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 성범죄' 감싸는 팬덤정치 [쓴소리 곧은 소리]
  • 오진영 작가 (ohnong228@gmail.com)
  • 승인 2022.05.20 12:00
  • 호수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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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박완주 의원 사건은 전형적인 권력형 성범죄...최강욱 사건엔 옹호 댓글
팬덤정치의 무비판적인 제 식구 감싸기, 정당 비리 은폐조작의 온상 될 수 있어

“이번처럼 여성혐오가 전면에 드러난 선거가 없다. 대놓고 여성을 혐오하고 배제하며 유권자 취급도 안 하는 국민의힘 행태에 많이 분노했다.”

지난 3월초, 대통령선거를 직전에 두고 열린 이재명 후보 유세장에서 나온 발언이었고, 이 말을 한 사람은 더불어민주당 박지현 비대위원장이다. 이날 유세는 윤석열 후보의 여가부 폐지 공약에 반대하는 2030 여성들이 이재명 후보 지지를 선언한 자리였다.

선거운동 기간 막판에 이재명에게 몰린 2030 여성들의 표심은 0.73%라는 근소한 차이의 “졌지만 잘 싸운” 패배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젊은 여성 지지자들은 민주당에 졌지만 잘 싸웠다는 위로만 준 게 아니다. 대선에서 패배한 이재명의 정치적 생명을 연장시켰다. 이재명을 ‘아빠’라고 부르는 개딸들이 생겼고, 이재명은 이를 두고 “세계사적 의미가 있는 새로운 정치 형태”라며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6월1일 지방선거까지 기세등등 밀고 나갈 것 같던 여성 친화 선거 프레임에 제동을 거는 악재가 터졌다. 박완주 민주당 의원의 이른바 ‘성비위 제명’ 사건이다. 민주당 3선 중진인 박 의원이 여성 보좌관을 상대로 성추행을 했고, 이를 문제 삼는 보좌관의 면직을 시도했던, 전형적 ‘권력형 성범죄’였다. 민주당은 박 의원의 성추행 사실이 언론에 알려진 지 4일 만에 속전속결로 박완주 의원을 제명했다. 6월 지방선거에 미칠 악영향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었다. 안희정, 오거돈, 박원순 등 지자체장들의 잇따른 성범죄로 인한 ‘내로남불 성범죄당’의 오명이 부활할까 서둘러 진화에 나선 모양새였다.

ⓒ연합뉴스
ⓒ연합뉴스

젊은 여성들의 팬덤이 이재명의 정치 생명 연장

세상 어느 조직이나 구성원 간 성범죄는 일어날 수 있다. 중요한 건 어떤 대응으로 재발을 방지할 것인가다. 이번 박완주 의원 사건에 대한 민주당의 비교적 신속한 제명 처리와 사과 표명은 모범적 사례라 할 만했다. 그럼에도 이번 대응을 보며 ‘민주당이 야당이 되더니 정신을 차렸군’이라며 정치의 자정 현상을 기대할 수 없게 만든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민주당 최강욱 의원의 성희롱 발언을 사과한 박지현 비대위원장 페이스북에 무려 3000여 댓글로 험악한 욕설이 퍼부어진 것이다. ‘니가 뭔데 내부 총질이냐’는 항의성 악플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장면은 보기 참담한 수준이었다. 현재 당 윤리심판원에 회부된 최강욱 의원 건은 아직 결론을 내지 않았고 5월18일 다시 한번 성범죄 척결을 촉구한 박 위원장의 페북 글에는 같은 일이 반복됐다.

그러다 보니 민주당의 박완주 제명이 속전속결이었던 건 민주당의 체질이 바뀌어서가 아니고, 박완주가 조국이나 박원순처럼 팬덤을 가진 유명 정치인이 아니라서일까, 의심스럽다. ‘내가 박완주다’를 외치며 몰려 나올 시위대가 있고, 박완주의 차를 닦겠다고 물티슈를 들고 달려드는 강성 지지자들이 있었다면 상황은 사뭇 다르지 않았을까.

유명 정치인이 아니었기에 건조하고 빠른 징계가 가능했을 거라는 짐작의 근거는 팬덤이 강한 정치인일수록 잘못을 인정하는 데 인색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 사망 당시 여성운동 경력을 자랑하는 국회의원들조차 피해 호소인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2차 가해에 가담하는 걸 보았다. 국민의힘이 이준석 대표의 성상납 의혹과 증거인멸 시도에 대해 손놓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의혹이 제기된 지가 벌써 언제인데 당의 간판급 스타를 건드렸다가 충성 지지자들이 떨어져 나갈까 봐 뭉개고 있는 국민의힘은 민주당의 성범죄를 비판할 자격이 없다.

성범죄를 포함한 정당 내 비리를 은폐하고 조작하는 구태를 계속 보게 되리란 슬픈 예감은 인천 계양을 출마로 부활하려는 이재명에게 모인 개딸들의 팬덤정치 현상 때문이다. 팬덤정치의 무비판적 제 식구 감싸기는 정당 안에서 범죄의 은폐, 적반하장으로 우기기, 내로남불로 정당화하기를 무한재생시키는 온상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성착취 n번방 사건을 폭로한 활동가 박지현을 영입한 대선후보의 친여성 행보에 지지를 표명한 여성들이 오히려 성폭력을 은폐하고 피해자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될 것 같다.

 

유명 정치인, 악마화해서도 신격화해서도 안 돼

이재명이 개딸에게 “울 개딸님들이 외롭지 않게 해줘서 누명 벗겨줘서 너무너무 고맙잔아. 눈물 났잔아…”라고 응수하는 소통은 우려스럽다. 생판 남들끼리 딸이니 아빠니 하는 친족 용어로 부르고 혀 짧은 소리를 내면서 엉기는 건 퇴행과 미성숙의 징표다. 공적인 의사소통 공간에서 이념과 정책을 중심으로 힘을 모으고 연대하는 것이 민주사회의 정당정치다. 이 공간에서 정치인의 비리가 발생하면 공적 윤리에 맞게 건조하고 냉정하게 처리해야 한다. 이재명과 개딸처럼 정치인과 지지자들이 아빠니 딸이니 끈끈한 친족 용어를 쓰며 사적 유대감으로 뭉치면 무비판적 우리 편 감싸기가 공적 윤리 작동을 방해하게 한다. 아빠가 하시는 일은 닥치고 따르고, 아빠를 건드리는 자 용서하지 않는다고, 집단의 위세를 부리면 조폭과 다를 게 없다.

정치인에 대한 지지는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념과 정책과 가치에 대한 지지여야 한다. 성평등이든 경제적 정의든 각자가 믿는 가치를 실현하겠다는 정치인을 활발히 응원하다가도, 그 정치인에게서 공공의 가치를 위배한 결함이 드러나면 단호히 응징하고 심판하는 식으로 작동해야 한다. 윤석열도 한동훈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민주당이건 국민의힘이건 대통령이건 법무부 장관이건 그 어떤 정치인도 악마화해선 안 되듯이 신격화의 대상도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민주주의 위기’라고 지적한 ‘반지성주의’는 다름 아니라 확증편향으로 움직이는 팬덤정치다. 정치인에 대한 끈적하고 뜨거운 충성과 애정은 정상적인 정당정치를 왜곡하고, 맹목적 지지는 민주주의를 병들게 한다. 국민의 역할은 권력에 대한 차갑고 건조한 비판과 감시여야 한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오진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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