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도 명예도 내던지고 세상 떠난 재벌들
  • 박창민 기자 (pcm@sisajournal.com)
  • 승인 2022.03.16 12:00
  • 호수 1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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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수사·우울증으로 극단적 선택하는 사례 늘어
전문가 “실패했을 때 일반인보다 더 심하게 좌절”

재벌가의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은 언제나 대중에게 큰 충격을 안긴다. 특히 그 사인이 ‘극단적인 선택’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일반적으로 자살은 사회·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돈과 명예를 거머쥔 이들은 왜 스스로 삶을 내던지는 걸까. 시사저널은 재벌들의 비극적인 선택을 입체적으로 분석했다.

김정주 넥슨 창업자(NXC 이사)가 향년 54세로 유명을 달리했다. 넥슨 측의 설명에 따르면 김 창업자는 최근 미국에서 사망했다. 넥슨은 김 창업자의 구체적인 사인은 밝히지 않았다. 다만, 우울증 치료를 받는 와중에 증세가 악화된 것으로 전해진다. 넥슨 측은 “유가족 모두 황망한 상황이라 자세히 설명해 드리지 못함을 양해 부탁드린다”며 “조용히 고인을 보내드리려는 유가족의 마음을 헤아려주시길 간절히 바란다”고 전했다.

고 김정주 넥슨 창업자ⓒ시사저널 임준선
고 김정주 넥슨 창업자ⓒ시사저널 임준선

김정주 넥슨 창업자 별세…우울증 시달려

게임업계는 김 창업자의 사망 소식에 충격에 빠졌다. 김 창업자는 1996년 세계 최초의 온라인게임 《바람의 나라》를 선보이며, 한국 게임산업에 큰 족적을 남겼다. 아울러 국내 1세대 벤처기업인으로 평가받으며, IT 신흥재벌 ‘빅 5’로 불렸다. 그야말로 돈과 명예를 모두 거머줬지만, 김 창업자가 극심한 우울증을 앓아왔다는 사실에 업계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는 분위기다.

넥슨 안팎에서는 김 창업자가 2016년 대학 동창인 ‘진경준 전 검사장 게이트’에 휘말리면서 심적 스트레스를 호소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서울대 86학번으로 막역한 사이로 알려졌다. 하지만 2016년 진 전 검사장이 160억원에 달하는 재산을 보유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두 사람의 ‘커넥션’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당시 진 전 검사장이 김 창업자의 도움을 받아 수백억원의 자산을 형성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진 전 검사장이 2005년 넥슨에서 4억2500만원을 무이자로 빌려 당시 비상장 기업이던 넥슨의 주식을 대거 매수한 뒤 상장 후 매도해 129억원의 막대한 시세차익을 얻은 사실이 알려졌다. 

이 사건은 김 창업자의 도덕성에 큰 생채기를 냈다. 아울러 김 창업자가 진 전 검사장에게 약 5000만원의 여행 경비와 고급 승용차를 제공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두 사람은 뇌물을 주고받은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됐다. 그러나 두 사람이 대학 시절부터 친구 관계였다는 사실이 재판 과정의 심리를 복잡하게 했다. 김 창업자는 결국 무죄를 받았지만, 그의 명예에는 돌이킬 수 없는 흠집이 났다.

진경준 게이트를 겪으면서 김 창업자는 ‘사업을 그만둬야겠다’고 말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게임업계 한 고위 임원은 “이 사건으로 김 창업자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게 일어났다. 덩달아 넥슨의 기업 이미지까지 실추되면서 정신적으로 힘들어 했다”며 “더불어 자신 때문에 20년 지기인 진 전 검사장이 큰 피해를 봤다는 마음의 짐도 컸던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김 창업자 같은 재력가들이 산전수전을 겪는 과정에서 이미 타고난 에너지를 소진해 우울증에 걸리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장창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삶이라는 게 일, 가족, 개인의 성취 등 여러 가지로 나뉠 수 있다. 김 창업자는 이 중 무언가 실타래가 풀리지 않았던 것 같다”며 “이걸 감당할 정신적 에너지가 고갈되면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우울증은 현대인 10명 중 1~2명은 일생에 한 번쯤 걸린다고 할 정도로 흔한 병이다. 세계에서 판매되는 약 순위 10위 안에 우울증 치료제가 들어있다. ‘마음의 감기’라고 불릴 정도로 흔한 병이지만, 악화될 경우 자칫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병이다.

