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과 《재벌집 막내아들》이 보여주는 시대정신 [임명묵의 MZ학 개론]
  • 임명묵 작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12.19 13:05
  • 호수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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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고단한 상황을 순식간에 타개하는 ‘사이다’ 전개에 청년들 몰입
청년층의 좌절과 무력감이 K컬처 창조력 꽃피워

JTBC의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이 연일 화제다. 드라마는 가상의 재벌기업인 순양그룹의 ‘머슴’인 주인공이 1987년 순양 회장의 손자로 환생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시청률 고공행진을 이어가는 이 드라마는 12월11일에 방영된 11회차에서 최고 시청률 21%를 넘겼고, 올해 최고 화제작이었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기록도 제쳤다.

《재벌집 막내아들》이 5년 전인 2017년에 연재되었던 원작 웹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드라마라는 사실은 이 현상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물론 웹소설 원작 드라마는 이제 더는 낯선 작품이 아니다. 2018년에 tvN에서 방영되었던 《김비서가 왜 그럴까》 역시 동명의 웹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드라마로, 8% 정도의 준수한 시청률을 보인 바 있고, 웹소설을 드라마의 원천 시나리오로 삼는 것은 이제 흔한 작법이 되었다.

ⓒfreepik·JTBC 제공

미디어 변화 따른 웹소설 작법의 인기

그럼에도 《재벌집 막내아들》이 인상적인 것은, 이것이 한국 드라마의 전통적인 장르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여성 시청자가 드라마 시장의 핵심 소비자층을 구성하고 있기에, 한국 드라마를 관통하는 코드는 결국에는 로맨스였다. 웹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들도 절대 다수가 이미 성공한 로맨스 소설을 바탕으로 나온 작품들이다.

반면 《재벌집 막내아들》은 드라마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주류적인 드라마 시청자를 고려해 로맨스 요소를 상당히 많이 삽입하기는 했어도, 기본적으로 남성 독자층이 좋아하던 작품을 바탕에 두었다는 데서 큰 차이가 있다. 남성 독자층이 선호하는 작품들은 주로 속도감 있는 전개를 통해 적대적인 세계에서 생존하고, 최대한 빠른 성취를 달성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여성층도 유사한 전개를 좋아하지만 핵심적인 초점은 대부분 로맨스라는 데서 차이가 있다).

《재벌집 막내아들》의 핵심적인 배경이며, 한국 웹소설에서 없어서는 안 될 ‘클리셰’(여러 작품에서 나타나는 상투적 표현)인 과거 회귀는 이런 목적에 최적화된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주인공은 남들은 모르는 미래의 정보와 재벌가의 자본을 활용해 순식간에 성취를 이룩한다. 미래의 정보를 독점한 주인공이 상황을 압도하면서, 적들은 맥없이 당할 수밖에 없게 되고, 다른 이들은 주인공을 경외하게 된다. 이런 유사한 효과를 제공하는 클리셰는 여러 개 있다. 예컨대 자신이 내용을 다 알고 있는 책의 주인공으로 빙의하는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웹소설의 또 다른 대표적 클리셰인 ‘상태창’도 기능은 유사하다. 상태창을 통해 주인공은 현실 속에서도 디지털 게임의 인터페이스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따라서 현실의 각종 정보가 알기 쉽게 모두 수치화되어 제공되고, 남들은 쓸 수 없거나 쓰기 어려운 특별한 기술이나 아이템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독자들은 이 과정에서 주인공과 주인공의 주변인들 사이에서 생기는 정보와 능력의 비대칭성을 알기에, 작품을 통해 신속한 대리만족의 경험을 느낄 수 있다. 《재벌집 막내아들》의 성공은 한국 웹소설이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 이상 발전시켜온 작법이 장르소설을 넘어 기반 소비자층이 훨씬 넓은 드라마 차원에서도 대성공을 거둘 수 있음을 입증한 셈이다.

