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튼 ‘대통령 리더십’ 드라마, 인간의 향기 묻어나는 접근법에 인파 몰려
  •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 (cj0208@hanmail.net)
  • 승인 2023.06.09 13:05
  • 호수 175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통합적·중도적 역사관 돋보인 역대 대통령 12명 소장품 특별전
‘이승만 타자기’ ‘박정희 쌍안경’ ‘노무현 독서대’ 등에 얽힌 얘기들

파격적인 대통령 리더십 드라마인가? 야심 찬 권력문화의 개편작업인가? 지금 용산이 아니라 청와대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아니라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들을 몽땅 소개하는 독특한 문화행사가 열리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청와대 개방 1주년을 맞아 6월1일부터 8월28일까지 특별전시회를 개최하면서 초대 이승만 전 대통령부터 직전 문재인 전 대통령까지 역대 대통령 12명의 삶과 리더십을 보여주는 소품과 글과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동시에 대통령 집무실과 영부인실을 비롯해 청와대 곳곳을 원래대로 복원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왜 이런 행사가 열리는 것일까? 일단 반응이 뜨거워 관람객들이 평일에도 줄을 잇고 피크타임 때는 청와대 본관 앞에 관람객이 200m가량 길게 늘어서 있다. 대통령 리더십을 전문적으로 연구해온 필자의 관점에서 이번 행사는 확실히 차별성이 있고 획기적이다.

무엇보다 ‘통합적-중도적 역사관’이 돋보인다. 과거 어느 정부도 대통령들의 과오를 지적하지 않고 골고루 호의적으로 보여준 전시회는 없었다. 가뜩이나 민감한 시기에 보수정부에서 ‘박정희의 쌍안경’과 ‘전두환의 무궁화 모자’ ‘문재인의 호랑이 그림’을 똑같이 다루다가 정치적 논란에 휘말릴 수도 있다. 이번 행사를 총괄 지휘한 박보균 문체부 장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청와대 본관 ‘우리 대통령들의 이야기’에 전시 중인 역대 영부인들의 초상화 ⓒ시사저널 이종현
청와대 본관 ‘우리 대통령들의 이야기’에 전시 중인 역대 영부인들의 초상화 ⓒ시사저널 이종현

청와대 개방 1주년 기념…8월28일까지 전시

“이제 우리도 실패의 역사관, 자학적인 역사관에서 벗어나 긍정의 역사관, 따뜻한 역사관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 대통령들이 정상에서 고뇌하고 결단을 내리던 순간을 보여줄 수 있도록 준비했다. 대통령의 공과를 다루는 기존의 전시 방식을 벗어나 스토리텔링을 통해 예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방식으로 우리 대통령들을 접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래서 이번 행사는 철저하게 비정치적이고 인간적으로 접근했다고 한다. 앞으로도 청와대의 문화예술복합공간화, K-관광랜드마크화를 향해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진행해 나갈 예정이다. 여기엔 청와대를 국민의 품으로 완벽하게 돌려주겠다는 윤 대통령의 의지가 담겨 있다는 것이 박 장관의 설명이다.

이번 전시회에서 돋보이는 것은 ‘대통령들의 상징물’이다. 기존의 전시회가 단순한 진열이었다면, 이번에는 대통령들의 삶과 리더십을 콕콕 짚어주는 상징물을 절묘하게 골랐다. 박보균 장관은 “대통령들의 리더십 드라마에 딱 들어맞고 은유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상징 소품을 골랐다”면서 “무겁고 가르치려고 하는 콘셉트가 아니라 쉽고 재밌고 친근하게 접근하는 콘셉트”라고 말했다.

ⓒ시사저널 이종현·문화체육관광부 제공 ·최진 원장 제공
이승만의 타자기 ⓒ시사저널 이종현·문화체육관광부 제공·최진 원장 제공

이승만 대통령 하면 오랜 해외생활과 대미외교가 금방 떠오른다. 그가 사용했던 대한제국 시절의 여권과 타자기가 청와대 전시장에 있었다. 이 타자기는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윌슨-프랭클린 루스벨트-트루먼-아이젠하워 5명의 대통령에게 보내는 외교문서를 작성할 때 속기사 자격증까지 갖고 있는 프란체스카 여사와 공동으로 사용한 ‘비밀병기’였다.

