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100년史는 통한과 설움, 흥의 여정
  • 박치현 영남본부 기자 (sisa518@sisajournal.com)
  • 승인 2023.05.28 14:05
  • 호수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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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한국대중음악박물관, 7만여 장 대중가요 앨범 전시 
일제강점기에서 BTS까지, 시대상 담은 희귀 음반 보고

일제강점기에 대중은 광복의 희망가를 노래하며 거대한 ‘가요 팬덤’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분단과 전쟁, 혁명과 독재, 민주화에 이르는 굴곡진 역사의 격랑을 건너오면서 대중가요는 아리랑의 또 다른 변주였다. 트로트는 지친 삶에 활력을 불어넣듯 흥을 돋웠다. 우리 민족의 삶을 노래해온 대중가요가 한자리에 모였다. 경주 보문단지 내 한국대중음악박물관에는 유일무이한 희귀 음반 등 7만여 장의 앨범이 시대별(1910∼2023)로 정리돼 있다. K팝 100년사를 응축시킨 일종의 아카이브(archive)다. 음반에 새겨진 당대의 풍정(風情)을 따라가 본다. 

ⓒ한국대중음악박물관
한국대중음악박물관에는 한국 대중가요 100년사를 담고 있는 앨범 7만여 장이 시대 순으로 전시돼 있다. ⓒ한국대중음악박물관

《아리랑》 《눈물젖은 두만강》 ‘금지곡 1호’

1920년대 한국 대중가요는 망국의 곡진(曲盡)한 사연을 담고 있다. 한국 최초의 가요는 1923년(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박채선·이류색의 《이 풍진 세월》이다. 1926년에는 현해탄 투신으로 유명한 한국인 최초 소프라노 윤심덕의 《사의 찬미》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홍도야 우지마라》 《애수의 소야곡》 등도 망국의 슬픔을 노래했고, 애끊는 한의 정서는 《굳세어라 금순아》 《번지 없는 주막》으로 이어졌다. 당시 이애리수의 《황성옛터》는 조국을 잃은 동포의 가슴을 울렸다.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 최초의 ‘금지곡’도 이때 등장했다. 조선총독부는 《아리랑》 《봉선화》 《눈물젖은 두만강》을 ‘금지곡 1호’로 선정했다. 민족감정을 고취하는 노래로 분류한 것이다.

1930년대는 민요풍 가락에 서양악기로 반주한 ‘신민요’가 유행했고, 고복수의 《타향살이》가 국민가요로 떠올랐다. 하지만 1933년부터 일제는 우리 노랫말을 금지시켰다. 대신 일본 군가와 국민가요만 부르게 했다. 《우리는 제국의 군인이다》 《아들의 혈서》 등이 당시 만들어진 노래다. 이때부터 노골적인 친일가요들이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1939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걸그룹 저고리시스터즈가 결성됐으나 광복 이후 해체됐다.

6·25 전쟁은 분단의 눈물과 한숨의 대중가요를 생산했다. 《가거라 삼팔선아》 《신라의 달밤》 등의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다. 전쟁 중에는 군가의 영향을 받은 《전우가》 《전선야곡》 등이 만들어졌다.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 정거장》은 피난민들의 애절한 절규를 담은 대표적인 노래다. 당시 우리 가요는 미국 대중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 안정애의 《무정 블루스》가 대표적이다. 특히 탱고, 맘보, 부기우기, 블루스 등 춤곡 리듬인 현인의 《서울야곡》, 도미의 《비의 탱고》, 김정애의 《닐니리 맘보》 등이 대거 출현했다. 악극단 전성기도 이때였다. 하지만 1958년부터 영화에 밀린 악극단은 쇠락의 길을 걸었고 트로트와 신민요의 전성시대는 저물어갔다. 

1960년대에는 미국풍 스탠더드 팝이 주류로 올라섰다. 한명숙이 부른 《노란 샤쓰의 사나이》의 대유행을 계기로 최희준의 《맨발의 청춘》, 현미의 《떠날 때는 말없이》, 봉봉사중창단의 《꽃집 아가씨》가 스탠더드 팝 시대를 굳건히 했다. 미군부대 출신 가수들의 왕성한 활동도 이 시기에 시작됐다. 펄시스터즈의 《커피 한 잔》, 김추자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등 댄스 여가수의 노래들이 성공함으로써 록 히트 시대를 예고했다.

1970년대는 청년문화의 바람을 탄 포크송 시대였다. 어니언스의 《편지》 , 송창식의 《한번쯤》, 이장희의 《한 잔의 추억》이 트로트와 팝을 밀어냈다. 김민기와 한대수는 이성적이고 절제된 감정의 언어로 세상의 어두운 면과 내면의 고통을 음악에 담았다. 하지만 1975년 터진 대마초 사건은 포크송과 록 붐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장희, 신중현, 김추자 등 당대 최고 인기가수들이 연루돼 투옥되거나 활동을 중지했다. ‘MBC 대학가요제’와 ‘TBC 해변가요제’가 이때 태동했다.  

