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한 주술의 시대에 ‘발굴’된 극약 처방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2.01.25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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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철 작가 장편소설 《파피루스의 비밀》 출간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 문서 ⓒ pixabay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 문서 ⓒ pixabay

“1822년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 해독, 1922년 투탕카멘 왕묘 발견, 2022년… 다시 100년 만에 큰 사건이 일어날 것이다.” 

호사가들을 잔뜩 들뜨게 하는 해가 밝았다. 유성환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강의교수(이집트학 박사)는 한 언론 기고를 통해 “(100년 주기설이) 근거가 희박한 예언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2022년에 수천 년간 무덤 속에서 잠자고 있던 귀중한 파피루스(고대 이집트에서 종이를 만드는 데 쓰인 식물) 문서가 뭉텅이째 발견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고 말했다. 소설 《파피루스의 비밀》은 이 파피루스 문서들이 수면 위로 떠 오른 상황을 그린다. 

주인공인 건축가 임호택은 어느 날 튀니지령 제르바섬의 복합 리조트 타운 설계를 의뢰받는다. 국제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천재 건축가가 북아프리카를 찾는다는 소식에 제르바섬 인근 리비아에서도 호택에게 리조트 타운 건립 계획을 잠깐이나마 살펴 달라고 요청한다. 제르바섬에 도착한 호택은 요트를 타고 지중해를 누비겠다는 오랜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제르바섬에서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까지 가는 요트를 예약한다. 

한국인 건축가 앞에 펼쳐진 파피루스 문서 

요트에서 강도를 당한 호택은 바다에 뛰어들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다. 리비아 한 귀퉁이의 혈거인(穴居人) 가족에게 구제됐다가 다시 길을 떠난 그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배를 탄다. 하필 마약 밀수선이었다. 이집트 해양경찰에 붙잡힌 호택은 여권에 끼워둔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 해독표 때문에 고초 아닌 고초를 치른다. 수상쩍은 밀입국자로 의심받아 이집트 보안기관의 조사까지 받게 된 것이다. 호택은 보안기관에 자신이 살아온 과정 전반에 대한 자술서를 써낸다. 어릴 적 피라미드에 심취했고, 어머니가 장-프랑수아 샹폴리옹(고대 이집트 상형문자 해독에 처음 성공한 연구가) 전기를 한국어로 번역했고, 상형문자를 그리고 읽는 게 취미라는 내용이 담겼다. 

오해는 풀렸으나, 보안기관 간부는 돌연 ‘상형문자 해독 능력을 바탕으로 협조해 줄 일이 있다’며 호택을 이집트 파라오 아멘호텝 3세를 자칭하는 노인에게 넘긴다. 노인의 딸 이름은 네페르티티(파라오 아크나톤의 왕비이자 투탕카멘의 이모)란다. 더 나아가 노인은 고대 이집트의 총리를 지냈고 건축가·천문학자이자 의술의 신으로도 추앙받는 임호텝이 눈앞의 한국인 임호택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여겼다. 그러면서 호택에게 “같이 이집트의 영광을 재현하자”고 제안한다. 

노인이 우선 호택에게 주문한 작업은 자료 번역이다. 건넨 자료는 검붉은 목제 상자 안에 든 낡은 종이들, 바로 파피루스 문서다. 아툼이란 저자가 5500여 년 전 기록한 희귀 문서 내용이 호택과 네페르티티에 의해 하나하나 드러난다. 노인 일가를 과대망상증 환자 집단쯤으로 깎아내리던 호택은 문서를 해독하며 표정이 바뀐다. 

‘나, 아툼, 위대한 군주는 진실을 밝히는도다’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고대 문서엔 지구 구체설부터 지동설, 빅뱅 이론, 세균으로 인한 전염병 발병, 기상학에 이르는 현대 자연과학의 주요 원리들이 조목조목 기술돼 있었다. 인류 문명사를 거스르는 충격적인 내용이다. 

