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속 정치인들의 추문(醜聞) 쇼
  • 조용신 뮤지컬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3.09 10:00
  • 호수 1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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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타》 《해밀턴》 《나 그대를 찬양하오》,
정치인 일대기 반영한 작품들 브로드웨이에서 인기 여전

앞으로 5년간 우리나라의 운명과 국격을 결정할 대통령선거가 목전에 다가왔다. 이번 대선 레이스는 유난히 후보들의 추문이 매스컴에 대거 등장했다. 후보 자신의 문제도 있지만 가족, 특히 배우자들의 문제가 부각된 적은 처음이 아닌가 싶다. 정치 쪽으로 나서려면 아예 유년 시절부터 행동을 바르게 하고 혹시라도 훗날 책잡힐 일은 아예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정치인들은 평소 주변 리스크 관리에 나서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하지만 이러한 과거 들추기와 추문 경쟁이 매스컴에서 경쟁적으로 소비되면서 긍정적인 면도 있다. 정치인들에게 기대하는 도덕성과 리더십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어느 때보다 커졌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승자가 되어 권력을 가져간다 해도 자신에게 투표하지 않은 나머지 국민을 위해 주어진 임기 동안 최선을 다해 국정을 운영해야 할 의무가 더 부각될 것이다.

뮤지컬 《에비타》의 한 장면
뮤지컬 《에비타》의 한 장면ⓒ연합뉴스

현실의 추문이 뮤지컬에선 커다란 재미로

정치인들은 개인의 삶을 살기보다는 오롯이 공공의 선과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가야 할 운명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정치인을 주인공으로 다룬 각종 콘텐츠는 운명 앞에서 인간적인 고뇌를 갖는 캐릭터에 중점을 두는 경우가 많다. 정치인도 인간이기에 많은 실수와 시행착오를 거치며 인생을 경험해온 인간적인 매력에 더 집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생 속에서 나타난 각종 추문은 스토리의 커다란 재미를 북돋워준다.

뮤지컬 《에비타》의 주인공 에바 페론(1919~1952)은 아르헨티나 대통령의 영부인이다. 쿠데타를 통해 정계에 진출했고, 1946년 대통령에 오른 후안 페론의 아내로, 에비타는 ‘꼬마 에바’라는 뜻의 애칭이다. 에바는 팜파스의 시골 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16세 무렵에 배우로 이름을 알리더니 26세에 퍼스트레이디에 32세에는 스스로가 부통령 후보에 오를 정도로 파격적인 삶을 살았다.

에바는 33세에 척수 백혈병과 자궁암으로 요절하기까지 짧은 생애 동안 많은 추문에 시달렸다. 뛰어난 미모를 가졌던 에바는 페론 대령을 먼저 유혹했다고 손가락질을 받았고, 재래시장을 방문해 가난한 사람들의 거친 손을 붙들고 대화하는 모습은 ‘쇼’이며, 여성이나 아동, 노인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정책은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유럽 순방 때 입었던 옷들이 화제가 되자 서민들의 고혈(膏血)로 만든 사치품을 입었다는 정적들의 공격도 많았다. 하지만 국민은 페론 대통령 퇴임 후 재집권을 허락했고 이들 부부가 대통령궁으로 복귀했을 정도로 그들의 인기를 단지 독재자의 포퓰리즘으로 폄하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 있었다.

뮤지컬은 이러한 페론과 에바 부부의 솔직한 목소리를 노랫말로 드러내준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정치는 쇼가 맞다. 하지만 정치인은 자신을 좋아하는 대중을 위해 그들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그들에게 행복을 주는 길이고, 그것은 정치인의 의무이기도 하다. 인간이 원하는 정치, 그것은 바로 환상이며, 치명적 환각이자, 영원한 쇼다.’

