6개월 뒤 최종 승소했다. 이겼다는 기쁨도 잠시, 그는 몸져누웠다. 김대중 정부 때부터 쭉 쌓여온 스트레스가 임계점을 넘어버린 것이다. 건강 악화로 당당했던 체구가 몰라보게 줄었고 거동도 불편해졌다. 청각이 거의 소실돼 정상적인 의사소통도 힘든 상황이다. 

현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김 전 실장은 국책연구기관 고문직 해촉, 전담 경호팀 축소 등을 겪었다. 당초 김 전 부실장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건강상 타인을 만날 형편이 못 된다. 허락한다면 대리인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는 응답이 돌아왔다. 대리인은 김길선씨(67)다. 1997년 탈북한 김길선씨는 1999년부터 22년째 비서이자 지기(知己)로 김 전 부실장 옆을 지키고 있다. 그는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문학부 고전문학과를 졸업하고 북한 제2자연과학원(현 국방과학원) 산하 제2자연과학출판사 정책편집부 기자로 17년간 일했다. 황 전 비서, 김 전 부실장과는 김일성대 재학 시절부터 익히 알던 사이였다. 

김길선씨는 1999년 1월 남한 정착 후 황 전 비서의 비서 역할을 담당한 몇 달을 제외하곤 김 전 부실장과 오롯이 함께해 왔다. 2015년 김 전 부실장의 회고록 《나는 자유주의자이다》 출간 작업을 진두지휘한 사람도 김길선씨다. 현재 안가(安家)에 거주 중인 김 전 부실장은 거동과 대화가 힘든 와중에도 김길선씨와 소통하며 취재에 응했다. 팔순을 훌쩍 넘긴 노(老) 망명객은 어쩌면 마지막으로 대한민국과 국제사회를 향해 호소하는 듯했다. 충청북도 모처에서 김길선씨를 만나 김 전 부실장의 소리 없는 절규를 전해 들었다. 

ⓒ연합뉴스
김덕홍 전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자료연구실 부실장이 1998년 5월7일 국가안전기획부에서 열린 입국 1주년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발언하는 모습ⓒ연합뉴스

김덕홍 전 부실장이 2020년 12월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비상근 고문직에서 해촉되고, 그의 전담 경호팀 규모도 줄었다고 들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나. 

“2008년 1월 여권 발급 소송 승소 직후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더 수척해졌다. 청력을 잃다 보니 말이 어눌해졌고 글도 잘 못 쓴다. 환경적으론 나오던 급여가 끊기고 안전에 대한 불안감이 증폭됐다. 무엇보다 회복했던 명예를 또다시 빼앗긴 점이 어처구니없다.” 

명예를 또 빼앗겼다는 게 무슨 말인가. 

“김 전 부실장은 노무현 정부 시절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의 전신인 통일정책연구소 상임고문직을 박탈당한 바 있다. 지위와 대우, 즉 명예를 잃어버린 것이다. 이명박 정부 때도 명예 회복은 이뤄지지 않았다. 박근혜 정권기인 2014년 9월에야 김 전 부실장은 명예를 회복하고 직책(국가안보전략연구소 고문)을 되찾았다. 그는 감격하며 ‘북한 땅을 다시 밟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하는 한이 있더라도 회복된 명예만은 가슴 깊이 안고 가겠다’고 되뇌었다. 문재인 정부는 이마저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2014년의 명예 회복 과정을 좀 더 설명한다면. 

“김 전 부실장이 (건강·나이상) 더 늦으면 명예 회복이 영영 어렵겠다는 생각에 2014년 7월 정부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두 달 뒤 마침내 정부로부터 명예 회복 인증서를 받았다. ‘김 전 부실장이 살아있는 동안은 변동이 없을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였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가 이를 뒤집은 거다.” 

김길선씨가 황장엽·김덕홍 두 망명 동지의 관련 자료를 들여다보고 있다.ⓒ시사저널 오종탁

정권이 바뀌었다고 명예 보장 약속을 파기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김 전 부실장의 낙심이 클 것 같다. 

