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연대’ 뮤지컬 시대가 온다
  • 조용신 뮤지컬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1.26 12:00
  • 호수 1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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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에도 국내 개봉 《위키드》 《시카고》가 사상 최대 흥행 이어가는 이유

브로드웨이 공연제작자협회(Broadway League)는 매년 브로드웨이를 찾는 연극·뮤지컬 관객 리서치 보고서를 발간한다. 코로나19 팬데믹 탓에 가장 최근에 나온 보고서는 2020년 1월 발간된 2018~19 시즌 자료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1년 동안 1480만 명이 브로드웨이 극장가를 찾았다. 이 중 65%가 여성이었다. 브로드웨이는 동성애자 남성 관객이 10% 남짓 차지한다는 게 불문율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남성 관객은 5명 중 1명인 셈이다. 우리나라 역시 공연장의 여성 관객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걸 보면 전 세계 공통으로 공연 문화를 즐기는 주체가 남성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뮤지컬 《위키드》ⓒ에스앤코(S&CO) 제공

브로드웨이 극장가 관객의 65%가 여성

그런데 정작 여성들이 주로 즐기는 이 콘텐츠 안에서 여성 캐릭터 비중은 높지 않았다. 많은 뮤지컬 제작자가 객석의 대다수인 여성 관객들이 보고 싶어 할 것이라고 믿는 ‘매력적인 남자’ 캐릭터를 배치해 놓지만, 여성 캐릭터는 남자들이 쟁취해야 할 사랑의 대상이거나 그들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하면서 가끔 관용을 베풀며 구원해야 할 대상으로 남겨둔다. 이런 남성 중심적 배역에 대한 문제 제기가 그동안 꾸준히 이뤄지면서 최근에는 자주적이면서도 진취적인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인 작품들이 점점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도 인기 있는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위키드》가 있다. 이 작품은 주디 갈란드가 도로시로 등장하는 뮤지컬 《오즈의 마법사》에서 악역으로 나오는 녹색 피부의 ‘사악한 서쪽 마녀(Wicked Witch of the West)’ 엘파바의 숨겨진 과거를 다룬 동명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서쪽 마녀와 함께 라이벌 관계인 착한 동쪽 마녀 글린다 역시 투톱의 공동 주인공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두 여자는 마법학교 동기로 만나 티격태격하면서 친구가 됐다가 때로는 연적이 되기도 하지만, 인종·계급·성차별·모함·편견·낙인찍기 등 온갖 사회 부조리가 드러나는 상황에서는 어김없이 여성으로서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두 사람이 우정을 쌓고 성장을 경험한 후 기약 없는 이별을 앞두고 서로의 소중함을 보여주는 노래 ‘너로 인하여(For good)’ 장면은 백미다.

뮤지컬 《시카고》ⓒ신시컴퍼니 제공

또 다른 여성 주연 뮤지컬로는 《시카고》가 있다. 극 초반 록시는 자신을 괴롭히는 유부남을 죽이고 살인죄로 수감되고, 마찬가지로 남자를 죽인 후 교도소에 수감 중인 또 다른 주인공 벨마와 처음 조우한다. 그뿐만 아니라 ‘교도소 탱고(Cell Block Tango)’ 장면에서는 자신들에게 위해를 가하던 남편 혹은 남친을 죽이고 수감 중인 여죄수들의 이유 있는 항변이 관능적인 춤사위와 함께 펼쳐진다. 일상생활에서 여성을 가해하는 건 대부분 돈과 권력을 쥔 남성들인데 그들에 맞서기 위해 두 사람은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지만 그러한 남자들마저도 무릎 꿇게 하는 관능적인 매력도 준비돼 있었다.