2003년 8월4일 경찰이 현대 사옥에서 투신한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의 시신을 수습하고 있다.ⓒ연합뉴스

재벌가에 끊이지 않는 비극의 굴레

우울증은 재벌과 일반인을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이 때문에 사회적으로 명망 높은 기업인과 정치인, 연예인 등이 우울증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삼성과 현대 등 국내 내로라하는 재벌 집안도 가족을 가슴에 묻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손자인 이재찬 전 새한미디어 사장이 대표적이다. 그는 이 창업주의 차남 이창희 전 새한그룹 회장의 둘째 아들이다. 한때 전도유망한 젊은 기업인으로 불렸던 이 전 회장은 2010년 자신의 아파트에서 몸을 던졌다. 유서가 발견되지 않아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재벌로 살다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별다른 수입 없이 지냈다는 점과 연관 짓는 시선이 많다.

현대가도 마찬가지다. 1990년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4남인 정몽우 전 현대알미늄 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 전 회장은 미국 유학을 갔다 오고 난 뒤부터 우울증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정 전 회장은 “잠깐 밖에 바람을 쐬러 간다”며 병원을 나간 뒤 서울 강남 모 호텔에서 음독자살했다.

일각에서는 재벌가의 자살 원인은 일반인들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태어날 때부터 부유한 환경 속에서 실패의 경험 없이 탄탄대로 인생을 산 사람일 경우 한 번 실패를 맛봤을 때 더 심하게 좌절하고 우울증에 빠져들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기업인들은 검찰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많다. 법무부 자료에 따르면 2005년부터 2014년까지 10년 동안 검찰 수사 도중 자살한 기업인과 공직자 등은 90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 이인원 롯데그룹 부회장의 발인식ⓒ연합뉴스

가장 최근에는 롯데그룹 2인자로 신동빈 회장의 최측근이었던 이인원 부회장이 2016년 8월 검찰 출석을 앞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검찰은 롯데 계열사 간 부당거래와 오너 일가 일감 몰아주기 등 배임 혐의, 롯데건설의 수백억원대 비자금 조성에 이 전 부회장이 개입한 의혹을 조사할 계획이었다.

또 다른 사례로는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도 있다. 그는 자원개발 비리 의혹, 법인자금 횡령, 분식회계 혐의 등으로 검찰의 영장실질심사를 앞두고 2015년 4월 야산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성 전 회장은 직접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의 억울함을 전한 뒤 하루 만에 목숨을 끊었다.

2003년 8월에는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이 서울 종로구 현대그룹 사옥에서 투신했다. 정 전 회장은 당시 대북 불법 송금과 관련해 특검 수사를 받았다. 정 전 회장은 ‘대북(對北) 송금’ 사건으로 특검 조사를 받았고, 현대 비자금 사건으로 대검 중수부에서 세 차례 소환조사도 받았다. 정 전 회장은 가족과 현대 임직원 앞으로 유서를 남겼다.

죽음을 선택하는 이유는 각자의 혐의만큼이나 제각각이다. 하지만 극단적 선택을 한 기업인들은 모두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은 죽음이라는 판단을 내렸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모두 중년 남성으로 사회적으로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던 사람들이었다. 이런 현상에 대해 2014년 12월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발간한 ‘검찰 수사 중 피조사자의 자살 발생원인 및 대책 연구’(연성진·안성훈)에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연합뉴스

체면과 경쟁 중요시하는 한국 사회 단면

“검찰 수사 도중 자살하는 피조사자의 경우 공직자 및 사회 지도층 인사를 포함한 화이트칼라의 비율이 매우 높게 나타났다. 그동안 쌓아온 명예와 자존심에 상처를 입게 되면, 이들이 느끼는 감정은 일반 범죄자들과 일반인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로 작용할 수 있다. 특히 엘리트 중년 남성에게서 이런 증상이 많이 나타난다.”

기업인들의 자살은 화이트칼라 범죄의 특성에서 기인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형사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수사 도중 극단적 선택을 한 피조사자 중 화이트칼라 직업군의 비율은 72%, 공직자는 27%였다. 화이트칼라 범죄의 경우 조직적 차원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피의자와 관계된 수많은 주변 인물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가 이뤄진다. 

이런 검찰 수사 과정에서 배려형 자살, 회피형 자살, 해결형 자살 등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 연구 결과다. 자신의 고통과 문제 상황에 따른 부수적인 부담을 다른 가족이나 친지에게 전가하지 않기 위해 자살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사회에서 어느 정도 지위가 있고 크게 성공한 경험이 있는 사람일수록 좌절 저항력이 매우 약하며, 이 역시 극단적 선택의 요인이 된다는 분석도 있다. 이른바 ‘엘리트’ 중년 남성에게서 이러한 증상이 많이 나타난다고 형사정책연구원은 진단하고 있다. 작은 실패에도 자신을 쉽게 패배자로 낙인찍는 경향을 감안해 심리상담과 신변보호관 지정도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이는 체면과 경쟁을 중요시하는 한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우리 사회가 경쟁을 통한 효율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현실은 경쟁의 승자마저 자살로 내몰 정도로 가혹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개개인이 지속적으로 겪는 엄청난 스트레스와 심리적 압박감은 치열한 경쟁 사회의 이면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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