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 견제 대신 지엽적 사안 부풀리고 ‘묻지마 폭로’ 반복
하나의 사태, 두 개의 장면. 미국 철도노조 파업이 예고된 가운데 미 의회는 30년 만에 개입을 결정했다. 인플레이션 감축법, 낙태권 폐지 등을 놓고 사사건건 대립하던 집권 민주당과 야당 공화당은 파업 시 손실이 하루 20억 달러(약 2조6000억원)에 달한다는 우려에 초당적으로 뭉쳤다. 바이든 대통령은 여야 지도부를 백악관에 초청해 철도 파업에 대해 논의하고 합의를 이끌어냈다. 미 정치권은 파업 전에 움직였고, 초당적으로 논의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합의(deal)’를 했다.
한국에서는 화물연대가 파업 중이다. 철도노조도 파업을 예고하고 있다. 이른바 ‘파업 정국’이다. 미국 못지않게 한국도 지금 살얼음판 경제위기 상황이다. 그러니 노정(勞政) 모두 자신의 다급함을 외친다. ‘강 대 강’ 전면전 양상이다. 여기까지는 한국과 미국이 같다. 그런데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정치가 한국에선 실종됐다. 거대 양당은 갈등 해결은커녕 물밑 협상을 위한 조율 역할도 제대로 못 하고 있다. 새 정부 출범 6개월이 지났지만 아직 대통령과 야당은 국정 논의를 위한 자리조차 갖지 않았다. 그렇게 여야는 각종 민생법안은 물론 내년도 예산안을 두고서도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다.
정치가 사라지면 극단의 진영논리가 부각된다. 상대를 대화와 타협의 대상이 아닌 쓰러뜨려야 할 적으로 상정하는 증오의 정치가 기승을 부린다. 그렇게 정치는 문제 해결의 주체에서 객체로 전락한다. ‘정치의 사법화’는 점점 고착화되고 있다. 그렇게 분열은 더 촉진된다.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대화와 타협으로 갈등을 조율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를 복원해야 한다. 벼랑 끝 민생도, 화약고 같은 갈등도 결국은 정치만이 풀어낼 수 있다.
“정치는 갈등을 증폭시키는 게 아니라 타협하고 조정하는 건데 민주당은 지금 정치를 일종의 전쟁으로 보고 있다. 상대를 소멸의 대상으로 인식한다. 진영 논리와 팬덤정치에 매몰돼 정치를 한다. 철학의 빈곤이자 정치에 대한 몰이해다. 결과적으로 ‘자해 정치’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야당이 사실상 실종된다. 궁극적으로는 ‘정치 실종’을 넘어 ‘정치 몰락’이 된다.”(김형준 명지대 교수)
“투쟁을 해도 전략적으로 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것조차 아니다. 일차원적 정치다. 그저 윤석열 대통령을 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 “극렬 지지자만 보며 극단의 논리를 계속 확대해 당으로 가져오고 있다. 이는 선동정치에 불과하다.”(최창렬 용인대 교수), “민주당이 자충수를 두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박상병 정치평론가), “민주당은 DJ(김대중) 정신과 노무현 정신을 다 잃어버렸다.”(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장)
‘아니면 말고’식 의혹 제기 쏟아내는 국회 제1당
최근 제1야당 더불어민주당은 이상한 정치를 반복하고 있다. 본질적인 이슈보다 주변적이고 자극적인 이슈에 당력을 집중하고 있다. 문제제기 방식도 이상하다. 팩트에 근거하지 않은 의혹을 마구잡이식으로 제기한다. 김의겸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심야에 변호사 30여 명과 술자리를 가졌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거짓으로 드러났다. 한 의원만의 의혹 제기가 아니었다. 민주당 지도부도 동조했다. ‘아니면 말고’식 의혹 제기였지만, 태스크포스(TF) 구성과 특별검사(특검) 수사 카드까지 들고 나왔다.