“신화의 필요성은 이 정도에서 그쳐야” 

‘어떻게 반만년 전에 이런 발상을 할 수 있었을까’라며 경악하던 호택은 문서의 참뜻에 점점 다가서게 된다. 다 알면서도 모른 체한 데 대해 아툼은 “진실은 무서운 것”이라며 “함부로 말해서는 죽임을 당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현명한 우리 조상들은 자연 이치의 진실을 탐구하는 한편 세인을 지배하기 위해 신화를 창작했다”고 밝혔다. 신전에서 신상에 절을 한 행위도 ‘시늉’에 불과했다고 아툼은 고백했다. 

아툼을 비롯한 고대 이집트 지배층의 궁극적인 목표는 백성이 일정한 범위 안에서 위안을 받도록 하는 것, 특히 힘없고 가난한 이들이 신에게 기도하면서라도 마음의 평화를 얻게 하는 것이었다. 다만 아툼은 진실을 희생한 대가로 생겨난 신화와 신전의 필요성이 딱 이 정도에서 그쳐야 한다고 제한했다. 호택이 당혹감과 의구심을 내려놓으며 “아툼은 냉혹하리만큼 실용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인물이었다”고 결론짓게 된 대목이다. 

이 같은 고대 세계를 상상한 소설가의 작의(作意)도 결국 현시대에 머무는 장삼이사로 향한다. 고승철 작가는 “집필 기간 내내 ‘인터넷을 쓰고 우주여행을 하는 현대인도 감성 기제에서는 동굴 벽에 소 떼 그림을 그리고 주술에 의존한 크로마뇽인과 별 차이가 없다’는 명제가 맴돌았다”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올해 국내에서 가장 큰 이벤트인 대선을 앞두고 주술, 무속 따위의 키워드가 급부상하고 있다. 각 선거 캠프에 ‘도사’들이 포진해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소문부터 어떤 후보 부인의 무속 의존증이 심각하다는 주장까지 속속 터져 나온다. 21세기 대선 이슈라곤 믿기 힘들다. 사실이라면 지배층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진실을 희생시키는 동시에 신화에도 종속된 망국적인 상황이다. 

‘참 나’를 찾아 떠나는 求道 여행 

다시 소설로 돌아가 보자. 상형문자의 의미에 더해 고대 문서의 주인을 둘러싼 비밀까지 알게 된 호택은 목숨을 몇 번 더 잃을 뻔한 끝에 간신히 한국으로 돌아온다. 호택이 귀국하자마자 결정한 일은 아프가니스탄으로의 출국이다. 탈레반으로부터 유적을 지켜내는 작업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어쩌면 이집트에서보다 훨씬 더 위험할 수 있다. 예전처럼 일하고 돈 벌고 밥 먹는 데 천착하는 그가 아니기에 내릴 수 있는 결정이다. 호택은 아프가니스탄 카불로 떠나기 직전 “이집트에 다녀온 후 맥락이 있는 삶을 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면서 “내 의식, 무의식 속에 깊숙이 침윤해 있다가 때때로 불쑥 부유하는 이집트 기행의 망상을 떨쳐내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극약 처방을 내려야 한다”고 되뇐다. 

무맥락과 무논리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코로나19로 맘껏 움직이지도 못해 더욱 답답한 이때 소설 한 권 읽으며 서울, 제르바섬, 트리폴리, 알렉산드리아, 카불을 아우르는 구도(求道)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작가가 언론인 출신이어서인지, 시절이 하 수상해서인지 《파피루스의 비밀》을 하나의 저널리즘으로 읽는 독자도 있을 것 같다. 부록에 실린 작가의 실제 이집트 여행기를 읽는 재미는 덤이다. 

《파피루스의 비밀》 | 고승철 | 나남출판 | 334쪽 | 1만4800원

《파피루스의 비밀》 표지 ⓒ 나남출판 제공
장편소설 《파피루스의 비밀》 표지 ⓒ 나남출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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