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잠 깨우고 떨쳐 일어난 ‘R세대’의 돌진
  • 김정명│건국대학교 중동연구소 연구교수·김회권 기? ()
  • 승인 2011.02.28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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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권에서 타오른 민주화의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거세게 번지고 있다. 그 중심에는 자신들이 처한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찬 젊은 ‘혁명 세대’가 자리 잡고 있다. 높은 실업률과 권위적인 정부에 저항하는 그들의 함성은 정치 체제 변혁 요구로 이어지고 있다. 오랫동안 숨죽이고 있던 그들이 이렇게 활화산처럼 폭발한 배경에는 디지털 미디어의 위력도 한몫하고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젊은 층의 인구가 많은 아랍권에 변혁의 핵으로 떠오른 ‘R세대’의 실체와 힘의 원천을 추적했다.

 지난 2월22일,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가 갈색 터번과 겉옷을 걸친 채 선글라스를 쓰고 카메라 앞에 섰다. 그는 1986년 미국의 리비아 공습 때는 불타버린 건물을 회견 장소로 택했다. 그의 입에서는 격정적인 단어들이 쏟아졌다. 시위대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고 자신은 결사 항전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는 시위대를 ‘약에 취한 젊은이들’로 단정했다. 카다피는 “쥐 떼와 같이 나라를 휩쓴 그들(젊은이들)을 잡아야 한다”라며 거리에 쏟아져나온 리비아 청년들에게로 총구를 돌렸다.

 카다피가 연설을 하던 그때, 이미 거리에서는 6백여 명의 리비아 청년이 목숨을 잃었다. 외신들은 수도 트리폴리를 아비규환과 학살의 현장으로, 또는 유령의 도시로 묘사했다. 하지만 공포보다 항쟁의 젊은 기운이 더욱 강했다. 이들은 42년 절대 권력의 소유자를 타도하기 위해 전세계에 도움을 요청했다. 한 청년은 “국제 사회가 리비아에 지원을 해달라”라고 화면을 보며 절규했고, 다른 청년은 카다피의 초상화를 불태우는 화면을 촬영해 자신들의 투쟁 의지가 꺾이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동부 벵가지의 젊은이들은 아예 도시를 접수했다. 카다피는 1969년 무혈 혁명에 성공한 뒤 왕정 시절 수도였던 이곳에서 트리폴리로 수도를 옮겼다. 트리폴리는 점점 발전했지만 벵가지는 상대적으로 낙후되어갔다. 리비아의 외환보유액은 9백25억 달러에 달하고 1인당 국민소득도 1만2천 달러가 넘는다. 하지만 그 수혜는 트리폴리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리비아의 젊은이들은 중학교까지 의무 교육을 받는다. 교육 수준도 높은 편이지만 이들은 항상 먹고사는 문제와 부족한 일자리 때문에 고민했다. 리비아 전체 인구 중에서 30세 미만이 차지하는 비중은 58%에 이른다. 하지만 이들이 일할 곳은 석유 관련 산업이나 농업 정도에 불과하다. 그나마 그런 기회도 트리폴리 주변에 집중되어 있다. 벵가지의 젊은이들이 폭발적으로 분노한 배경이다. 하지만 리비아 전체로 놓고 보아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2010년 기준 전체 실업률은 무려 30%에 달한다.

 학살에도 굴하지 않는 성난 리비아 젊은이들은 아랍권의 전체적인 모습을 대표하고 있다. 정권이 무너진 이집트와 튀니지가 그랬고 예멘과 모로코 등도 그랬다. 시위대의 중심에는 30세 미만의 젊은이들이 자리 잡고 있다. 권위에 굴복했던 역사를 뒤집어 권력에 도전하는 이른바 ‘혁명(Revolution) 세대’가 아랍 전역에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했다.

  과거에도 중동 지역에서는 급격한 정권 교체나 혁명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역사상 최초로 종교, 종파, 정파를 초월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주도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좌절을 딛고 일어서고자 하는 젊은 청년층과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대변되는 디지털 매체가 있다.

 튀니지 민주 혁명의 바람은 26세의 모하메드 부아지지라는 한 젊은이가 지난해 12월17일 온몸에 기름을 붓고 분신자살하면서 촉발되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변변한 직장을 얻을 수 없어서 청과물을 파는 노점상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단속 공무원들이 나타나 그에게 무허가 영업을 한다며 뇌물을 요구했다. 그가 요구를 거부하자, 단속원들은 그의 뺨을 때리고 채소, 과일, 저울 등을 모조리 압수했다. 생계가 막막했던 부아지지는 눈앞이 캄캄했다. 그는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기 위해 시 당국에 찾아갔으나 허사였다. 다급해진 그는 도지사를 만나러 갔지만, 경찰의 제지로 건물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아무도 그의 딱한 사정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자살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통해 자신의 억울함을 알리고자 했다.