그렇다면 회귀나 상태창을 이용하는 웹소설의 이런 작법은 어떤 이유에서 이토록 빠르게 강력한 인기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일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미디어의 변화에 있었다. 인터넷 시대가 열리고,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각종 웹소설을 제공하는 플랫폼들이 생겨나면서 작품을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문턱이 엄청나게 낮아졌고, 독자들의 접근성은 혁신적으로 높아졌다. 그 결과 독자들은 시장에 공급되는 무수히 많은 작품 중에서 가장 빠르게 몰입할 수 있는 작품에 머물렀고, 충분히 빠른 만족을 주지 못할 경우에는 중간에 ‘하차’하고 금세 다른 작품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어차피 볼 것이 넘쳐서 문제지, 없어서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근래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 시장의 문법도 이와 마찬가지다. 작품은 1화에서 일단 모든 것을 보여줘야만 2화, 3화도 보도록 유도할 수 있다. 반대로 천천히 쌓아가다가 후반부에 클라이맥스를 터트리는 전통적 작법을 고수하면 새로운 시장의 문법에 적응할 수 없었다. 이제 시장은 엘리트 작가가 자신의 메시지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하향식이 아니라, 독자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써주는 작가를 선택하는 상향식으로 작동했다.

 

한국식 대리만족 콘텐츠의 글로벌 경쟁력

두 번째 이유로 2010년대에 속칭 ‘사이다’로 통하는 빠른 전개와 정보 비대칭을 통한 우위 확보라는 문법을 정착시킨 주요 소비자층의 속성을 들 수 있다. 웹소설의 주인공들을 잘 보면 대체로 가난하거나 불우한 환경 속에 놓여 있다가, 갑작스러운 기연을 통해 과거로 돌아가거나 게임 시스템을 확보하게 되면서 급속한 성장을 이루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중의 욕망이 시장의 흐름을 직접적으로 형성하는 환경에서, 이런 클리셰는 그 자체로 대중의 세계 인식과 욕망을 투영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그들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위계적이고 적대적이니, 그 속에서 빠른 성장을 통해 주변을 압도하는 경험을 콘텐츠를 통해서라도 갈망하게 된 것이다.

2010년대의 웹소설 시장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이들은 청년층이었다. 이와 같은 세계 인식과 욕망이 청년층에 형성된 이유에는 그들의 성장 환경이 자리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현재의 청년층은 거의 대부분 인터넷과 함께 성장해 스마트폰을 일찍부터 쥔 세대이면서, 동시에 세계화를 통한 계층 격차의 확대와 경쟁의 심화 속에서 자라난 세대였다.

SNS 속에서는 자신보다 상위에 있는 이들의 화려한 일상이 늘 노출되고, 그들의 삶은 선망의 대상이 되지만, 동시에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세계에 진입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무력감을 느낀다. 주인공이 고단한 상황을 순식간에 타개하는, 속칭 ‘사이다’ 전개는 이러한 무력감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좋은 해소제가 될 수 있었다.

한편 한국 대중문화가 특히 인상적인 것은 이러한 청년층의 불만이 정치적 불안정으로 나타나는 것보다 대중문화에서의 창조력 폭발로 이어졌다는 데 있다. 그리고 세계화와 정보화의 흐름은 세계적 차원에서 유사한 불만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한국식의 속도감 있는 대리만족 콘텐츠는 글로벌 시장에서도 강력한 경쟁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재벌집 막내아들》로 한층 더 본격화될 것으로 보이는 웹소설의 드라마 이식은 한국식 콘텐츠의 세계적 흥행을 앞으로도 주도할 것으로 보인다. 청년층의 좌절과 무력감이 대중문화의 창조력을 꽃피우고 지구적 성공까지 이끌었다는 것은 아마 한류의 가장 큰 역설 중 하나일 것이다.

임명묵 작가
임명묵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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