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의 여신’ 헤라는 왜 제우스와 안 싸웠나 [남인숙의 귀여겨듣기]
  • 남인숙 작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12.25 08:05
  • 호수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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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 남편은 놔두고 그의 상대 女에게만 분노…남녀 갈등은 여전히 ‘차별 구조’의 문제
진정한 양성평등과 화해는 여성이 만드는 것…자각한 여성 다수 돼 자신의 입장 대변할 수 있어야 부드러운 합의도 가능해져

며칠 전 필자는 SNS를 떠도는 재미있는 문구를 보게 되었다. “여보 화내지 마요. 대신 불륜으로 나온 아이 이름을 ‘여보 최고’로 짓겠소.”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했더니 그리스 신화 최고의 영웅 헤라클레스의 이름에서 발견한 뒷이야기를 농담으로 푼 것이었다.

헤라클레스의 친부인 제우스는 그리스 신화 속 세계관의 최고 강자지만 늘 아름다운 인간 여자를 탐내는 바람둥이로 묘사된다. 그 아들 헤라클레스 역시 제우스가 알크메네라는 여성에게 반해 그 남편으로 변신한 채 동침하면서 세상에 나오게 된 반신반인(半神半人)이다. 그런데 이 혼외자의 이름 안에 제우스의 본처인 헤라(Ἥρα) 여신의 이름이 들어있다는 것이 역설적이다. 어원만으로 들여다보면 헤라클레스(Ήρακλης)는 여신 헤라의 이름과 명예 혹은 영광이라는 뜻의 단어인 ‘클레오스(κλης)’를 합쳐 만든 고유명사가 된다. 이름 모를 누군가의 농담대로 ‘여보 최고’라는 뜻의 이름을 아들에게 붙인 것이 맞는 셈이다.

헤라는 천상계를 지배하는 최고 여신이지만, 신화 속 이야기에서는 제우스의 불륜 대상을 괴롭히느라 바쁜 악독한 본처의 전형으로만 그려진다. 말이 불륜이지 대체로 강간 피해자이거나 무고한 관련자인 그들은 이 강력한 여신의 질투에 타 죽거나(세멜레), 미쳐서 자식들을 죽이거나(이노), 곰으로 변해 살다가 아들의 화살에 맞아 죽을 위기에 처해졌다(칼리스토). 제우스는 이런 헤라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다독이고 훗날 불세출의 영웅이 될 헤라클레스를 지키기 위해 이런 이름을 준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이후 그가 겪을 고난을 짚어보면 전혀 보람이 없는 쓸데없는 짓이었지만 말이다.

ⓒfreepik

여자의 적은 여자? 여자는 속좁은 존재?

이런 헤라가 질투의 여신이자 결혼의 수호신이기도 하다는 것은 뒷맛이 쓴 역설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가부장으로부터 고통받는 여성이 결혼을 유지하고 자아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더 약한 여성에게 분노를 돌리고 단죄하는 것뿐이었다. 인간의 역사에서 흔히 그러듯 지배자들은 자신들 때문에 고통받는 피지배층이 자기들끼리 싸우는 구조를 치밀하게 만들어왔고, 유사 이래 여성 위에 군림하는 방식도 비슷했다. 그래서 여자들은 자신에게 허락된 한정된 이득을 차지하기 위해 여성끼리 경쟁하거나, 가부장제의 낙수라도 받아 마시기 위해 받는 스트레스를 같은 여성들에게 보복함으로써 풀곤 했다. 그 모습은 ‘여자의 적은 여자’ ‘여자는 시기·질투나 하는 속 좁은 존재’라는 전형적인 말로 표현되었다.