결국 무죄를 선고받고 출소한 록시와 벨마는 원팀으로 연대해 멋진 쇼를 만들고 그들에게 매료된 남자 관객들에게 입장료를 받는 성공한 프로페셔널 스타가 되는 해피엔딩에 이른다. 사실 이 작품의 초연은 무려 1975년으로, 반세기 전에 진취적이면서도 유쾌한 코미디가 만들어졌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특히 고무적인 지점은 《시카고》의 한국 공연이 그동안 여러 번 있었지만 과거에 비해 여성 콘텐츠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면서 팬데믹 속에서도 지난 2021년 공연은 사상 최대 흥행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 무대에도 여배우 투톱의 활약이 돈이 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일까? 어찌 되었든 그동안 남자 배우들의 끝없는 흥행 목록에 비하면 아직은 멀었다.

현재 공연 중인 작품에서도 여성 캐릭터들의 연대를 특히 잘 보여주는 작품이 있다. 뮤지컬 《스핏파이어 그릴》은 앞선 두 작품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강한 울림과 진지한 주제가 잘 어우러진 수작이다. 1996년 선댄스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한 동명의 영화를 뮤지컬로 각색한 작품이다. 주인공은 어느 차가운 2월 어느 저녁, 의붓아버지를 살해한 죄로 5년간의 복역을 마치고 미국 위스콘신주의 작은 마을 길리앗에 도착한 이방인 ‘퍼시(Percy)’다.

연고가 없는 마을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퍼시에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은 마을의 유일한 식당 ‘스핏파이어 그릴’을 혼자 운영하는 중년 여인 ‘한나’다. 그는 오갈 데 없는 퍼시에게 식당 일자리와 숙식을 제공하는 등 무뚝뚝한 표정 속에서 점차 따뜻한 정을 발산한다. 그리고 한나의 조카로 부동산업자인 케일럽의 아내 ‘셸비’ 역시 식당에서 일을 시작한다. 이들은 가부장적인 남편의 그늘에 가린 가정주부의 역할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경제활동을 하며 새로운 자아실현을 해나간다.

여기 등장하는 남자 캐릭터 중 악인은 없지만 공동체 안의 여성들을 독립적으로 대하기보다는 보호할 대상이거나 자신이 이룰 꿈의 동행자 정도로 서툴게 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반면 여성들 사이의 우정은 오가는 대화 속에 점차 포괄적이며 입체적인 형태로 단단해진다. 퍼시가 오기 전에는 춥고 어둡기만 했던 마을이 세 여성의 연대로 인해 활력을 찾고 그 선한 영향력이 점차 전체로 확산되는 작은 기적을 보게 된다.

뮤지컬 《스핏파이어 그릴》의 무대ⓒ(주)엠피앤컴퍼니 제공
뮤지컬 《스핏파이어 그릴》의 무대ⓒ(주)엠피앤컴퍼니 제공

아직 수적으로 적지만 커다린 울림

한국 대표 창작뮤지컬 《빨래》에서도 연대를 느낄 수 있다. 이름 대신 주인할머니, 희정엄마로만 불리던 두 여성이 옆방의 가장 어리고 일터에서 모진 일을 당한 나영에게 도움을 자청하고 위로를 건네는 모습이 뭉클하다. 달동네 저소득층 주민들이 이렇게 서로 돕고 살아간다는 것이 현실 속에서는 일종의 판타지로 치부될 수도 있지만, 이 세상에 아직 인류애가 살아있다면 아마 그중 하나가 이런 모습이 아닐까. 나영은 이들의 도움으로 자신만의 목표와 신념을 가지고 원칙을 잃지 않으며 잘 살아갈 그런 멋진 인물이 되어줄 것이라는 기대를 준다. 이들이 함께 옥상에서 바람에 날리는 빨래를 따라 우리의 시선은 칙칙한 현실이 아닌 파란 하늘을 향한다.

뮤지컬은 현실을 살면서 가끔 꾸는 환상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최대한 현실에서 멀리 떨어진 솜사탕 같은 달콤함과 화려함으로 무장한 콘텐츠 상품을 구매해 잠시나마 그 환상에 푹 젖어있을 수 있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좋은 콘텐츠는 소비자도 현실 속에서 함께 발전하게 만드는 것이다. 소비자의 대다수가 여성이지만 정작 여성의 연대를 작품 속에서 보여주는 작품들은 수적으로 여전히 적고 귀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귀한 소비가 인간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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