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구가 되는 150km대 속구에 한국 타자들 ‘쩔쩔’
  • 김양희 한겨레신문 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3.25 11:05
  • 호수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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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WBC가 던져준 한국 야구 과제들
우승 차지한 일본, 더 이상 한국의 ‘라이벌’ 아니다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회가 3월22일 일본의 우승으로 15일간의 열전을 마쳤다. 이번 대회는 14년 만에 우승을 노리는 일본과 대회 2연패를 노리는 미국이 결승에서 맞붙는 최고의 흥행카드를 만들어냈다. ‘숙적’ 일본이 우승을 차지하고 괴물 오타니 쇼헤이가 MVP를 수상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한국 야구의 현실은 초라하기만 하다.  

한때 일본의 ‘숙명의 라이벌’로 불렸던 한국은 1라운드 탈락으로 조기 마감하며 ‘우물 안 개구리’ 처지를 뼈아프게 느껴야 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1회 대회(2006) 4강과 2회 대회(2009) 준우승을 끝으로 이후 3개 대회 연속 1라운드 탈락의 충격 속에 많은 야구 전문가는 투수 구속과 제구에 대한 한국 야구와 세계 야구의 뚜렷한 격차를 지적했다. 우승국 일본을 중심으로 세계 야구는 제구가 되는 시속 150km 이상의 공이 일반화돼 있었다. 사사키 로키(일본)의 경우 4강 멕시코전에서 던진 64개의 공 중 26개가 시속 100마일(161km)을 넘었다. 

2023 WBC에서 조기 탈락한 한국 야구대표팀 선수들이 3월14일 인천국제공항 2터미널을 통해 귀국해 이동하고 있다. ⓒ시사전저널 이종현
2023 WBC에서 조기 탈락한 한국 야구대표팀 선수들이 3월14일 인천국제공항 2터미널을 통해 귀국해 이동하고 있다. ⓒ시사전저널 이종현

당장 눈앞의 승리만 보는 국내 구단들

한국 야구의 반성도 구속과 제구에서부터 시작된다. KBO리그는 현재도 시속 140km 후반대 공을 던지면 ‘빠르다’는 평가를 한다. 일본 투수들의 시속 150km 이상 속구와 뚝 떨어지는 변화구에 한국 타자들이 쩔쩔맨 것도 그런 유의 공을 평소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 야구에는 빠른 공을 던지는 어린 투수가 없을까. 그렇지는 않다. 일부를 제외하고 대다수가 불펜 투수로 있다. KBO리그 구단들은 5인 선발 로테이션으로 시즌을 꾸려 가는데, 외국인 투수들이 두 자리를 차지한다. 나머지 3자리를 놓고 국내 선수가 경쟁하는데 보통은 경험이 많은 베테랑 선수들로 채워진다. 시속 155km 안팎의 빠른 공을 보유한 어린 선수는 자연스럽게 중간계투로 밀린다.

현장 감독들은 타자를 윽박지를 수 있는 파이어볼러를 5일에 한 번이 아닌 1주일에 2~3차례 가용해 더 많은 승수를 쌓기 원한다. 아직 어깨 근육이 단련되지 않은 어린 선수들은 이 과정에서 잦은 등판으로 부상을 당하기도 한다. 구속은 서서히 줄어든다. 2년 이상 감독 계약을 해도 성적 부진으로 반년 만에 해임되는 일이 빈번한 KBO리그에서 어린 투수들을 보호하며 팀을 운영할 배짱을 가진 감독은 드물다. 오직 순위에만 목매는 리그 현실 자체가 어린 투수들의 성장을 막고 있다고 하겠다. 

일본 지바 롯데 마린스가 이미 고교 때 시속 165km 안팎의 공을 던진 사사키를 프로에서 즉시 기용하지 않은 이유를 따져봐야 한다. 지바 롯데는 사사키가 강속구를 던져도 다치지 않을 몸을 만들기까지 충분한 시간을 줬다. 그게 2년이다. 풀타임을 뛰는 첫 시즌에도 1주일에 한 차례만 등판시키고 피로가 쌓였다 싶으면 2군으로 내려보내 쉬게 했다. 일본 최연소(20세5개월) 퍼펙트 투구를 기록한 사사키가 지난해 시즌 20경기에만 등판한 이유다. 평균적으로 선발투수는 시즌 30경기 안팎을 소화한다.