“정부의 외면과 무시, 무관심 속에 이미 오랜 시간 직책 없이 살았다. 되도록 연연하지 않으려 한다.” 

앞서 황 전 비서와 김 전 부실장은 망명을 결행한 다음 날 주중 한국대사관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친서를 받았다. ‘북한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대한민국 정부가 책임지고 황 전 비서와 김 전 부실장의 민간 차원 대북 사업을 지원하고 신변 안전을 보장하며 황 전 비서에게는 장관급, 김 전 부실장에겐 차관급 대우를 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어 정부는 국가안전기획부(국정원 전신) 산하에 황 전 비서를 이사장으로, 김 전 부실장을 상임고문으로 하는 통일정책연구소를 신설했다. 

김영삼 정부가 약속했던 사안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신변 안전 보장’만 남겨놓고 공중분해됐다. 배경에는 정상회담 등 남북 해빙 무드가 있었다. 2000년 6월13~15일 북한 평양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났다. 김 전 부실장은 “한국의 언론은 연일 남북 정상회담 보도를 쏟아내는 한편 김정일의 언행을 놓고 파격적이라느니 식견 있는 지도자라느니 열을 올리고 있었다”며 “두 정상이 손을 맞잡고 입이 터지게 웃는 모습 등이 생중계될 때는 온 대한민국이 ‘우리 민족끼리·민족 공조’ 신기루에 함몰되는 듯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비슷한 장면은 2007년, 2018년에도 반복됐다. 

2000년 1차 남북 정상회담 이후 황 전 비서는 김 전 부실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북한 정권의 기만성, 한반도 문제의 본질 등을 폭로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은 황 전 비서가 명예회장으로, 김 전 부실장이 초대 회장으로 있던 탈북자동지회의 월간 소식지 ‘민족통일’에 실렸다. 김 전 부실장은 중국 내 비밀 라인을 가동해 정상회담에 관한 북한 내부 문서도 입수해 언론에 전달했다. 햇볕정책에 타격이 될까 우려한 김대중 정부는 2000년 11월 ‘민족통일’ 발간을 중지시키고 황 전 비서와 김 전 부실장에 대해 △정치인·언론인 접촉 △외부 강연 △책 출판 △민간 차원의 대북 민주화 사업 등을 하지 못하도록 억압했다. 아울러 황 전 비서와 김 전 부실장의 미국 방문 문제가 대두되자 통일정책연구소 직책을 박탈했다. 김길선씨는 김 전 부실장의 비서이자 통일정책연구소 연구위원, ‘민족통일’ 편집장으로 당시 상황을 모두 지켜봤다. 

김 전 부실장이 망명 후 가장 열정적으로 활동했고, 그만큼 저항도 많이 받았을 때다. 

“국정원에서 어찌나 압력을 가했는지 늘 사람들로 북적이고 위세도 대단했던 탈북자동지회 사무실이 며칠 새 폐업한 것처럼 썰렁해졌다. 국정원은 김 전 부실장에게 ‘북한에서 김덕홍이 탈북자동지회 회장 자리에 앉아있는 걸 달가워하지 않으니 동지회를 살리고 예산을 받고 싶으면 당장 회장직에서 사퇴하라’는 요구도 했다. 김 전 부실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국정원은 ‘황 전 비서와 김 전 부실장이 방미를 감행할 경우 암살을 사주할 수 있다’는 식으로 협박하기도 했다. 직책 해임 조치의 경우 여론의 역풍으로 번복됐지만, 이후 노무현 정부 때 기어이 시행된다.”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와 김덕홍 전 노동당 중앙위 자료연구실 부실장이 1997년 4월20일 서울공항을 통해 대한민국에 입국하면서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황장엽 전 비서는 김 전 부실장과 점차 멀어졌다. 국정원의 압력 때문이었나. 

