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수치심’ 다시 생각하기 [김동진의 다른 시선]
  • 김동진 페페연구소 대표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5.28 16:05
  • 호수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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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의 불쾌감·무서움은 수치심 아니란 이유로 무죄 판결 나와
성폭력 사건 판단 기준, 새로운 개념과 정의 필요

5월13일, 10대 여학생에게 성희롱을 한 60대 남성이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사건이 보도되었다. 60대 남성 A씨는 2021년 4월 경남 사천의 한 공원에서 당시 피해 여학생 B양에게 5만원권 지폐 한 장을 보여주며 “너는 몸매가 예쁘고, 키 크고 예쁘니까 준다. 맛있는 거 사 먹어라. 아니면 사줄 테니 따라와라”는 등의 말을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A씨는 1심에서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1년, 성폭력 치료 강의 40시간 수강, 3년간 아동 관련 기관 취업제한 등의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창원지법 2심 재판부는 원심을 깨고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피해자인 B양이 A씨의 말에 “기분 나쁘고 무서웠다. 몸매 이야기를 했을 때 불쾌감을 느꼈다”고 한 진술에서 드러난 불쾌감과 무서움은 성적 수치심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짤막한 위 뉴스를 읽었을 뿐인데, 필자에게는 20년도 더 전에 겪었던 길거리 성희롱의 느낌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대학생 시절, 귀가하던 버스에서 어떤 허름한 차림의 나이 든 남성이 필자를 따라 내렸다. 그 버스정류장 주변은 늘 인적이 드문 곳이었고, 그때도 그 남성과 나를 제외하고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불안감을 안고 집으로 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횡단보도 앞에 대기하려고 서자 그는 나를 노려보며 나에게 바싹 다가와 ‘야, 너 나한테 먹히고 싶어?!’라고 위협하듯 말했다. 그 순간 필자가 느낀 것은 수치심이 아니라 공포감이었다. 아무도 없는 캄캄한 이곳에서 정말로 내가 강간당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극도의 공포감.

다행히 곧 도착한 버스에서 내린 한 양복 입은 남성이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필자 옆에 와서 괜찮으냐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횡단보도가 파란불로 바뀌자 그 허름한 남자는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그 직장인 남성과 함께 횡단보도를 건넌 후 필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까지 그야말로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때 그 사건에서 필자가 느꼈던 감정을 돌이켜보면 공포감이다. 불쾌하기도 했고 화도 났지만 불쾌감이나 화는 공포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후에 나중에 따라왔다.

ⓒ일러스트 김세중

수치심은 피해자 아닌 가해자가 가져야 하는 감정 

현재 ‘성적 수치심’ 용어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하 ‘성폭력처벌법’) 등에서 성폭력범죄자의 처벌 기준으로 사용되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수치’란 ‘다른 사람들을 볼 낯이 없거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함. 또는 그런 일’이고, ‘수치심’은 ‘수치를 느끼는 마음이다’. 이 정의와 법령에 따르면, 자신의 성폭력 피해를 법적으로 인정받고 가해자에게 합당한 법적 처벌을 하기 위해 피해자는 ‘성적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 그런데 성폭력 피해자는 피해를 경험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들을 볼 낯이 없어야 하는 걸까. 위 사건의 피해자인, 아마도 날씨 좋은 날 공원에 놀러 갔을 어린 B양은 어딘가에서 갑자기 나타난 60대 남성으로부터 ‘넌 몸매가 예쁘고 키가 크니까 돈 줄게 따라와라’라는 말을 들었다는 이유로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다고 느껴야 하는 걸까. 

이 사전적 정의에서 한발 더 나아간 심리학용어사전에서는 ‘수치심’을 ‘부끄러움을 느끼는 마음. 더 깊게 들어가면 자신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가치가 없다는 것이 바깥에 드러날 것 같은 그러한 감정’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위에 제시한 필자의 사례에서 필자가 만일 그 가해자를 특정해 법적 처벌을 받게 하고자 했다면, 필자는 어느 날 갑자기 길거리 성희롱을 당했다는 이유로 나 자신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가치가 없다는’ 느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준이 과연 성폭력을 판단하는 타당한 기준일까. 또한 ‘수치심’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가 가져야 하는 감정이 아닌가. 

 

성적 피해 후 감정, ‘불쾌’ ‘화’ ‘역겨움’ ‘짜증’ 순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에서 2021년에 503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여성들이 성폭력 혹은 성적 괴롭힘 피해 이후에 경험한 감정 중 가장 높은 응답을 받은 것은 ‘불쾌’였다. 해당 감정을 3개까지 골라보라는 질문에 1위를 차지한 ‘불쾌’감에 이어 ‘화’ ‘역겨움’ ‘짜증’ ‘분노’가 각각 그다음 순위를 차례로 차지했다. 필자가 경험했던 ‘두려움’과 ‘공포’도 각각 10위, 13위였다. 그러나 성폭력특별법에 포함되어 있는 용어인 ‘성적 수치심’과 관련된 ‘수치심’과 ‘부끄러움’은 각각 41위, 51위에 그쳤다. 사실상 ‘성적 수치심’으로 통칭되는 감정은 실제로 여성들이 성폭력 피해를 당했을 때의 경험과 거리가 조금 멀다는 얘기다. 

또한 수치심을 느낀 사람들은 사건 당시보다는 해당 사건을 주변에 이야기했을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 즉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하거나 피해자를 비난하는 등의 부정적 피드백으로 인해 느꼈다고 응답했다. 결국 성적 수치심이란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에게서 원인을 찾으려 하는 뿌리 깊은 성차별적 문화가 우리 사회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생겨나는 감정일 수도 있다. 

성폭력 사건은 그 맥락과 형태 등이 매우 다양하기에, 혹자는 위에서 언급한 두 사례 모두에서 실제로 강간을 당한 것도 아닌데 너무 예민한 것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적으로 평온한 상태란 매우 유약하고 섬세하며 다면적이어서 신체 접촉뿐 아니라 생각, 충동, 의도의 표현만으로도 훼손된다. 꼭 강제적 신체 접촉을 하지 않더라도 눈빛, 작은 움직임, 말로도 성적 안전감은 파괴될 수 있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 (피해자는) 정신적 차원에서 성적으로 침범당한다(레이첼 모랜의 《페이드 포》). 

우리에게는 성폭력 사건의 판단 기준으로 ‘성적 수치심’을 넘어서는 새로운 개념과 정의가 필요하다. 먼저 피해자의 감정을 판단 기준에 포함시켜야 한다면 ‘수치심’만으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맥락의 성폭력 사건 속에서 피해자가 실제로 느끼는 다양한 감정을 모두 수면 위로 올리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또한 더 나아가 판단의 기준을 피해자의 감정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가해자의 행위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지난해 3월, 법무부의 ‘디지털성범죄 등 전문위원회’는 성범죄 처벌법령상 부적절한 용어를 개정하자는 권고안을 이미 발표한 바 있다. 해당 권고안은 성폭력처벌법에서 ‘성적 수치심’을 ‘사람의 신체를 성적 대상으로 하는’으로 바꾸자는 제안을 해서 법적 판단 기준을 피해자의 감정이 아닌 가해자의 행위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관련 법 개정은 아직도 계속 논의 중이고, 그런 가운데 위 사례와 같이 피해자가 ‘성적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해자에게 무죄 판결이 나온 것이다. 사회적 논의는 이미 이루어지고 있으니 조속한 법 개정을 통해 우리 사회가 성평등한 사회로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기를 바란다. 

김동진 페페연구소 대표
김동진 페페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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