 부아지지의 소식을 접한 튀니지의 젊은이들은 분개했다. 그리고 그들은 인터넷과 모바일폰을 통해 부아지지의 안타까운 죽음을 알리기 시작했고, 이는 금세 반정부 시위로 발전했다. 그들은 실업 문제 해소, 식료품 가격 안정, 표현의 자유 등 시민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기본 권리를 부르짖었다.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이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벤 알리 대통령은 내무부장관을 경질하고 30만개의 일자리 창출을 약속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 리비아 벵가지에 모인 청년 시위대의 모습. 벵가지는 반카다피 시위가 가장 거셌던 곳이다. 이 사진은 벵가지에 있던 한 개인이 찍은 사진이다. ⓒAP연합


깨어진 ‘사회적 협약’에 대한 분노

 무바라크를 퇴진시키는 데 성공한 이집트 민주화 과정에서는 젊은이들 사이에 영웅으로 떠오른 인물이 있다. 와일 고님이라는 30세의 이집트 청년이다. 그는 아랍에미리트연합(UAE)에 있는 구글 사에서 마케팅 임원으로 일하던 평범한 젊은이였다. 고님이 투사가 된 계기는 인터넷을 통해 한 이집트 청년의 참혹한 죽음 소식을 접하면서부터다. 2010년 6월, 이집트 제2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칼리드 사이드라는 한 청년이 경찰에 구속되었다가 가혹 행위로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경찰은 그가 마약 중독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죽은 그의 얼굴은 완전히 짓이겨져 있었고 치아는 절반가량이 부서져 있었다. 와일 고님은 이집트 경찰에 의해 자행된 잔혹한 고문의 실태를 고발하기 위해 페이스북에 그를 추모하기 위한 페이지를 만들고 ‘우리 모두가 칼리드 사이드다’라고 제목을 붙였다.

 와일 고님이 만든 페이스북은 삽시간에 이집트의 젊은 네티즌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그의 용기 있는 작은 행동이 이집트 젊은이들을 하나로 결집시킨 구심체가 된 것이다. 그 와중에 이웃 국가 튀니지에서 민주화 운동이 성공하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다. 와일 고님은 페이스북을 통해 “튀니지도 해냈는데 왜 이집트가 못하겠느냐?”라며 독려하기 시작했다. 그는 회사측에 개인적 사정을 핑계로 휴가를 내고 주저 없이 두바이에서 이집트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와일 고님은 곧바로 이집트 경찰에 연행되어 12일 동안 구금되었다. 그가 경찰에서 풀려난 후 2월7일 TV와 인터뷰를 가졌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이 희생을 치르고 승리를 목전에 둔 상태였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그는 시위에 동참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저는 영웅이 아닙니다. 12일 동안 잠만 잤을 뿐입니다. 영웅은 거리에서 목숨을 걸고 시위에 참석했던 여러분들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것은 인터넷을 사용하는 젊은이들의 혁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집트 젊은이 모두의 혁명이 되었고, 결국 이집트 전체의 혁명이 되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튀니지와 이집트의 사례에서 보듯이 이번 민주화 시위를 주도한 세력이 정치적 이념이나 종교적 신념에 물들지 않은 평범한 젊은이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정치학자 새무얼 헌팅턴은 저서 <문명의 충돌>에서 역사적으로 청년층에 해당하는 인구 집단이 클 경우 사회가 변혁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현재 중동 지역에서는 30세 이하 연령층이 전체 인구의 약 60%에 달한다. 이집트의 경우 29세 이하 인구 비율이 전체 인구의 61%에 달한다. 튀니지는 52%, 리비아는 58%이다. 

 문제는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젊은이들이 교육 수준은 높지만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은행(WB)에 따르면 이집트의 실업률은 8.4%이지만, 25세 미만 실업률은 28%에 달할 정도로 심각하다. 튀니지 또한 전체 실업률은 11%인 반면 청년 실업은 30%를 육박한다.

 민주화를 바라는 열망은 이런 사회적 모순과 맞닿아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의 유명 칼럼니스트 마틴 울프는 최근 칼럼에서 이집트 변혁의 한 원인으로 “젊은 인구 비율이 높은 국가에서는 제대로 된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일에 종사할 수 있다는 기대가 필요하고, 그런 경제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지적했다.