“회유가 주효했다고 본다. 국정원은 황 전 비서를 향해서도 ‘황장엽이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면 용서해 주겠다’는 김정일의 말을 그대로 전하는 등 비상식적인 대응을 펼쳤다. 황 전 비서도 초반에는 격분하며 국정원을 ‘적’으로까지 규정했다. 국정원이 황 전 비서에게 ‘인간중심철학연구소 설립’ 카드로 회유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황 전 비서는 국정원이 자신과 김 전 부실장의 미국 방문 저지에 사활을 걸고 있다는 걸 간파하고 자신감을 얻었는지 언젠가부터 인간중심철학에 관한 개인 연구소 설립과 방미 문제를 두고 흥정하는 모습이었다.” 

황 전 비서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집대성한 인간중심철학은 북한에서 통치 체제의 근간인 주체사상으로 전용됐다. 황 전 비서 역시 망명 직전까지 노동당 주체사상 담당 비서로 일하면서 북한 세습독재 체제의 유지와 공고화를 사상·이론적으로 지원했다. 김 전 부실장은 주체사상을 놓지 못하는 황 전 비서에게 “북한 정권을 만든 주체사상을 가지고 연구소를 차려 후대 양성까지 하겠다는 게 말이 되느냐”면서 “일신의 집착과 야심을 북한 자유화란 대의명분이 걸린 방미 문제와 흥정한 데 대해 훗날 북한 주민들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일갈했다. 마지막 설득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황 전 비서는 2002년 방미를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황 전 비서와 김 전 부실장은 수차례 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좁혀지지 않는 입장 차를 확인하고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 결국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주도로 북한 개혁·개방을 실현하고 한반도 통일을 성취하자’는 두 사람의 뜨거운 결의는 빛이 바랬다. 황 전 비서는 8년 뒤인 2010년 10월 세상을 떠났다. 그가 방미와 망명 동지를 등진 대가로 얻은 인간중심철학연구소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다. 

김 전 부실장은 ‘별 볼일 없는 사람’ ‘황 전 비서와 망명하지 않았다면 특별 보호 대상이 아닌 일반 탈북민과 같다’는 등 조롱을 당하면서도 홀로 꿋꿋이 신념을 붙들고 나아갔다. 쓰러지기 전까지 국내외 인사들과 수없이 접촉하며 자문·기고 등 활동을 이어갔다. 

2000년 9월11일 함께 사진을 찍은 김덕홍 전 부실장, 황장엽 전 비서, 김길선씨ⓒ김길선씨 제공
김덕홍 전 부실장이 망명 당일인 1997년 2월12일 새벽 다이어리에 적은 시ⓒ김길선씨 제공

김 전 부실장이 이처럼 왕성히 활동했는지 몰랐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움직였다. 이때 소중한 인연이 많이 생겼다. 특히 미국, 영국, 독일, 스웨덴, 캐나다, 스위스, 호주, 일본 등 해외에서 온 각계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김 전 부실장의 처지를 깊이 이해하고 서울 변두리의 7평 남짓한 사무실을 스스럼없이 찾아줬다. 그들에게 김 전 부실장은 북한 정권의 본질, 협상 전술, 핵 등 대북 문제에 관해 아낌없이 조언했다. 김 전 부실장이 북한 자유 해방의 여정에서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는 사실은 20년 넘게 지켜본 내가 증명할 수 있다. 김 전 부실장의 정보력과 식견에 매료돼 아예 ‘황 전 비서 말고 김 전 부실장에게만 관심 있다’고 밝혀온 해외 인사도 많았다. 황 전 비서는 구소련 해체, 동구권 몰락 과정에서 끝내 전향하지 않은 사회주의 사상가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고 그들은 지적했다. 다만 김 전 부실장은 황 전 비서를 설득해 함께 비전을 이루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어쩔 수 없이 결별했지만, 하늘에서는 절대로 형님(황 전 비서) 손을 놓지 않고 지켜드리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 때 김 전 부실장은 직책을 뺏기고 여권 발급도 거부당했다. 당시 주변에서 그를 도와주는 손길이 없었나. 