민주당은 과도할 정도로 대통령 부인에 대한 공세에도 집착하고 있다. 장경태 최고위원은 김건희 여사가 캄보디아에서 심장질환 아동을 위로 방문했을 때 사진촬영용 조명이 사용됐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장 의원은 외신과 사진 전문가의 분석을 의혹 제기의 근거로 들었으나, 실제 출처는 온라인 커뮤니티로 드러났다. 출처를 제대로 밝히지 않았고,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점이 더욱 지적을 받았다. 이런 모습이 반복되니 “‘새로운 최순실’을 만들어내고 ‘태블릿 PC’를 찾아내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 같기도 하다”(강원택 서울대 교수)는 진단마저 나온다.
일부 민주당 의원은 취임한 지 6개월밖에 되지 않은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에도 참석하고 있다. 신임 대통령을 향한 퇴진 집회에 야당 의원들이 참석하는 것은 불과 6개월 전 선거를 통한 민심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선언처럼 보인다는 안팎의 지적이 쏟아짐에도 당 지도부의 공식적인 만류는 찾아볼 수 없다. 강성 지지층만 바라보는 정치다.
그래서일까. 윤 대통령과 집권여당의 낮은 지지도에도 민주당의 지지율 역시 낮은 상태에 머물러 있다. 민주당도 ‘대안 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민주당이 지금 입법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다수당이라는 점이다. 그런 민주당이 사소한 이슈에 집착하고 ‘거짓말 정치’라고 불러도 과하지 않을 ‘아니면 말고’식 마구잡이식 폭로에만 집중한다면, 협치의 가능성은 사라지게 된다. 국회 제1당이 이런 모습이라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보게 된다.
‘청담동 술자리’ 거짓말에 민주당은 사과도 안 해
지난 한 달여간 정치권을 뒤흔든 것은 ‘윤석열·한동훈 심야 청담동 술자리’ 의혹이었다. 의혹 제기의 주체는 민주당의 대변인을 맡고 있는 김의겸 의원이었다. 김 의원은 10월24일 법무부 국정감사에서 “윤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김앤장 변호사 30여 명과 지난 7월19일 청담동 술집에서 새벽까지 술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고 주장했다. 김 의원은 관련 녹취 파일도 틀었다. 당시 국정감사에서 민주당은 김 의원에게 첫 번째 질의를 맡겼다. 언론의 주목을 가장 많이 받게끔 당에서 공식적으로 미는 ‘1번 공격수’가 됐다는 뜻이다.
현직 대통령과 법무부 장관이 새벽까지 특정 로펌 변호사 수십 명과 술을 마셨다는 의혹은 분명 자극적이다. 이 정도 의혹을 주장하려면 철저한 확인을 거치고 분명한 근거를 제시했어야 했다. 한 장관은 술을 전혀 못 마시는 걸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통령이 그렇게 많은 인원과 술을 서울 번화가에서 마셨다면 눈에 띌 수밖에 없다. 하지만 김 의원은 술자리가 열렸다는 장소를 비롯해 의혹을 입증하는 물증은 단 하나도 제시하지 못했다. 의혹 제기의 유일한 근거는 술자리에 있었다는 첼리스트와 그 남자친구의 통화 녹취록뿐이었다. 당연히 김 의원은 첼리스트와 접촉해 통화 내용이 사실인지 확인했어야 했지만, 그런 기본을 지키지 않았다.
김 의원의 의혹 제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녹취에 등장하는 의혹의 첫 발설자인 첼리스트가 11월23일 경찰에 출석해 “전 남자친구를 속이려고 거짓말한 것”이라고 실토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무책임한 폭로였음이 드러났음에도 김 의원은 “다시 그날로 되돌아간다 해도 저는 다시 같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첼리스트) 진술이 사실이라면 윤 대통령 등 관련된 분들에게 심심한 유감을 표한다”면서도 “국정과 관련한 중대한 제보를 받고, 국정감사에서 이를 확인하는 것은 국회의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밝혔다.
가짜뉴스를 유포한 김 의원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제대로 된 검증 없이 이를 엄호하며 부화뇌동한 민주당 지도부의 행태라는 지적도 많다. 장경태 최고위원은 최고위원회의에서 통화 녹취록을 틀고, 김성환 정책위의장은 “제2의 국정농단”이라고 했다. 박찬대 최고위원은 전담팀 구성을 제안했으며, 박홍근 원내대표는 특검 수사를 거론했다.