ⓒ연합뉴스
뮤지컬 《해밀턴》의 한 장면ⓒ연합뉴스

또 다른 실존 정치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뮤지컬은 《해밀턴》이다. 주인공 알렉산더 해밀턴은 미국 건국 공신 중 한 명이다. 그는 군인, 법률가, 정치가, 사상가, 평론가이며 조지 워싱턴의 오른팔로서 미국 초대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학식과 토론 능력을 모두 갖춰 미국 독립 당시 13개 주의 느슨한 연방 자치제를 좀 더 강력한 중앙정부로 개편하기 위해 평생 노력한 인물이다. 오늘날 월가로 대표되는 미국의 강력한 금융·경제체계를 확립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덕분에 현재 미국 10달러 지폐의 모델이기도 하다.

뮤지컬에서 그의 모습은 달변가에 유쾌하고 인기 많은 캐릭터로 등장하지만 어두운 개인사도 빠짐없이 드러난다. 대표적인 것이 그의 평생 정적이자 3대 부통령이었던 애런 버와의 결투에서 권총에 맞아 사망한 것이다. 자신들이 세운 나라의 법을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집행해야 하는 정치인들이었지만 이들은 당시 결투가 법으로 금지돼 있던 뉴욕주를 피해 허드슨 강변 뉴저지에서 결투를 벌일 정도로 사사로운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국가를 위해 더 큰일을 할 수도 있었던 능력 많은 정치인들이 만인 앞에서 공개 결투를 벌여 알렉산더 해밀턴은 사망하고 애런 버는 정치 생명이 끝난 사건이었다.

뮤지컬에서는 두 사람이 공동 주인공으로 나선다. 특히 애런 버는 자신이 벌인 이 일생일대의 실수에 대해 회한의 감정을 갖는다. 알렉산더 해밀턴의 가장 큰 오점으로 출타 중 외도에 빠진 상황도 그대로 묘사된다. 보통 역사적 위인들을 콘텐츠로 재현할 때 이러한 허물은 삭제하는 경우가 많은데 뮤지컬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특유의 엘리트주의적 성향으로 반대파들과 쉽게 타협하지 않고 협치와는 거리가 먼 그의 고집불통 모습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는 작품의 형식인 랩 배틀로 표현돼 관객들에게 큰 재미를 선사한다. 그의 허물들마저 작품 속에서는 모두 매력적인 ‘쇼’의 일부가 돼주고 있다. 이 때문에 뮤지컬 《해밀턴》은 2015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자마자 매진 사례를 기록했고, 오바마 대통령까지 직접 관람할 정도의 큰 인기를 끌었다.

뮤지컬 《나 그대를 찬양하오》 포스터
뮤지컬 《나 그대를 찬양하오》 포스터

고전 뮤지컬임에도 현재의 대선 레이스와 오버랩

정치인들의 각종 추문을 픽션으로 코믹하게 풍자한 뮤지컬도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 기자인 조지 S 카우프만과 모리 라이스킨드가 대본을 쓰고 오페라 《포기와 베스》로 유명한 작곡가 조지 거슈윈이 합작한 《나 그대를 찬양하오(Of Thee I Sing, 1932)》다. 이 작품은 1929년 미국 경제대공황 직후 실업자가 범람하던 정치·경제적 혼란기를 배경으로 백악관의 대통령과 부통령 주변의 미국 정치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대통령선거 불과 일주일 전에 독신인 존 P 윈터그린 후보는 인지도를 높이고자 ‘사랑’ 캠페인이라는 것을 벌이는데, 미인대회를 열어 1등으로 뽑힌 여성에게 자신이 청혼해 퍼스트레이디로 백안관에 함께 입성한다는 엉뚱한 계획이다. 수많은 지원자가 몰렸는데 정작 윈터그린은 비서 메리가 만든 옥수수 머핀을 먹고 그 맛에 반해 덜컥 메리에게 청혼한다. 선거에서도 승리하지만 정작 미인대회 우승자가 메리의 존재를 알면서 분란이 시작된다.

무려 90년 전에 초연한 고전 뮤지컬이지만 놀랍게도 어떤 부분은 오늘날 혼란스러운 대선 레이스를 지켜보는 우리의 상황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역시 예술은 현실의 반영이고 미래를 예견하는 힘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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