“김 전 부실장은 정부의 부당한 행위를 지적하고 미국 방문 여권을 받기 위해 국회와 법조계는 물론 청와대, 국정원, 경찰청, 외교통상부(현 외교부), 국가인권위원회 등에도 서신과 진정서 수백 통을 보냈다. 국민 개개인의 인권과 권익을 보장하기 위해 일한다는 그들 대다수는 답변조차 하지 않았다.” 

국회에서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니 의아하다.

“300여 명에 달하는 국회의원 모두에게 진정서를 전송했으나 허사였다. 김 전 부실장은 지금도 묻고 싶어 한다. 그가 황 전 비서를 설득하고 대동해 망명했을 때 한국 정부(김영삼 정부)는 분명히 ‘북한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민간 차원의 대북사업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김 전 부실장은 그 약속이 대통령 개인이 아닌, 통일된 자유민주주의 한반도에서 살기를 염원하는 이 나라 국민의 약속이자 의지라 믿고 있다. 북한 문제를 해결하고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기치로 한반도 통일을 이룩하려는 것이 대한민국 헌법 정신이고 이 나라 국민의 분명한 염원이지 않나. 왜 그것의 실현을 위해 망명한 사람의 절규가 그토록 무시당하고 외면됐는가.”  

진보정권 국정원과의 악연도 끝나지 않았다. 

“김 전 부실장은 일찍이 그런 부류와 거래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역사는 돌고 돈다. 만약 북한 자유화 후 재판이 열리면 누가 피고인석에 앉을까 상상해 본다.” 

김정은 정권에 대한 김 전 부실장의 생각은. 

“국제사회가 극구 반대하는 핵·미사일 보유 야망을 계속 추구하는 북한은 김정은 시대에 붕괴의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고 김 전 실장은 예상한다. 김정은 정권은 ‘김일성 시대로의 회귀’로도 체제를 지켜낼 수 없게 되면 ‘핵무기를 보유한 농경사회’로 가서라도 체제 유지·영구화를 추구하려 들 게 분명하다. 그러나 역사란 수레바퀴는 한순간도 시간을 역행해 거꾸로 간 적이 없다.” 

그에게 남은 소망이 있다면. 

“김 전 부실장은 소송 과정에서 정신적·육체적 힘을 모두 소진했다. 요즘은 말도 거의 하지 않고 그저 엷게 웃을 때가 많다. 답답함과 울분 대신 ‘주어진 능력 범위에서 할 일을 다 했다’는 안도감을 품고 살아가려 한다. 자신이 대한민국에서 행한 자랑스러운 일들이 북녘의 지기들과 주민들에게 전해지길 바라면서 말이다.” 

김길선씨는 김 전 부실장이 “밤마다 꿈길을 더듬어 북한에 간다”고 말하곤 한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김 전 부실장이 24년여 전 망명 당일 다이어리에 적은 시를 보여줬다. ‘백화만발한 화창한 봄날을 앞당기려는 이 나그네의 마음 알아준다면 먼 길 떠나는 이 나그네, 발걸음 가볍게 끝내고 봄날의 나비와 같이 기어이 돌아올 것이니.’   

김일성대 재직 시절의 김덕홍 전 부실장ⓒ김길선씨 제공 

■ 김덕홍은 누구 

김덕홍 전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자료연구실 부실장은 1939년 1월22일 북한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출생했다. 고급중학교(우리의 고등학교에 해당) 졸업 당시 소시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김일성대 입학이 좌절돼 입대를 택한다. 1958년 9월부터 1961년 8월까지 조선인민경비대 제3191군부대에서 평양감옥과 보통강임시감옥 수감자들의 일상과 노역을 감시·관리했다.

김 전 부실장은 충실히 복무한 끝에 대입 재도전에 성공한다. 부대 정치부장의 도움을 받아 1961년 9월 김일성대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한 것이다. 그는 입학 1년 만에 마르크스주의와 김일성식(式) 계급정책에 대해 환멸을 느껴 ‘정치일꾼이 되어 나라와 인민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목표를 접는다.

