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된 한국 야구, 그나마 성과는 ‘선수들의 깨달음’
  • 김양희 한겨레신문 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3.18 11:05
  • 호수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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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WBC 1라운드 탈락 후 선수들 자책
20대 선수 주축 일본, 한국과 격차 벌려…세대교체 안된 KBO리그 민낯 드러나

한국 야구가 졌다. 또 졌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2013년, 2017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첫 경기 패배의 악몽은 다시 이어졌고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3개 대회에서 한국의 첫 상대팀은 네덜란드(0대5), 이스라엘(1대2), 호주(7대8)였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서는 충격파가 더 컸다. 2013년과 2017년 대회 사이에는 2015년 프리미어12 초대 대회 우승이 있었다. 그러나 올해는 2020 도쿄올림픽(2021년 개최) 노메달(4위)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터라 패배의 그림자가 더 짙다. 

미국 애리조나 캠프 분위기는 좋았다. 이상 저온 날씨에 실내 불펜이 없던 터라 훈련에 차질이 빚어졌으나 선수단은 화기애애했다. 생애 10번째 태극마크를 단 ‘캡틴’ 김현수(LG 트윈스)는 “처음 애리조나에 모였을 때부터 팀 분위기가 좋았고 하나가 되어 이기자는 마음이었다. 이번 대표팀은 선임도 있고 어린 선수도 있어 조화가 제일 잘되지 않았나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애리조나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이동할 때 항공기 내부 결함으로 대표팀은 버스로 8시간 가까이 움직여야만 했다. 대표팀은 귀국을 위해 짐을 싼 지 35시간 후에야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대표팀은 귀국 사흘 후에 다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대회 장소인 도쿄가 아니라 공식 평가전이 열리는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다. 오사카에서 3일을 머무른 뒤 기차를 통해 비로소 결전지 도쿄에 입성했다. 애리조나 캠프를 위해 양의지 등 두산 베어스 선수들은 호주에서, 롯데 자이언츠 일부 선수는 괌에서 왔고, 원태인(삼성 라이온즈)은 미국-일본-미국-한국-일본을 오가는 일정을 소화했다.

대회가 3월에 열리는 터라 예년보다 빨리 컨디션을 끌어올려야 하는데 이동과 시차 적응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한국과 달리 일본은 2월17일부터 일본 규슈 미야자키현에서 훈련했고, 호주 대표팀은 대회 개막 2주 전인 2월25일 이미 일본 도쿄도에 입성했다.

ⓒ연합뉴스
3월10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2023 WBC B조 본선 1라운드 2차전 일본과의 경기에서 4대13으로 크게 패한 한국 선수들이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스트라이크 던지는 것도 애먹어 ‘마운드 패닉’

대표팀 투수진은 대회 개막 전부터 우려를 낳았다. 이강철 대표팀 감독은 좌완 구창모(NC 다이노스)를 일본전 선발로 고려하고 있었으나, 구위가 오락가락했다. 좌완 이의리(KIA 타이거즈)와 사이드암 정우영(LG)에게는 불펜 스토퍼 역할을 기대했지만, 몸이 채 만들어지지 않았다. 여기에 ‘구원왕’ 고우석(LG)마저 탈이 났다. 한신 타이거스와의 마지막 평가전에서 덜컥 어깨 근육을 다쳤다. 그나마 평가전을 통해 원태인과 김원중(롯데)이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선발·불펜 모든 게 불확실한 상태였다. 호주전 선발 고영표(KT 위즈)만 확실했을 뿐이다.

힘 좋은 타자가 많은 호주와 홈런이 자주 나오는 도쿄돔에 대한 맞춤형으로 땅볼 유도형 투수를 많이 뽑았지만, 결국 호주전에서 투수들의 발목을 잡은 것은 ‘한 방’이었다. 선발 고영표는 물론이고 김원중, 베테랑 양현종(KIA)까지 홈런을 두들겨 맞았다. 투구수 제한(65개)과 3타자 의무 상대, 휴식일 보장 등 대회 규정은 가용 가능한 투수 부족과 맞물려 벤치의 움직임을 축소시켰다. 대회 직전 이강철 감독을 보좌하던 김기태 KT 2군 감독이 중도 귀국한 것도 대표팀 초보 사령탑에는 악재였다.