김 의원의 ‘아니면 말고’식 의혹 제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1월9일에는 이재명 대표와 마리아 카스티요 페르난데스 주한 EU대사의 비공개 면담을 브리핑하면서 페르난데스 대사의 발언을 왜곡했다가 항의를 받고 하루 만에 공식 사과하기도 했다. 지난 9월엔 한동훈 장관이 법무부 행사장에서 만난 이재정 민주당 의원을 따라가 의도적으로 악수 장면을 연출했다는 의혹을 제기했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왜 민주당은 이렇게 아마추어적인 행태를 반복하고 있는 걸까. 최진 원장은 “김의겸 사태는 지금 민주당이 완전히 감정에 휩싸여 있다는 방증”이라고 진단했다. 최 원장은 “청담동 술자리 제보가 들어왔을 때 냉철한 상태였다면 더 확인하고, 전략적 대응을 고민했을 텐데 ‘분노’로 움직이니까 냅다 질러버리는 거다. 이게 일차원적 정치가 아니고 무엇인가. 지금 민주당에 윤 대통령은 그저 밉고 나쁜 지도자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주당 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는 터져 나왔다. 박지현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사이버 렉카의 거짓말을 대변인이 실어 나르고 있다”며 김 의원의 대변인직 사퇴를 촉구했다. ‘사이버 렉카’는 견인차(레커차)가 교통사고 차량을 먼저 차지하려고 경쟁하는 것처럼 인터넷에서 조회 수를 올리기 위해 설익은 주장과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퍼뜨리는 이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대통령 부인 향한 ‘비난을 위한 비난’
현재 김건희 여사에 대한 국민 여론은 상당수가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실제 김 여사의 비호감도는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야당으로서는 이를 공격 과녁 삼아 정치적 이익을 도모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정도(正道)가 있음에도 지금 민주당의 김 여사에 대한 과몰입은 너무 심하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물론 김 여사가 정도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면 응당 비판받고, 이를 제1야당은 비판해야 하는 게 책무다. 하지만 지금은 김 여사가 미국 대통령의 팔짱을 낀 것까지 비판하는 수준이다 보니, 그저 ‘비난을 위한 비난’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더 큰 문제는 김 여사의 언행보다 훨씬 더 중차대한 국정 이슈가 많음에도 민주당이 계속 여기에 집중하면서 언론과 국민의 한정된 정치 자원까지 소모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대표 사례가 ‘빈곤 포르노’ 논란이다. 민주당은 11월14일 최고위원회에서 동남아를 순방 중인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김 여사가 11월12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심장질환을 앓는 어린이의 집을 방문하고 사진을 찍은 것이 소재였다. “김 여사의 ‘빈곤 포르노’ 화보 촬영, 김 여사의 코스프레 정치”(장경태 최고위원), “쇼윈도 영부인”(고민정 최고위원) 등의 비판이 잇따랐는데, 정작 김 여사의 사진보다 중요한 윤 대통령의 한·미, 한·미·일, 한·일 연쇄 정상회담 내용은 다뤄지지 않았다.
장경태 최고위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김 여사가 캄보디아에서 심장질환 아동을 위로 방문했을 때 사진촬영용 조명이 사용됐다고 주장하며 논란을 이어갔다. ‘최소 2~3개의 조명 등 현장 스튜디오를 동원한 콘셉트 촬영’이라는 의혹을 추가로 제기한 것이다. 대통령실은 이에 대해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장 최고위원을 경찰에 고발했다. 정치적으로 해결할 일을 사법부에 끌고 간 대통령실의 대응도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조명 사용 여부 같은 지엽적 사안을 애초에 정쟁화한 것 자체가 가장 큰 문제였다는 비판이 많다.
정치가 해야 할 일을 내팽개친 채 정쟁에 몰두하면 어떻게 될까. 전문가들은 극단이 지배하는 세상을 우려한다. 김은미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정치권의 사소한 공방이 잘잘못의 문제를 넘어 우리 사회의 협력적 인프라를 야금야금 갉아먹는다는 점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면서 “공론장의 사소화가 정체성 기반의 뉴스 소비와 결합하면 협치에 이르는 길은 요원해진다. 일상에서 습관화된 적대감은 치유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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