1965년 8월 김일성대를 졸업한 김 전 부실장은 동 대학 직원으로 진로를 정하고 지도원과 책임지도교원, 부부장 직책을 거치며 16년간 재직했다. 그 중 14년은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김일성대 총장으로 있던 기간이다. 김 전 부실장은 사업 추진과 일처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교무행정 일꾼으로 인정받았다. 한편으론 입신출세의 관문인 김일성대에서 북한 엘리트 사회를 면밀히 관찰했다. 김일성 주석의 일가친척 다수를 직접 만나기도 했다.

1974년 2월 후계자로 지목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5년여 뒤 노동당 중앙위원회 내에 주체사상연구소를 신설하면서 “출신 성분에 좀 문제가 있더라도 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심이 투철하고 이론 수준이 높은 인텔리들로 연구소를 꾸려라”고 지시했다. 소장으로는 황 전 비서를 임명했다. 황 전 비서는 김일성대에서 눈여겨본 김 전 부실장을 즉각 호출했다. 김 전 부실장은 1981년 10월 주체사상연구소 소장 서기(부과장급)로 발탁된다. 1994년 4월부터 정치 망명 직전까지 3년여 동안은 당 중앙위 자료연구실 부실장으로 일했다. 이렇게 그는 북한 최고 권력 기구인 당 중앙위에서도 16년 가까이 머물며 체제를 속속들이 들여다봤다.

김 전 부실장이 당 중앙위 자료연구실 부실장으로 있을 때는 북한의 경제난이 극심했다. 이 시기 그는 외화 조달 업무도 담당하며 19차례에 걸쳐 북한과 중국을 오갔다. 자연스레 북한 경제의 한계와 개혁개방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뜻을 공유하는 당내 동지들과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망명을 결행하는 데 있어선 1996년 2월 황 전 비서의 러시아 모스크바 강연이 기폭제가 됐다. 황 전 비서가 “주체사상은 김일성과 김정일이 아닌 내가 만들었다”고 발언한 게 북한 요원들을 거쳐 김정일 위원장에게 보고됐다. 순식간에 김 위원장의 태도가 냉랭해지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황 전 비서는 최측근인 김 전 부실장에게 속내를 털어놨다.

김 전 부실장은 노동당 내부는 물론 한국 쪽 인맥까지 총동원해 황 전 비서 망명 공작을 실행했다. 막판에 “네가 동행하지 않으면 남한으로 가지 않겠다”는 황 전 비서의 단호한 요구를 수용해 북한 체제와 가족을 등지고 1997년 2월12일 한국 망명길에 오른다. 이때 황 전 비서는 75세, 김 전 부실장은 59세였다. 김 전 부실장은 “당내 지기들도 ‘조선(造船·북한 세습독재 체제의 근간을 구상)한 자가 폐선(廢船)해야 한다’는 대의명분을 앞세워 내게 황 전 비서를 데리고 남한으로 갈 것을 간곡히 권고했다”며 “황 전 비서의 망명을 직접 계획하고 준비할 때, 동행을 결심할 때 이미 개인이기를 포기했다. 북한 동지들이 북한 자유화의 희망을 가지고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왔다”고 강조했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7년 4월20일 황 전 비서와 함께 한국에 도착한 김 전 부실장은 국정원 산하 통일정책연구소(현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의 상임고문을 맡았다. 통일정책연구소 이사장은 황 전 비서였다. 두 사람의 직책은 노무현 정부 때 박탈됐다. 김 전 부실장은 2004년 6월 여권 발급도 거부당한다. 그는 “미국 허드슨연구소 초청을 받고 여권을 신청했는데, 정부는 ‘황장엽은 미국에 보내도, 김덕홍은 절대 안 된다’고 했다”고 전했다. 그는 3년 6개월간 국가와 소송전을 벌이고서야 겨우 여권을 받았다.  

정부는 2014년 9월 김 전 부실장에게 명예 회복 인증서를 건네며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비상근 고문직을 부여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문재인 정부 들어 해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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