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운 섬, 가파도 [김지나의 문화로 도시읽기]
  • 김지나 도시문화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3.07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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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보리축제’로 한때 유명세
현대카드 ‘가파도 프로젝트’ 연착륙 실패 후 과제 떠안아
아름다운 가파도의 풍경. 관광객들을 의식한듯한 '농부 외 출입 금지'란 푯말이 곳곳에 있다. ⓒ김지나
아름다운 가파도의 풍경. 관광객들을 의식한듯한 '농부 외 출입 금지'란 푯말이 곳곳에 있다. ⓒ김지나

봄이 성큼 다가왔다. 봄에 제주여행을 계획한다면 반드시 가야한다고들 이야기하는 곳이 있다. 평소에도 아름답지만 청보리가 초록빛으로 피어나는 계절이면 특별히 더 아름다워지는 섬, 가파도다. 겨울잠에서 덜 깬 듯한 하늘과 청록빛 바다를 배경으로 청보리밭이 싱그럽게 펼쳐지는 봄의 가파도는 세상이 온통 푸르게 빛난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제주도 남단의 서귀포 운진항까지 가 다시 한 번 더 배를 타고 내려가는 수고를 마다 않는 것일 테다.

비슷한 위치에 있지만 우리나라 최남단이란 타이틀을 가진 덕분에 유명한 마라도에 비해, 가파도는 아는 사람만 찾는 섬이었다. 그랬던 가파도가 점차 알려지게 된 것은 주민들이 섬을 홍보하기 위해 고안해 낸 ‘청보리축제’가 계기였다. 섬 특유의 강한 햇살과 해풍을 맞고 자라 유독 더 고소한 맛을 내는 가파도 보리는 섬사람들의 자부심이다. 때문에 ‘청보리’란 축제 아이템은 가파도 사람들이 가장 쉽게 떠올렸을 선택지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축제 프로그램은 특별히 세련될 필요도 없었다. 보리밭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열광하며 섬을 찾았다. 2009년 처음 청보리축제가 열리고 다음해에는 가파도 올레길 코스도 개장하면서 가파도는 더 이상 외롭지 않은 섬이 되는 듯했다.

문제는 청보리축제 기간에만 지나치게 사람이 몰린다는 것이었다. 축제만큼 관광객을 불러 모으기 쉬운 방법도 없겠지만, 또 관광객만큼 변덕이 심한 집단도 없다. 한철 신나게 인생샷을 건진 후 또 다른 인생샷 명소를 찾아 떠날 뿐이다. 좁은 섬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왔다간 탓에 섬 곳곳에는 메뚜기 떼가 지나간 자리 마냥 생체기가 남았다. 그 와중에 더 많은 기회를 찾아 도시로 떠나는 젊은이들을 붙잡을 유인은 없었고, 청보리축제는 점차 늙어가는 가파도의 시간을 되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가파도 선착장에 위치한 터미널 건물. 현대카드의 '가파도 프로젝트'로 조성됐다. ⓒ김지나
가파도 선착장에 위치한 터미널 건물. 현대카드의 '가파도 프로젝트'로 조성됐다. ⓒ김지나

현대카드, 가파도 ‘업그레이드’에 뛰어들었지만

그랬던 차에 또 한 번 가파도를 변화시킬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현대카드의 ‘가파도 프로젝트’다. 2013년 시작돼 6년 만에 완성된 이 프로젝트는 현대카드가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고 한다. 현대카드는 대기업만의 노하우와 센스를 발휘해 가파도의 하드웨어, 소프트웨어를 모두 업그레이드 시킬 판을 짰다. 그리고 제주특별자치도청은 현대카드가 그린 원대한 그림을 실현시키기 위해 148억 원을 쏟아 부었다.

현대카드의 기획으로 완성된 시설 중 하나가 예술가들이 거주하며 작업을 하고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다. 이곳에 투입된 예산이 전체 사업비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들인 공만큼이나 섬에서 가장 독보적인 건물이자 비밀스런 공간이기도 하다. 대부분이 작가들의 생활공간으로 이 구역은 일반 방문객 출입금지이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이런 예술가 작업실이 쇠퇴한 지역을 재생하는 ‘치트키’처럼 활용되고 있는데, 섬을 떠난 청년들 대신 ‘젊은’ 기운을 불어넣어주길 아티스트들에게 기대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러기에 작가들이 머무는 시간은 너무 짧고 그 영향력은 미미한 것이 지금까지 관찰되는 아티스트 레지던스의 현실이었다.

예술가들이 섬에 머물며 작업할 수 있는 '가파도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 일반 방문객들은 일부 전시 공간에만 출입 가능하다. ⓒ김지나
예술가들이 섬에 머물며 작업할 수 있는 '가파도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 일반 방문객들은 일부 전시 공간에만 출입 가능하다. ⓒ김지나

더 이상 관광객이 지나가는 섬이 아니길

현대카드는 모든 운영권을 제주도에 넘기고 이곳을 떠났다. 제주도는 다시 마을협동조합과 제주문화예술재단에 시설 운영을 위탁한 상태다. 그러나 현대카드가 떠나자 가파도에 대한 관심은 다시 줄어들었고 현지에선 온갖 잡음이 들려오고 있다. 대기업이 디자인한 화려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소화하기엔 섬의 CPU 성능이 따라주지 않았다. 언론에서는 마치 현대카드는 잘해놓고 나갔는데 주민들이 엉망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식으로 보도되고 있다. 멋지게 만들어놓고 지역에 공을 넘겨주기만 하면 저절로 알아서 잘 굴러갈 것이란 안일한 생각이 더 큰 패착이었단 사실은 교묘하게 가려졌다. 가파도 프로젝트는 그렇게 연착륙에 실패한 채, 지난 가을 현대카드가 자랑스레 내놓은 홍보 책자 속 훈장처럼 전시되어 있을 뿐이었다.

물론 취지는 좋았다. 하지만 ‘문화예술 활동과 지역 문화를 연계해서 마을의 균형 있는 발전과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들겠다’는 목표는 추상적이었다. 이런 방식의 ‘세련된 브랜딩’은 지역 재생의 몸통이 되기엔 너무 지엽적인 처방이다. 청보리를 볼 수 있는 계절이 아님에도, 군데군데 방치되어 있는 현대카드의 잔해가 눈살을 찌푸리게 해도, 충분히 아름다운 가파도를 보며 자문해봤다. 이 섬에 필요한 것이 관광객일까. 이곳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보다 가파도의 자원을 도시에서, 육지에서 판촉할 수 있는 길을 내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그게 가능하다면 가파도는 관광객 없이도 외롭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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