박정희 대통령과 아들 박지만씨의 고교 시절 사진 ⓒ시사저널 이종현
박정희 대통령과 아들 박지만씨의 고교 시절 사진 ⓒ시사저널 이종현
ⓒ시사저널 이종현·문화체육관광부 제공 ·최진 원장 제공
김대중의 옥중 편지 ⓒ시사저널 이종현·문화체육관광부 제공·최진 원장 제공

김대중의 화초용 가위, 기타 치는 박근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소품으로는 ‘방울이’와 ‘드로잉 수첩’이 눈길을 끌었다. 어린 박근혜가 유난히 예뻐하고 일기장에 ‘나의 첫사랑’이라고 적었던 반려견 방울이를 아버지가 연필로 드로잉한 그림이었다. 박 전 대통령이 국토개발 현장에서 사용했던 쌍안경과 드로잉 수첩과 카메라는 처음 공개된 소품이었다. 경부고속도로 설계도를 그렸던, 볼펜이 3개나 꽂혀 있는 하늘색 드로잉 수첩은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고교생 아들’ 박지만의 모자를 고쳐주는 장면이 담긴 사진은 다정한 부정(父情)과 함께 강직한 군인 스타일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 같다.

ⓒ시사저널 이종현·문화체육관광부 제공 ·최진 원장 제공
박정희의 쌍안경 ⓒ시사저널 이종현·문화체육관광부 제공·최진 원장 제공
기타 치는 박근혜 ⓒ시사저널 이종현·문화체육관광부 제공·최진 원장 제공

조금 떨어져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 코너에는 수필가로 문단에 데뷔한 그가 40세 때 꼼꼼하게 자신의 심경을 써내려간 노트의 사본이 있었다. 1991년 12월9일자엔 “자기 마음을 살펴보고 흠잡을 데가 없으면 무엇을 근심하고 두려워하겠는가?”라고 쓰인 글씨가 보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비운의 삶을 잊으려는 듯, 애창곡도 《빙고》 《천생연분》처럼 밝고 경쾌한 노래를 즐겨 불렀는데, 전시장에는 웃으며 기타를 치는 사진이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고통이 닥칠 때마다 화초를 벗삼아 대화하고 가꾸며 견뎌냈지만 분재는 식물에게 고통을 준다며 싫어했다. 대통령이 된 후에는 미래 먹거리를 위해 IT 강국의 초석을 다졌다. 당시 손때 묻은 화초용 가위와 방한한 빌 게이츠에게 선물받은 핸드폰이 진열돼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오른쪽)과 빌 게이츠. 아래는 선물받은 휴대폰 ⓒ최진 원장 제공
김영삼의 휘호
김영삼의 휘호 ⓒ시사저널 이종현·문화체육관광부 제공·최진 원장 제공

김영삼의 ‘大道無門’, 노태우의 퉁소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조깅은 건강관리 차원을 넘어 결단의 의식이었고 때로는 해외 정상들과의 친교 수단이었다. 야당 시절 조깅을 할 때는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암송하며 달렸고, 금융실명제를 발표하던 날 아침에는 평소보다 2배 빠르게 달렸다고 한다. 그때 신었던 낡은 조깅화가 청와대에 있다. 방한 중이던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YS에게 ‘대도무문(大道無門)’의 뜻을 묻자 곁에 있던 박진 통역비서관(현 외교부 장관)이 “큰길에는 문이 없다”(A high street has no main gate)라고 설명하자 클린턴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이처럼 역대 대통령들의 삶과 리더십을 소품 몇 개로 흥미진진하게 보여주는 전시회는 드물다. 특히 각 코너마다 350자 내외로 간결하고도 감성적인 문체로 설명해 놓은 안내판이 있는데, 이는 기자 시절 단문형 문체를 즐겨 구사했던 박보균 장관의 작품일 것이다. 박 장관은 “역대 대통령들의 스토리텔링이 은근하면서도 긴박한 느낌을 주도록 언어 선택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가봤어?” “해봤어?”로 유명한 CEO 출신의 이명박 전 대통령은 과거 종로 지역구와 청와대 경내는 물론 4대 강 현장도 자전거를 타고 살펴봤다고 한다. 현대 시절부터 즐겨 쳤던 테니스 실력은 선수 수준이다. 넓은 청와대 집무실을 보면서 ‘여기서 테니스 쳐도 되겠다’고 말한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자전거 헬멧과 테니스 라켓이 진열돼 있었다.

