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과 미술이 만나 파격을 선사하다
  • 반이정 미술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03.13 12:00
  • 호수 1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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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적인 기획과 작품 통해 미술판의 오랜 관행 풍자

개막 첫날 전시장을 방문했다. 출품된 작품보다 전시를 구성한 기획 아이디어와 전시실을 채운 관람 인파에 먼저 놀랐다. 오밀조밀한 파격이 곳곳에 숨은 전시였다. 전시의 주인공 귀귀는 미술가가 아니다. 웹툰 바닥에서 병맛 만화의 계보를 따르는 이로, 만화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1980년생 김성환이라는 정도만 알려졌을 뿐, 외모나 정체가 노출된 바 없다. 귀귀의 정체불명성은 신비감과 함께 여느 병맛 만화가와는 비교할 수 없이 논쟁적인 표현물을 쏟아내는 안전망이 돼준다.

성인의 얼굴을 한 초등학생들의 폭력 문화를 블랙코미디풍으로 가공한 그의 웹툰을 원색적으로 공격한 2012년 1월7일자 조선일보 1면 기사(열혈 초등학교 이 폭력 웹툰을 아십니까) 캡처 사진은 귀귀를 둘러싼 여러 전설 중 하나로 인용되고 있다. 이 웹툰 작가의 첫 개인전으로 소개된 《귀귀 개인전》(2022년 3월1~31일)은 일제 때 병원으로 세워진 건물을 1979년 전시장으로 고쳐 문을 연 인사동의 관훈갤러리와 길음역 인근의 또 다른 전시장 사가에서 동시에 열렸다.

3월8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11길 11 관훈갤러리에서 열린 병맛 만화가 《귀귀 개인전》ⓒ시사저널 최준필
3월8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11길 11 관훈갤러리에서 열린 병맛 만화가 《귀귀 개인전》ⓒ시사저널 최준필
3월8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11길 11 관훈갤러리에서 열린 병맛 만화가 《귀귀 개인전》ⓒ시사저널 최준필
3월8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11길 11 관훈갤러리에서 열린 병맛 만화가 《귀귀 개인전》ⓒ시사저널 최준필

병맛 만화가 귀귀의 첫 개인전

이번 전시에 배어있는 파격은 만화가가 전시회를 열었다는 데 있지 않다. 미술판의 오랜 인습을 반어적으로 뒤틀어 전시 기획에 반영한 오밀조밀한 파격들이 참신하기도 황당하기도 허망하기도 한 데 묘미가 있다. 그 점이 여느 미술전시가 보여주지 못하는 파격이라 하겠다. 전시장에 당도하자마자 마주친 예상 못 한 사실은 이 전시가 유료 전시였다는 점이다. 인터넷에 떠돌던 귀귀 개인전 광고 전단에는 유료 전시라는 안내를 찾기 어렵다. 관훈갤러리 후문에 마련된 티켓부스에 적힌 입장료는 1만원. 요컨대 국립현대미술 전관 입장료가 4000원이고, 예술의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처럼 블록버스터급 전시의 입장료가 2만원 내외로 책정되는 추세다. 귀귀처럼 갤러리에서 열리는 거의 대부분의 전시회가 무료 입장인 게 미술계 문화이다 보니, 입장료가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하고 방문했다.

이뿐만 아니라 블록버스터 전시처럼 전시장 한쪽 구석을 아트숍으로 꾸몄고 NFT작품 구매용 온라인 사이트까지 개설했으니, 귀귀 개인전의 구성은 여러모로 참신, 황당, 허망, 폭소가 뒤섞인 오밀조밀한 파격이었다. 전시된 그림과는 별개로 그림 하단에 붙여놓은 가격표도 큰 웃음을 자아냈다. 천만원대를 포함해 어떤 작품에는 1억원이 기재돼 있었는데, 작품 완성도와는 별개로 작가의 지명도에 따라 가격이 널뛰는 미술시장의 엄연한 가격 거품 문화를 풍자한 것 같기도 해서다.

이번 전시에서 파격의 정점은 개인전이 열린 두 곳 중 길음역에 위치한 사가의 전시장 문을 열 때 마주하게 된다. 텅 빈 전시장 한쪽 벽에 아주 작은 그림 한 점만 걸어놓았다. 전시를 같이 본 일행은 “뭐야? 이게 전부야?” 하면서 건물 2층에 별도 전시실이 있을 거라며 위층으로 올라가서 확인까지 했다. 있을 턱이 당연히 없다. 이런 전시 구성이야말로 귀귀가 웹툰의 결론부에서 보여주는 허망한 뒤통수 치기의 미술전시 버전이 아닐까 한다.