헤라는 잔혹했지만 제우스에게는 대항하지 않았고, 다른 여신들처럼 하급 신이나 인간 미소년에게 매혹되지도 않았다. 그가 ‘정절의 여신’이기도 한 이유다. 남성 중심 가부장제에서 가정을 지키는 진짜 미덕은 사랑이나 온화함이 아니라 권위에 도전하지 않고 역할에 충실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구조적인 불평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현재 한국 사회는 어떤가? 올해 갤럽에서 전 세계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40% 이상의 여성이 ‘의견 표현의 자유’가 지난 10년 동안 삶에서 가장 많이 진전한 분야라고 말했다. 호주제 폐지나 ‘미투’ 운동 등의 과정을 통해 문제가 드러나 일부 해결책이 나오고 여성들이 의견을 표현하기 시작하면서 일부 대립이 일어났다. 그 대립이 강렬하게 대두되고 정치에까지 이용되면서 세상이 뒤집힌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걸 두고 우리 사회는 ‘성별 갈등’ 혹은 ‘양성 갈등’이라고 불렀고, 이 지면을 담당하게 된 필자도 좀 더 중립적인 단어 선택에 대한 고민으로 위와 같은 표현을 사용해 왔다.

그러나 갈등은 두 세력이 비등할 때 주로 쓰게 되는 표현이다. 미국 사회의 주류로서 58.7%를 차지하고 있는 백인과 고작 12.4%를 차지하는 데다 그것도 상당수가 취약계층인 흑인 간 충돌 문제를 ‘흑백 갈등’이 아닌, ‘흑인 차별’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 사회에서 양성평등 문제는 실제로는 단순한 남녀의 대립이 아니다. 기성세대와 그 세대 아래서 여전히 가부장제의 혜택을 보고 있는(혹은 그렇다고 믿고 있는) 여성들 상당수가 양성평등 이슈에 거부감을 느낀다. 고(故) 박완서 소설가는 아들이라는 존재를 ‘후천적인 남근’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아들을 낳고서야 비로소 가부장제가 그 일원에게 주는 달콤한 혜택에 발 담글 수 있었던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어머니들은 존재 자체로 자신에게 그런 전능감을 안겨준 아들을 사랑하고 자아를 온통 투사하게 된다. 그 후 좀 더 의견을 표현할 수 있게 된 세대의 여성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보다는 나아졌을지언정 아들과 다른 기대 속에서 자란 여성들은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자아보다는 가정 내 역할에 충실하지 못할 때 느끼는 죄책감을 내면화하게 된다. 그렇게 사회가 필요로 하는 만큼의 사회생활만 하고 경력이 단절된 여성들은 자신이 많은 희생을 치러 지켜낸 가정이 평가절하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을 더러운 용어로 만드는 데 성공”

양성평등의 여러 주장은 사회 주류 형태의 가정을 이루고 지켜낸 자신의 업적에 상처를 낸다. 이것이 다른 선진국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상인 페미니즘을 우리 사회는 같은 여성들조차도 상당수가 진절머리 치게 되는 이유다. BBC 한국 특파원 진 맥켄지는 ‘이 남성들은 결국 페미니즘을 더러운 용어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제 몇몇 여성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부끄러워하거나 심지어 두려워하기도 한다’고 쓰기도 했다.

지금 성별 갈등이라고 표현되는 전쟁에 직접 참전하고 있는 이들은 온라인을 중심으로 여성 차별을 거부하는 일부 20·30대 여성들, 그리고 ‘상당수’라고 표현할 수 있는 20·30대 남성들이다. 그리고 남성 몫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이는) 여성들을 적으로 보는 어머니와 아내들이 남성들과 입장을 함께하고 있다.

지난 한 해 이 칼럼을 연재하면서 접한 댓글들은 대부분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필자가 아쉬웠던 것은 좋고 나쁜 것을 떠나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반응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헤라와 같은 능력을 갖춘 여성이 같은 여성을 향해 분노나 무관심으로 일관하게 되는 것은 여전히 구조의 문제다. 자각한 여성들이 다수가 되어 자신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어야 주장은 온건해지고 부드러운 합의도 가능해진다. 변화는 본래 약자가 발제하는 것이고 익숙해진 기존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므로 피곤하다. 그러나 ‘한 번쯤 듣고 생각해 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 지면이 올해 조금이나마 그런 역할을 했기를 바랄 뿐이다.

남인숙 작가
남인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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