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지는 위기에 ‘해법 찾기’ 골몰하는 K기업들
  • 엄민우 시사저널e. 기자 (mw@sisajournal-e.com)
  • 승인 2022.09.04 08:05
  • 호수 171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비상경영 체제 선언하고 사업구조도 재편 나서
자동차 및 배터리 업계, 美 인플레이션 감축법 대응에 고심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연이은 자이언트 스텝(0.75% 금리 인상)이 한국 경제에 적잖은 충격을 주고 있다. 고물가·고금리·고환율의 3중고가 겹치며 경제 상황이 저성장 국면으로 접어들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올 하반기 경제성장률이 2% 초반대까지 떨어지면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이 찾아올 것이라는 연구 결과도 나오고 있다. 이상호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정책팀장은 “글로벌 대외 변수가 불확실해지고 통화긴축에 따라 글로벌 수요 둔화가 불가피해 수출 환경이 안 좋아지는 것은 기정사실”이라며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나라엔 상당히 달갑지 않은 상황”이라고 전했다.

8월25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미국 반도체ㆍ전기차 지원법 대비 업계 간담회에서 반도체·자동차·배터리 업계 대표들이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의 발언을 듣고 있다.ⓒ연합뉴스

성장률 더 떨어지면 스태그플레이션 올 수도

주요 기업들은 위기 대응을 위한 해법 모색에 고심하고 있다. 철강업계의 경우 글로벌 경기 침체로 전방사업 수요가 줄어들면서 재고가 쌓이고 제품 가격 하락이라 라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포스코는 7월24일부터 공식적 비상경영 체제에 돌입했다. 환율, 금리, 물가 등 3고(高) 영향 본격화에 따른 글로벌 경기 침체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 그룹사 전체가 위기 대응 긴급 대책을 수립하기로 했다. 사장단 및 전 임원이 참석하는 그룹경영회의를 매 분기 개최하고 ‘전사통합 위기대응팀’도 가동하고 있다. 다만 위기 속에서도 그룹 핵심 성장사업에는 적극 투자해 미래 경쟁력을 제고하고 그룹 체질 개선 기회로 활용하겠다는 방침이다.

사업구조 재편으로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모습도 보인다. 한화그룹은 ㈜한화,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한화임팩트 등 3개사를 중심으로 사업 재편에 나섰다. 분산돼 있던 방산사업을 한화에어로스페이스로 통합하기로 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한화에서 물적 분할된 방산 부문을 인수하고, 100% 자회사인 한화디펜스를 흡수 합병해 2030년까지 글로벌 톱10 방산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계획이다. 최근 김동관 한화솔루션 사장의 부회장 승진을 골자로 하는 대표이사 내정인사도 발표했다. 김 부회장은 향후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전략 부문을 맡게 된다. 한화그룹 관계자는 “대내외적 불확실성이 커지는 데 대응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자동차와 배터리 업계는 미국발(發) 악재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미국은 최근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제정하며 전기차 보조금 지급 대상에 미국산 전기차만 포함하도록 규정했다. 이 경우 국내에서 생산하는 현대차 전기차는 시장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보조금의 유무는 소비자의 전기차 선택에 상당히 큰 영향을 끼친다. 현재로선 미국에서 하루라도 빨리 전기차를 생산하는 것이 답이다. 일각에선 현대차가 미국 조지아주 전기차 전용공장 건립을 앞당길 것이란 전망도 나오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김필수 한국전기차협회 회장은 “전기차 전용공장을 최대한 빨리 당겨서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지만, 이는 노사 합의사항이라 쉽지 않은 게 사실”이라고 전했다.

이 때문에 외교적 접근으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인플레이션 감축법 자체를 되돌릴 순 없지만, 시행령 등으로 이를 보완할 방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우리 입장에선 ‘지금 당장은 현지에서 생산하지 않지만 미래에 투자하기로 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 가치를 인정해 줘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식으로 주장하며 절충점을 찾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현대차는 지난 5월 미국 조지아주에 6조3000억원을 들여 전기차 생산기지를 짓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우리 측 협상단은 대규모 투자를 약속한 상황이니만큼, 현대차에 대한 법 적용은 그렇지 않은 기업들과 달라야 한다는 논리를 펼칠 것으로 전망된다.

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 등 국내 배터리 업계 역시 미국 현지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대응하려면 시급히 중국 광물 비중을 낮춰야 하는 상황이다. 해당 법에 따르면 내년부터 배터리의 광물·부품 중 중국산이 다량 포함된 전기차는 미국에서 보조금을 받지 못한다. 이 때문에 중국 위주 공급망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업계에선 미국 현지 투자를 이어가며 공급망 다변화로 대응하는 방식을 통해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전략을 펼치겠단 의지를 보이고 있다. 한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광물 비중과 관련한 기준은 국내 업체뿐 아니라, 해외 업체들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규제”라며 “상황에 따라 국내 업계에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경영환경이 좋지 않을 땐 투자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상당수 기업은 저마다 처한 상황에 따라 필요한 최소한의 투자는 이어가려는 모습이다. 2026년까지 247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힌 SK그룹은 투자계획을 소폭 조정할 것으로 보이지만 투자 기조는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지난 7월 대한상공회의소 제주포럼 기자간담회에서 “작년에 세웠던 것(투자계획)은 당연히 어느 정도 바뀔 가능성이 존재한다”면서도 “투자가 밀려서 지연되기는 하겠지만 안 할 계획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8월16일(현지시간) 워싱턴DC 백악관에서 기후변화 대응과 의료보장 확충 등을 골자로 한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서명하고 있다.ⓒAP 연합

이재용 부회장의 사면 후 삼성 행보에도 관심

특히 이재용 부회장 사면 이후 삼성전자의 행보에 업계의 관심이 쏠려 있다. 삼성전자는 이 부회장이 법적 리스크에 시달리던 동안 대규모 인수·합병(M&A)이 멈추다시피 했다. 2017년 하만 인수가 사실상 마지막 M&A다. 올해 6월말 기준 삼성전자의 현금성 자산은 125조원에 달해 투자 여력은 충분하다는 평가다. 반도체 패권전쟁이 치열한 최근 상황을 감안할 때 이 부회장 사면을 계기로 삼성전자가 경쟁력 확보를 위해 차츰 대규모 투자에 나설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대만 중앙통신사에 따르면 웨이저자 TSMC CEO는 8월30일 타이베이에서 열린 연례 TSMC 기술포럼 연설에서 “TSMC는 상품을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절대 내 제품을 만들지는 않는다. 고객은 TSMC에 설계를 빼앗길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이어 “TSMC의 성공은 곧 고객의 성공이지만 경쟁 상대는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라며 “고객이 성공하든 말든 경쟁 상대는 따로 자기 상품이 있다”고 덧붙였다. 웨이저자 CEO가 ‘경쟁 상대’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고객사에 반도체를 공급하는 파운드리 사업과 자체 설계 기술을 보유한 삼성전자를 빗댄 것으로 해석된다. 사실상 메모리에 이어 시스템 반도체 1위 등극을 목표로 하는 삼성전자를 겨냥한 발언으로 두 회사 간 치열한 경쟁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