1980년대는 조용필과 언더그라운드 록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창밖의 여자》는 모든 세대를 흡수했다. 팝과 록이 결합된 분절적 구성으로 록의 특성을 화려한 화성과 선율로 감싸안은 결과였다. 김수철의 《못다핀 꽃 한 송이》, 송골매의 《어쩌다 마주친 그대》, 윤시내의 《열애》 등 당시 인기가수들의 히트곡도 이 방식을 채택했다. 1980년대 후반은 들국화의 시간이었다. 첫 음반 ‘행진’이 30만 장 팔리면서 한국의 언더그라운드와 록 시대의 새로운 탄생을 알렸다. 이후 시나위와 부활, 백두산 등 헤비메탈 그룹이 언더그라운드의 중심에 섰고, 김현식이 록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1987년 ‘6월 시민항쟁’은 민중가요가 대중가요 시장에 진입하는 계기가 됐다. 혼성그룹 ‘노래를찾는사람들’은 민주화 열기에 편승해 《솔아 푸르른 솔아》 《그날이 오면》 등 민중가요를 불러 주목을 받았다. 사회비판적 포크송 가수인 김민기와   돌 등의 존재도 이때 알려졌다. 이후 정태춘, 김광석, 안치환도 민중가요의 흐름을 만들어갔다.  

한국 대중가요는 숫한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1960년대 한국방송윤리위원회는 납북·월북자의 가요를 방송금지곡으로 지정했다. 건국 후 금지곡 1호는 월북 작사가 조명암의 《기로의 황혼》이었다. 1975년에는 ‘공연활동의 정화대책’이 발표됐다. 건전한 국민생활과 사회기풍 확립이 명분이었지만 정치색이 짙었다.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송창식의 《고래사냥》, 양희은의 《아침이슬》 등 188곡이 저속·퇴폐 등의 이유로 금지됐다. 대신 ‘건전가요합창 경연대회’가 각지에서 열렸다. 민주화운동은 가요계에도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1987년 8월 문화공보부는 국내 금지곡 382곡 중 월북 작가 작품 88곡을 제외한 294곡에 대한 재심에 착수, 186곡을 해금했다. 이어 1988년에는 납북·월북 음악가 63명의 작품도 규제에서 풀었다. 

ⓒ한국대중음악박물관
2015년 4월25일 문을 연 경북 경주시 보문단지 내 한국대중음악박물관 ⓒ한국대중음악박물관

유충희 관장, 사비 털어 박물관 지어

대중가요사의 1990년대는 《난 알아요》의 서태지와 아이들을 필두로 새로운 장르가 펼쳐졌다. 신세대문화가 바람을 타고 있었고, 이념대립과 냉전시대가 종말을 맞은 시기와 맞물리면서 댄스뮤직이 급부상했다. 듀스의 《나를 돌아봐》, 룰라의 《날개 잃은 천사》, 김건모의 《핑계》 등은 율동과 가사, 형식이 파격적이었다. 언더그라운드도 이 시대를 견인했다. 강산에와 공일오비는 세상에 대한 발언 수위를 높여갔다. 김현철, 이소라, 패닉 등은 대중가요에 자신의 음악적 실험을 여과 없이 투영했다. 

2000년대 인터넷의 급속한 보급은 음반시대의 종말을 예고했다. 대중가요 전달매체가 음반에서 음원으로 바뀌면서 음반산업은 붕괴됐다. 그런데 당시 한국 대중가요는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만났다. K팝이 인터넷을 타고 세계로 퍼졌다. 2012년 소녀시대와 원드걸스가 세계 진출에 성공했다. 싸이의 《강남 스타일》은 한국대중가요 사상 최초로 빌보드 순위 2위에 올랐고, 2018년 5월에는 BTS가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했다. 블랙핑크도 최근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37개 지역 아이튠즈 송 차트 1위를 기록했다. 뉴진스와 르세라핌, 피프티피프티 등 신생 걸그룹도 세계 음악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2015년 문을 연 한국대중음악박물관에는 시대를 담은 앨범과 함께 원통형 유성기(축음기), 세계에 하나뿐인 오디오, 무성영화 시절의 음향기기, 국내 유명 작곡가·작사가·가수들의 의상, 육필악보, 생생한 육성 등 다양한 자료가 전시돼 있다. 유충희 관장은 우리 가요 역사를 보존하고 K팝의 진정한 가치를 세계에 알리고자 사비를 털어 박물관을 지었다. 그는 “지금도 ‘수집병’에 걸려 있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박물관 3층 소리예술과학관에서는 국내 희귀 음반들을 웨스턴일렉트릭 사운드로 들을 수 있다. 이곳에서 시대를 풍미했던 노래를 감상하며 어제의 추억을 떠올리고 내일의 희망가를 마음속으로 불러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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