 아랍권에서 민중을 고통스럽게 하는 먹고사는 문제는 일종의 사회적 협약의 대상이다. 튀니지와 이집트 등지에서 1950~60년대 등장한 아랍사회주의 체제는 국민에게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해주겠다는 일종의 ‘협약’을 제시했다. 즉 ‘국가가 저렴한 가격으로 빵이나 설탕 등 음식을 공급한다. 교육은 무료로 해주고 대학을 졸업하면 공무원 국영 기업에서 채용해주겠다’라는 식이다. 이러한 최소한의 생활이 보장되는 대신 정치적 자유가 제한된다는 ‘암묵적인 거래’가 이루어졌고 이런 협약은 199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협약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는 없었다. 1990년대 초반부터 아랍권 국가들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조조정 계획을 받으며 경제 자유화를 추진했다. 자유화 조치를 통해 외자를 도입한 민간 부문은 발전을 거듭했지만 어느 정도 채용을 담당했던 공공 부문의 월급은 개선되지 않은 채 방대한 형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경제 자유화 조치로 경제는 성장했지만 정권과 결부된 일부 계층에게 이익이 돌아갔을 뿐, 국민 대다수에게는 그 혜택이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아랍권 국가의 젊은이 비율은 점점 늘어났지만 독재 정부나 왕정은 이들이 기대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데 무관심했다.

 국민에게 제공되던 보조금과 각종 혜택도 점점 부차적인 문제로 추락했다. 음식 보조금은 삭감되었고 국제 시장에서 곡물 가격은 상승했지만 정부는 그런 상승분을 흡수하려고 하지 않았다. 최근 아랍권에서는 빵과 설탕 등의 소매 가격이 급격하게 상승했는데 이를 방치하는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높은 상황이었다. “먹고사는 문제를 약속한 정부가 협약을 위반했다”라는 광범위한 불신은 아랍권 정부의 신뢰를 추락시켰다.

 가장 성난 세대는 청년들이었다. 과거의 젊은 층은 이런 사회적 불만을 터뜨릴 수 있는 유일한 통로를 이슬람원리주의 단체에서 찾았다. 왜냐하면 모스크는 탄압의 손길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0년대의 젊은 층은 다르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디지털 문화에 익숙하다. 현재 아랍 전체의 평균 인터넷 사용 인구는 28.3%에 달한다. 그 가운데 이집트는 21.2%, 그리고 튀니지는 34% 정도이다. 모바일폰 보급률도 적지 않다. 이집트의 경우 전체 인구 가운데 약 76.8%가 휴대전화를 소유하고 있으며, 튀니지는 전체 인구 중 약 18%가 페이스북을 사용한다. 젊은이들은 인터넷과 휴대전화 덕택에 원하는 시간에 뜻을 같이하는 친구를 만나 거리낌 없이 사회적 불만을 토로할 수 있는 ‘안전한’ 가상 공간을 만들 수 있었다.

 가상 공간은 신뢰를 잃은 정부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찼다. 만약 투표권이 있다면? 젊은이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치·경제적 환경을 조성할 수 있었지만 비민주적인 정치 환경으로 그런 기본권은 막혀 있는 상황이었다. 정치적 자유를 제한당하는 대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기로 했던 정부도 이제는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불신’과 ‘불통’의 문제가 심각하게 다가오면서 전체 체제를 종식시키려는 움직임으로 번졌다.


디지털 매체 덕에 혁명 전파 속도 매우 빨라져

 아랍권에서는 언어, 역사, 종교적 공통성 때문에 정변이나 혁명이 발생할 경우 그 영향력이 급속히 이웃 국가로 파급되는 예가 종종 있었다. 예를 들어, 1979년 초 이란에서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 혁명이 성공하자 각국의 이슬람주의자들은 크게 고무되었다. 그 결과 같은 해 11월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극단적인 와하비주의자(이슬람원리주의자)들이 메카를 점령하고, 1981년 이집트에서는 한 이슬람 과격 단체가 사다트 대통령을 암살하는 사건으로 이어졌다.

 이번 민주화 혁명의 가장 큰 특징은 과거에 비해 그 전파 속도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빨랐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그 속도에 힘을 실어준 일등 공신은 다름 아닌 인터넷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와 같은 디지털 유통 경로이다. 튀니지와 이집트의 젊은이들은 시위 장면을 휴대전화 카메라에 담아 전송했고, 이는 알 자지라와 같은 위성 채널을 통해 아랍 전역으로 생중계되었다. 그들이 블로그나 트위터, 페이스북에 올린 정보들은 국경을 초월해 모든 아랍 젊은이 사이에서 실시간으로 공유되었다. 그들은 새로운 매체를 통해 어떻게 시위를 조직하면 좋은지, 정부의 검열을 피하고 안전하게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지 등의 정보를 주고받았다. ‘재스민 혁명’이 성공한 튀니지에서 정부가 무너지는 장면은 재빠르게 퍼졌고 “무엇을 해도 변화하지 않는다”라며 자포자기하던 청년들의 의식이 변하면서 변혁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디지털 매체로 무장한 신세대 젊은이들이 독재 정권의 우민화 수단이었던 TV, 라디오, 신문 등을 무력화시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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