귀귀 개인전에 출품된 그림들을 보는 것만으로는 전시의 관전 포인트를 잡기 어려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온통 불투명한 단색조 색면으로 구성된 그림들은 자체의 완성도를 따지기 어렵다. 그림마다 연관된 귀귀의 웹툰이 존재하기 때문에 해당 만화를 이미 본 관객만이 전시된 그림들의 맥락을 짚을 수 있다. 전시장에 걸린 그림은 전시장에 없는 웹툰과 하나의 패키지로 묶일 때 미적 효과가 발생하는 전시라 하겠다. 가령 전시장에 걸린 그림 《심심한 위로》는 1만원 지폐를 손에 쥔 TV안테나 모양 머리카락의 사내와 교복 학생을 한 쌍으로 엮은 인물화인데, 이 그림은 물리적인 강압이나 협박을 쓰지 않고, 하급생에게 ‘삥을 뜯는’ 불량 초등학생 이야기를 담은 웹툰 《열혈초등학교 146화: 오해》편을 봐야만 그림의 맥락을 납득할 수 있는 식이다. 가시적인 외형이 아닌 문맥을 알아야만 파악되는 작품들인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마르셀 뒤샹의 전시가 2018년 열린 바 있다. 뒤샹의 대표작 《샘 Fountain》도 당시 출품됐다. 이 작품은 2004년 미술가와 큐레이터, 비평가, 아트 딜러 등 미술계 인사 500명을 대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미술 작품은 무엇인가?’라는 영국의 한 설문조사에서 압도적인 1위로 지목된 작품이다. 남자 소변기를 전시장에 갖다놓은 이 작품을 분기점으로, 미술가 개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홀로 담당하면서 미술 창작의 패러다임이 독창적인 발상만으로도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이 작업을 둘러싼 맥락이 이해되지 않으면 뒤샹의 문제작은 단지 바닥에 눕혀진 남자 소변기에 불과하다. 귀귀의 첫 개인전에 걸린 그림들도 동기가 돼준 웹툰을 본 관객만이 그림의 맥락을 고스란히 짚고 즐길 수 있다. 미술과 웹툰은 순수예술과 대중예술로 구분되는 형편이지만, 웹툰 작가 귀귀의 전시회는 그의 만화와 교류하고 지지를 보낸 마니아층에게 특별히 호환될 수 있는 비대중적인 전시회다.

3월8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11길 11 관훈갤러리에서 열린 병맛 만화가 《귀귀 개인전》ⓒ시사저널 최준필
3월8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11길 11 관훈갤러리에서 열린 병맛 만화가 《귀귀 개인전》ⓒ시사저널 최준필
3월8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11길 11 관훈갤러리에서 열린 병맛 만화가 《귀귀 개인전》ⓒ시사저널 최준필
3월8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11길 11 관훈갤러리에서 열린 병맛 만화가 《귀귀 개인전》ⓒ시사저널 최준필

웹툰 내용 알아야 작품의 맥락도 이해

‘성희롱·여혐으로 돈 벌겠단 웹툰 작가, 제정신인가.’ 2017년 말 중앙일보 기사 제목이다. 이 기사가 견제한 만화는 텀블벅 후원을 요청하면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했던 귀귀의 웹툰이었다. 올해 대선후보들의 자격조건을 따지는 질문에도 등장한 페미니즘이 당시는 초헌법적으로 기세등등할 때였고, 페미니즘만 내세우면 안 팔리는 게 없다는 의미의 ‘페미 코인’이란 냉소적 신조어가 통용될 때였다. 당대의 정신적 유행이 된 페미니즘을 귀귀가 자신의 텀블벅 후원에 반어적인 풍자 수단으로 가져다 쓴 만화다.

동료 만화가나 다른 시각예술가를 상회하는 귀귀 만화의 급진적인 표현은 자신의 정체를 은신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귀귀의 익명성은 집단적 신념의 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회 조건이 만든 것이다. 전체주의 그늘은 한 시절엔 공권력이 주범으로 지목됐지만, 2016년 전후 어느 때부턴가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드는 표현물은 제재해도 된다’는 공감대가 유행했고, 군중이 전체주의의 주범으로 떠올랐다. 귀귀의 웹툰과 전시회는 선의의 이름으로 기본권을 제약하는 이 시대 한국의 병리현상이 만든 반작용이자 해방구라 하겠다. “약간의 안전을 얻기 위해 약간의 자유를 포기하는 사회는, 자유도 안전도 가질 자격이 없으며 둘 다 잃게 될 것이다.” 미국 100달러 지폐에 초상화가 인쇄된 벤저민 프랭클린이 18세기에 던진 충고를, 21세기 한국에 살면서 떠올릴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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