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애인이 멘 ‘특권 배낭’은 정당한가 [김동진의 다른 시선]
  • 김동진 페페연구소 대표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10.08 15:05
  • 호수 1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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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게 누리는 일상, 장애인은 누릴 수 없어
모든 교통약자를 포괄하는 정책 필요

민족의 대이동이 있었던 추석 연휴, 그것도 평소보다 훨씬 길었던 6일간의 휴일이 지나갔다. 필자는 서울의 집에서 지방 중소도시의 시가에 갈 때는 가족과 함께 자차를 이용했고, 친척들과 더 시간을 보내다 돌아올 배우자를 뒤로하고 먼저 귀가하는 길에는 KTX 매진으로 시외고속버스와 서울시 지하철을 이용했다. 이렇게 지방에서 서울까지, 또 서울에서도 터미널에서 집까지 이동할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데 아무 문제나 불편이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상상을 해보았다. 만일 내가 김씨라는 이유만으로 시외버스를 이용할 수 없다면 어떨까? 표가 매진되어 못 타는 게 아니라, KTX에는 한 열차에 단 2명의 김씨만 탈 수 있고, 이미 다른 김씨 2명이 예약했기 때문에 내가 KTX에 탈 수 없다면? 이에 더해, 김씨가 사용할 수 있는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가 모든 지하철역에 설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집과 가까운 지하철역에서 내리지 못하고 다른 역에 내려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면 어떨까?

황당하게 들리는 이 모든 일이 사실상 장애인들의 일상이다. KTX에는 한 열차당 대략 두 좌석 정도만 전동휠체어 이용자를 위한 좌석이 있다. 세상의 수많은 전동휠체어 이용자 중 나보다 먼저 2명이 해당 열차를 예매한다면, 나에게 그 열차를 탈 기회는 없는 것이다.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로 갈 수가 없다. 수동휠체어용 좌석은 몇 개 더 있다. 그런데 휠체어용 좌석에는 좌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휠체어 고정장치만 있으므로 비장애인 승객들이 이를 비어있는 공간으로 착각하고 짐을 놔두기도 한다. 장애인 좌석이라는 안내 표지는 조그맣게 붙어있다. 또는 애써 휠체어석을 구매했으나 일반인 입석 승객이 너무 많아 휠체어가 지나갈 수 없다는 이유로 현장에서 탑승을 거부당한 사례도 있다.

고령의 장애인이 간병인의 도움을 받으며 지하철을 이용해 이동하고 있다. ⓒ
고령의 장애인이 간병인의 도움을 받으며 지하철을 이용해 이동하고 있다. ⓒ시사저널 자료사진

비장애인은 노력해서 얻은 결과 아냐

세상에는 장애인으로 태어나고 살아가기를 선택한 사람은 없다. 위의 가상의 사례에서 필자가 김씨라는 이유로 열차에 탑승할 수 없다는 예를 든 것은 예컨대 성씨는 우리가 노력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만일 비장애인이라면 이는 노력해 얻은 것이 아니다. 그저 타고난 것 혹은 운이 좋았던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학자인 페기 매킨토시는 1989년 ‘백인 특권’이라는 논문으로 유명해진 바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종차별주의가 만연한 이 사회에서 백인으로 산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배낭을 등에 메고 살고 있는 것과 같다. 특권이란 배낭 안에는 지도, 여권, 비자, 각종 의류, 도구, 심지어 백지수표 같은 특별한 혜택이 들어있는데, 이 배낭은 눈에 보이지도 않으며 무게도 느껴지지 않기에 배낭을 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잊어버린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는 일상생활 속 백인의 특권으로 26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예컨대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된다.