이명박의 테니스 라켓
이명박의 테니스 라켓 ⓒ시사저널 이종현·문화체육관광부 제공·최진 원장 제공

이명박의 라켓과 문재인의 호랑이

노무현 코너에서는 독서대가 눈에 띄었다. 권양숙 여사가 독서대 2개를 흔쾌히 기증해 주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작은 체구에 머리가 비상해 ‘돌콩’ ‘노천재’로 불렸던 노 전 대통령이 고시 공부를 하면서 누워서도 책을 볼 수 있도록 ‘개량 독서대’를 개발해 특허등록까지 했는데, 이는 매사에 문제가 생기면 우회하지 않고 정면 돌파하는 노무현 스타일을 보여주는 것이다.

노무현의 독서대
노무현의 독서대 ⓒ시사저널 이종현·문화체육관광부 제공·최진 원장 제공

문재인 전 대통령은 히말라야를 네 번이나 등반한 것을 자랑스럽게 얘기하곤 했는데, 등산용 스틱이 진열돼 있었다. 이름에 호랑이 인(寅)이 들어있는 문재인 전 대통령은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퇴임한 후에도 포효하듯 정치적 목소리를 내고 있다. 공교롭게도 트럼프 전 대통령으로부터 선물받은 앤디 워홀의 판화 《시베리아 호랑이》가 걸려 있었다. 이 소품에 문심(文心)이 있을까?

ⓒ시사저널 이종현·문화체육관광부 제공 ·최진 원장 제공
문재인이 선물받은 앤디 워홀 작품(호랑이) ⓒ시사저널 이종현·문화체육관광부 제공·최진 원장 제공

노태우 전 대통령은 휘파람과 노래를 아주 잘 불렀고 하모니카, 피리, 단소, 트럼펫, 작은북, 퉁소 등 6가지 악기를 다룰 줄 알았다. 그는 7세 때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그리울 때마다 아버지의 유품인 퉁소를 꺼내 불었다. 그 퉁소 3개가 진열돼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은 연희동 집 정원에 꽃 대신 사과나무를 심었는데, 이는 순간의 화려함보다 실리의 결과를 추구하는 노태우 리더십의 특징이며, 이것이 훗날 실용적인 북방외교의 성과로 이어졌다고 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대구공고 시절 축구와 권투를 유난히 좋아했다. 권투 글러브를 어깨에 메고 다니기도 했던 그는 훗날 WBC(세계권투평의회) 서울 총회를 개최해 1986년 아시안게임 때는 복싱 12체급 전 종목 금메달을 석권했다. 당시에 시축했던 축구공과 권투협회에서 받은 기념패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시사저널 이종현·문화체육관광부 제공 ·최진 원장 제공
노태우의 퉁소 ⓒ시사저널 이종현·문화체육관광부 제공·최진 원장 제공

이 외에도 영국 신사라는 별명을 가졌던 윤보선 전 대통령의 영국 스타일 중절모자와 커다란 드렁크, 최규하 전 대통령의 검소함을 상징하는 연탄난로와 중동외교의 작은 성과물도 있었다. 이번 전시장에는 또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노재헌씨가 깜짝 방문해 관람객들에게 소품에 대해 직접 설명해 시선을 끌기도 했다.

ⓒ시사저널 이종현
6월5일 청와대 본관 세종실과 인왕실의 역대 대통령 소장품 특별 전시회를 찾은 관람객들 ⓒ시사저널 이종현

박보균 장관 “모든 대통령에게 따뜻한 눈길을”

“대한민국을 이끌어나갈 젊은 미래 세대가 우리 대통령들 모두에 대해 따뜻한 눈길과 호기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박보균 장관과 인터뷰한 내용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가슴에 와닿는 말이었다. 요즘처럼 정치도 갈라지고 대통령들도 갈라지면 미래 세대의 희망이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문화적인 접근방식을 동원해서라도 통합과 탕평의 묘를 발휘해 주기 바란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경찰과 군인, 경호원들이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던 청와대가 이렇게 단기간에 활짝 열릴 수 있다는 것을 정치에서도 보여주기 바란다. 국민 속의 청와대도 중요하지만 국민 속의 국회와 국민 속의 대통령은 더더욱 중요하다. 이번 청와대 대통령 전시회의 문화바람이 여의도를 비롯해 사회 전반으로 전파되기를 바란다.

청와대의 역대 대통령 특별전은 구중궁궐처럼 어둡고 무서웠던 과거 이미지를 활짝 열린 문화공간으로, 밝고 가볍게 바꾸는 기획의 일환이다. 문체부는 ‘청와대답게, 살아 숨 쉬게, 국민 속 더 깊게’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박보균 장관은 “대표적인 권력의 공간을 국민들께 돌려드리고 문화예술로 채우는 것, 이게 권력문화의 변화이며 제왕적 정치와 결별하겠다는 윤 대통령의 결단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