반드시 이겼어야 할, 어쩌면 지는 게 이상해 보였던 경기(호주전)를 내준 다음 날 일본전 참패는 예고된 결과였다. 오타니 쇼헤이(LA 에인절스), 다루빗슈 유(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등 메이저리거 4명과 리그 최연소 퍼펙트 투구의 사사키 로키(지바 롯데 마린스), 일본인 단일 시즌 최다 홈런 신기록(56개)의 무라카미 무네타카(야쿠르트 스왈로스) 등 쟁쟁한 선수들이 속한 일본에 한국은 경기 시작 전부터 이미 기가 죽어 있었다. 

역시나 투수 쪽에서 사달이 났다. 베테랑 김광현부터 김윤식(LG), 이의리까지 스트라이크를 꽂는 데 애를 먹었다. 괜히 어설프게 스트라이크존 안으로 공을 던지려다가 장타를 얻어맞기 일쑤였다. 컨디션 난조든, 공인구 적응 실패든 변명의 여지 없이 일본전에 등판한 투수들은 하나같이 제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한국의 10번째 투수로 등판한 박세웅(롯데)만이 유일하게 제 몫을 했다.

3월9일 호주전(7대8), 10일 일본전(4대13)에서 한국 투수진이 상대팀에 내준 점수는 무려 21점이었다. 안타 23개를 맞은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사사구만 무려 14개(볼넷 10개+몸에맞는공 4개)를 허용했다. 마운드 패닉 상태였다. 이번 대회 4경기 대표팀 평균자책점은 7.55. 프로 선수가 아닌 본업이 교사·영업사원·전기기사·소방관 등으로 구성된 체코 대표팀의 평균자책점(7.94)과 별 차이가 없었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대표팀 투수진은 어렸다. 김광현·양현종 등을 제외하면 국제대회 경험이 많은 선수가 적었다. 15명 중 7명이 처음 태극마크를 달았고, 고영표·원태인·이의리·구창모는 이번이 두 번째 대표팀 승선이었다. 도쿄올림픽 참패에 따른 부담감은 압박감이 큰 무대 경험이 부족한 어린 선수들을 더욱 옥죄었다. 과거 정현욱·정대현·오승환 등 위기 때 등판해 불을 껐던 철벽 불펜은 없었다. 

누군가는 대표팀 세대교체 실패라고 하지만 이번 대표팀에는 과거 학교폭력 문제가 있는 안우진을 제외하곤 리그에서 가능성 있는 어린 투수들이 거의 발탁됐다. 대표팀이 아니라 KBO리그의 세대교체가 안 된 민낯이 2023 WBC를 통해 드러났다고 보는 것이 옳다. 원태인은 대회가 끝난 후 “정말 우물 안 개구리라는 것을 이번 대회에 와서 더 느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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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3일 마지막 중국전 승리를 끝으로 대회를 마친 한국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떠나는 모습 ⓒ연합뉴스

“지금까지 했던 운동과 마인드를 바꾸겠다”

이번 대회에서 가장 부러웠던 점은 일본 대표팀의 세대교체였다. 체코전에서 최고 시속 164km 강속구를 뽐낸 사사키는 22세다. 다루빗슈에 이어 오타니가 등장했고, 오타니 다음 사사키가 나왔다. 일본 대표팀 4번 타자 무라카미도 23세다. 이에 반해 한국 대표팀 4번 타자는 37세의 박병호였다. 둘 다 지난해 자국 리그 홈런왕이었다.

참패의 아픔을 남겼지만 그래도 대표팀 선수들의 각성에서 희망은 피어난다. 원태인은 “실력에서 밀린다는 것을 경험했다. 지금까지 했던 운동과 마인드를 바꾸겠다”고 했다. 그나마 이번 대회에서 제 역할을 해낸 이정후 또한 “우리 기량이 떨어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대회였다. 좌절하지 않고 앞으로 더 발전하면 된다”고 각오를 다시 다졌다.

한국 야구는 패배했다. 하지만 실패 안에만 머물러 있으면 또 다른 패배만 불러온다. 2008 베이징올림픽 금메달과 2009 WBC 준우승으로 한국 야구의 위상을 세계 속에 떨쳤던 그 공든 탑은 이미 무너져 폐허가 됐다. 겸허하게 인정하고 다시 맨 밑의 주춧돌부터 세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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