‘나는 텔레비전을 켜거나 신문을 펼쳐서 나와 같은 인종의 사람들이 널리 소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미행이나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대체로 혼자 쇼핑하러 갈 수 있다’ ‘나는 책임자와 대화를 요청하면 같은 인종의 사람과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선택한 장소에서 나와 같은 인종의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거나 학대받을 것이라는 두려움 없이 공공 숙박시설을 선택할 수 있다’. 백인 페미니스트 학자인 페기 매킨토시는 여성으로서 남성 특권에 대해 생각하는 과정에서 백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다가 이 같은 논문을 쓰기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사례는 미국 사회에서 백인이라면 마치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하게 누리는 일상의 일들이지만, 흑인이나 다른 소수인종들은 누릴 수 없는 것들이다.

이를 장애인에 대비해 생각해 본다면 아마도 ‘비장애인 특권’은 다음과 같은 것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첫째, 나는 장애인용 좌석이나 엘리베이터 등이 있을지 걱정하거나 알아보지 않고도 쉽게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다. 둘째, 나는 지하철을 탈 때 계단·에스컬레이터·리프트 중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선택해 사용할 수 있다. 셋째, 나는 복잡한 지하철 및 버스 환승 과정에서 타인의 도움 없이 스스로 원활하게 이동할 수 있다. 넷째, 나는 시외버스터미널이나 기차역에서 특별한 안내나 도움을 찾아볼 필요가 없다. 다섯째, 나는 집 밖의 공공장소에서 화장실 이용 시 장애인용 화장실을 찾는 추가적인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여섯째, 나는 경사로가 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음식점이나 카페를 이용할 수 있다. 일곱째, 나는 영화관이나 공연장에서 특별한 좌석을 예약하지 않고 원하는 위치에서 관람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비장애인으로서의 특권 목록은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는 다양한 종류의 장애 중에서 휠체어를 사용해야 하는 지체장애인의 이동을 염두에 둔 것이다. 예컨대 시청각장애인 관점에서라면 또 다른 목록들이 생겨날 것이다.

 

415명이 활동하고 있는 ‘계단뿌셔클럽ʼ

2021년 4월부터 활동을 시작한 비영리단체인 ‘계단뿌셔클럽’은 동네의 각종 가게들(음식점·카페·마트 등)의 휠체어용 경사로와 엘리베이터의 유무 및 계단 현황을 조사해 지도에 표시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휠체어 이용자인 장애인 당사자와 비장애인 동료가 함께 만들었다. 비장애인인 이대호 대표는 장애인인 박수빈 대표와 함께 식당에 가다가 자신이 그동안 경험하지 않았던 많은 제약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박 대표의 “그저 어디에 갈 수 있는지 아닌지만 알아도 좋겠다”는 말에 착안해 해당 단체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415명의 멤버가 지역별로 다니며 계단 지도를 만들고 있다. 이런 정보는 비단 장애인뿐 아니라 노화로 인한 질병 등으로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들과 영유아를 양육하는 유아차 이용자에게도 도움이 된다.

대중교통수단도 마찬가지다. 모든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시내버스 및 시외버스를 휠체어 이용자가 탑승 가능하도록 한다면, 영유아를 태운 유아차도 어디든 쉽게 이동 가능할 수 있어 자연스레 출산장려 정책이 될 것이다. 또한 노화로 인한 질병 등으로 인해 휠체어를 이용해야 하는 고령층을 위한 정책이기도 할 것이다. 결국 휠체어 탑승 장애인을 위한 도시 디자인 및 정책의 혜택은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돌아올 것이다.

매년 돌아오는 명절인 추석에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는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시위를 했다. 비장애인으로서 보이지 않는 특권 배낭을 메고 살았던 필자는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에 이어 이번에도 역시, 그동안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들이 탈 수 있는 시외버스가 없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어 스스로 부끄러워졌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당연한 일을 하지 않았음을, 우리 모두 보이지 않는 특권 배낭을 메고 살았음을 인정해야 한다. 당연한 요구를 더 이상 ‘시위’로 바라보지 말고, 모든 교통약자를 포괄하는 정책을 지금부터라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다음 명절에는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시외버스로 고향에 갈 권리를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김동진 페페연구소 대표
김동진 페페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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