일본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코치고문을 했던 김성근 전 한화 이글스 감독은 “일본에서도 처음에는 ‘기술이 먼저지, 체력이 먼저냐’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야구할) 몸을 우선시하게 되면서 몸이 된 다음에 하나씩 하나씩 기술을 만들어간다”고 했다. 국내 구단들, 감독들의 인식이 변하지 않는 한 아무리 ‘초고교급’ 아마추어 선수가 프로에 입단해도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김인식 전 대표팀 감독 등 야구 원로들은 아마추어 선수들이 쓰는 나무 배트에서 투수력 저하의 원인을 찾기도 한다. 고교 타자가 나무 배트를 쓰다 보니 투수가 제구력이 떨어져도 빠른 공만으로 타자를 제압할 수 있어 기량 발전이 더디다는 얘기다. 타자가 알루미늄 방망이를 쓰면 반발력과 접촉 면적 등의 이유로 활발한 타격이 나올 것이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투수의 기량도 한층 나아질 것이라는 이상론이다. 리그 거포 부재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나오는 얘기도 아마추어 알루미늄 배트 부활이었다. 

그러나 반발력이 강한 알루미늄 배트는 미국에서도 안전상 문제로 지양되는 추세다. 미국 고등학교의 경우 협회(NFHS·National Federation of State High School Associations)가 내세운 기준치를 충족하는 선에서 나무 배트와 알루미늄 배트 등을 쓰게 하는데 알루미늄 배트의 반발력도 점점 나무 배트만큼 낮춰가고 있다. 타구 스피드가 빨라지면 수비수의 부상 위험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에서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하는 데는 경제적 이유가 크다. 알루미늄 배트는 평균 300달러 정도로 비싸기는 하지만 튼튼하고, 나무 배트는 50달러 안팎이지만 잘 부러진다. 한 통계에 따르면 미국 아마추어 선수들은 나무 배트의 경우 한 해 평균 10자루를 쓴다. 알루미늄 배트는 가벼워서 타격 때 컨트롤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으나 프로에서 나무 배트를 사용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교 시절부터 적응하는 게 나을 수 있다.  

3월21일 열린 결승전에서 미국을 꺾은 일본 선수들이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3월21일 열린 결승전에서 미국을 꺾은 일본 선수들이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우투좌타 트렌드가 만든 ‘거포 부재’도 심각

한국 야구는 현재 투수력 저하와 함께 앞서 언급한 거포 부재 문제도 심각한데 이는 우투좌타 트렌드 탓도 있다. 아마추어 감독들이 야구에 재능 있는 선수들에게 왼쪽 타석을 권하면서 생긴 현상이다. 2023 시즌 등록 선수 591명 중 우투좌타는 총 109명이다. 좌투좌타 선수 숫자(109명)와 똑같다. 강백호(KT 위즈)처럼 원래 오른손잡이였던 선수들이 오른손으로 방망이를 쳤다면 리그의 현재는 아마 달라졌을 것이다.  

지난해 리그 홈런왕은 36세의 박병호(KT)였다. 이정후(키움·23개)를 제외하고 20개 이상 홈런을 쳐낸 20대가 단 한 명도 없었다. 타격 톱10에 든 선수 중 이정후 외에 김혜성(키움), 문보경(LG)만이 20대였다. 한 일본 언론은 “은퇴를 앞둔 40대 이대호(롯데)가 타격 4위를 하는 리그”라고 촌평할 만하다. KBO리그는 세대교체 시기를 놓쳤다. 

리그 시스템 문제와 함께 대표팀 전임 감독제 얘기도 솔솔 흘러나온다. 대표팀은 도쿄올림픽(2021년)의 실패에 따라 전임 감독이 아닌 현역 감독이 대표팀을 이끄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축구처럼 A매치가 활발하면 모를까 야구의 경우 전임 감독이 지휘할 대회가 많지 않다. 아무리 베테랑 사령탑이어도 경기 운용 감각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오는 9월 항저우아시안게임 때는 다시 전임 감독이 대표팀을 이끌게 되는데 결과에 따라 전임 감독제 논의는 더욱 뜨거워질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전임 감독제의 전제 조건은 일본·대만 등과의 국제 교류전 활성화여야만 할 것이다. WBC 때 어린 투수들이 스트라이크를 못 던진 이유는 국제 경기 경험 부족으로 지나치게 긴장한 탓도 있었다. 

최근 아마추어 선수들은 사설 아카데미 과외 덕에 점점 더 빠른 공을 던지고 있다. 실제로 고교 선수 중에서 시속 150km 이상 속구를 던지는 이가 많다고 한다. 지난해 신인 드래프트에 나왔던 투수 중 100명 이상이 평균 시속 140km 넘게 던졌다는 얘기도 있다. 상황이 이러니 WBC 실패를 아마추어 쪽에서는 프로의 선수 육성 방식 탓, 프로에서는 아마추어 기본기 탓으로 돌린다. 노골적 비난보다는 합리적 비판 안에서 난제를 풀 해답을 찾을 때다. 야구 혁신은 모두의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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