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의 변방에서 이젠 중심이 된 여성 표심 [남인숙의 귀여겨듣기]
  • 남인숙 작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3.07 12:00
  • 호수 1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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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대 여성들, 진영·지역주의 떠난 독립된 정치색을 가지다

20대 대통령선거는 개표 직전까지 그 어떤 섣부른 전망도 불허할 만큼 역대 그 어느 대선보다 심한 혼전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여론조사기관 대부분이 두 유력 후보 지지율의 오차범위 내 접전 양상을 알렸고, 그 속에서도 사소한 변수 하나로 우열이 뒤집히는 박빙의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이번 대선 결과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칠 핵심 변수 중 하나로 20·30대 여성 유권자들의 표심이 떠오르고 있다.

정치는 잘 모르겠다며 어른들이나 배우자의 의견에 표를 보태던 시대 이후에도 실상 선거에서 여성들의 표심이라는 게 따로 존재하지는 않았다. 진영과 지역정서로 애초 표를 얻을 정당을 정해둔 정치 관심층은 물론 부동층에서도 여성들의 표는 큰 흐름에 속해 있을 뿐 따로 물줄기를 만들지는 않았다. 페미니즘이라는 ‘여성 전용’ 구호는 소수정당의 목소리를 정치권 내에 잔류시키는 역할에 의미를 둘 뿐 결과론적 대세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그 크기가 미미했다. 특유의 소수성이 같은 여성들 사이에서도 보편적인 선택의 이유로 작용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는 20·30대 여성들이 표를 주는 양상이 이전과 다르다. 진영이나 여성관 등 기존 선거판에서 기본틀로 가져가던 요소들에서 벗어나 정치적 효능감에 따른 개별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은 일부 문재인 대통령 지지층의 선회다.

ⓒ윤석열 캠프 제공
2월22일 경기 안산시 안산문화광장에서 열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유세(왼쪽 사진)와 같은 날 충남 서 산시 몽두레 카페 앞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유세장에서 여성 시민들이 각 후보를 지지하고 있다.ⓒ시사저널 박은숙·윤석열 캠프 제공

젊은 여성들, ‘여성 입장’ 벗어나 정치적 선택

전통적으로 진보진영을 굳건하게 지지하던 몇몇 온라인 여성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문재인 대통령 강성 지지층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이번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과 후보 선정 결과에 불만이 있었다. 그러던 중 민주당 이재명 후보 측에서 민감한 이슈가 연달아 터지면서 후보뿐 아니라 민주당 자체를 보이콧하자는 움직임이 확산되었다. 이들은 단순히 투표로 역선택을 하는 것을 넘어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를 적극 지지하고 자발적으로 홍보활동을 하는 등 같은 민주당 지지층이나 부동층의 표를 끌어모으려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이들의 태세 전환 이후 한동안 열세였던 윤 후보의 지지율이 상승하면서 이 후보를 추월하는 등의 영향을 끼쳤던 게 사실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과정에서 젠더 이슈를 중심으로 대립각을 세우던 20·30대 각 성별 유권자들이 잠시 그 전쟁을 멈췄다는 것이다. 젠더 이슈를 내세워 당 대표에 오른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를 중심으로 일찌감치 결집한 이른바 ‘이대남’의 표심은, 이제 ‘전략적 지지’를 앞세운 ‘이대녀’의 그것과 대척점에 있지 않다. 다만 이런 움직임이 20·30대 여성 전반에 걸친 것은 아니라, 역대급 비호감 선거로 불리는 이번 대통령선거에서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그들이 어느 쪽을 차악(次惡)으로 선택할지가 변수로 떠오른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이 젊은 여성 유권자들이 ‘여성이라는 입장’을 벗어난 정치적 선택을 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가부장적인 가치관이 더 짙은 보수의 색깔, 여성주의가 태생적으로 지향할 수밖에 없는 진보적인 가치를 접어두고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현상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다. 남혐·여혐 논란 과정에서 이미 보수진영으로 대거 결집한 젊은 남성들과는 다른 양상이다. 이들은 정치적 효능감과 인물론 등을 기준으로 지지 후보를 선택하고 후보들의 입장 변화나 새로운 이슈에 따라 지지 후보를 갈아타는 성향도 보인다. 독립적인 지지와 선택을 기본값으로 둔 20·30대 여성 유권자들은 아직 후보들을 저울에 올려놓은 채 지켜보고 있다.

오랫동안 정치권을 외곽에서 지켜보던 여성들은 진보진영이 양성평등에 더 가깝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SNS의 발달과 미투운동 등의 여파로 그 믿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제 한국의 민주화는 정치 영역에서만 발달했을 뿐 사회와 개인에게는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그게 정치권 전반의 경향이라는 것을 점차 인정하는 단계에 다가섰다. 한마디로 젠더 문제로는 ‘이쪽이나 저쪽이나 마찬가지더라’는 경험이 축적돼 왔고, ‘그럴 바에야 개인사를 중심으로 평가하자’는 결론까지 가능해지기에 이른 것이다. 그게 ‘페미니즘’이라는 직접적인 가치에 이웃해 있는 진영을 맹목적으로 선택하는 것보다 합리적이라고 판단한다.

 

혼돈의 대선판 통해 엿보인 여성들의 변화

사실 한국에서의 페미니즘은 본래 가치와 다르게 프레이밍돼 왔다. 일례로 누군가가 ‘당신은 페미니스트입니까’라고 물어온다면 여러 의미에서 그 의도를 불순하게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 ‘그렇다’는 대답을 했다가는 자칫 직업을 잃을 수도 있다. 양성평등을 의미하는 페미니즘이 기본 지향점이 아닌 사회를 살고 있다는 실망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반대로 적극적인 활동가나 래디컬 페미니스트가 아니면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하면 안 되는 것인가 하는 자기모순도 느껴진다.

비단 남혐과 동의어로 취급되는 적극적인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해도, 이 사회에서 새로 어른이 돼가는 모든 여성은 점차 넓은 의미의 페미니스트가 돼가고 있다. 이미 사회화를 끝내고 기존 사회구조에 순응해 살아가고 있던 계층들의 가치관도 상당 부분 바뀌었다. 페미니즘은 어디에나 스며들어 세를 넓히고 있으며, 이 필연적인 문명화의 과정이 최근 연결 수단의 발달로 더 가속화된 것일 뿐이다.

지금 혼돈의 연속인 대통령선거판에서는 여성들의 변화가 엿보인다. 페미니즘이라는 가치를 소수화해 특정 층을 끌어모으는 정치가 아니라 좀 더 내재화되고 확장된 형태로 성숙돼 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주류는 늘 특정 성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 존재를 드러내왔다. 왜냐하면 그들이 곧 표준이고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에서 ‘민(民)’이 실은 시민권을 가진 남자를 가리키는 것이고, ‘인체의 70%는 물로 구성되어 있다’는 어린 시절 과학 교과서 속 문장에서의 ‘인(人)’이 남자만을 의미하는 것처럼 말이다(여성의 몸에서 물의 비중은 50% 정도다).

굳이 성별로서의 특정 성으로 구분되지 않고도 경향성을 띠고 민의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이 혼돈의 시기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이 뒤섞이고 시야가 흐려졌더라도 흙탕물이 가라앉은 다음 명징하게 드러나는 새로운 가치들일 것이다.

남인숙 작가
남인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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