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 브로커 유감
  • 최재경 법무연수원 석좌교수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6.06 03:32
  • 호수 1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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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법조 브로커 문제가 논란이다. 흔히 ‘법조 브로커’라고 부르지만 그 실태는 다양하다. 브로커는 사전상 ‘상행위의 매개를 업으로 하는 사람’인데 속어로는 ‘사기적인 거간꾼’을 뜻한다. ‘법조’는 상행위가 아닌 국가적 사법작용을 맡은 곳이니 이때의 ‘브로커’는 속어의 부정적 의미를 담은 것 같다.

브로커는 인류 역사상 부단히 존재해 왔다. 하지만 스스로 어떤 제품을 생산하지 않으면서 두 쪽을 중개해 거래를 성사시키고 수수료를 받는 직업이라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중세 유럽에서 박해받던 유대인들이 주로 종사하던 직업이 고리대금업 아니면 브로커였다. 

거대한 자유시장경제 체제하에서 서로 잘 알지 못하는 경제 주체를 중개해 거래를 성사시키는 브로커는 필수적이다. 부동산 브로커(중개인) 없이 서울이 제대로 돌아가겠는가. 프라임 브로커 없이 헤지펀드나 국제 금융시장이 운영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법조 브로커는 불법이고 주기적으로 단속돼 처벌받는다. 왜 대부분 분야에서 브로커가 허용되는데 유독 ‘법조 브로커’는 금지된 것일까? 수사나 재판 등 공정성과 신뢰를 생명으로 하는 국가의 사법작용을 오염·왜곡시킬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사실 법조 브로커의 허용 여부는 형사정책의 문제이다. 우리 역사상 법조 브로커인 ‘외지부(外知部)’가 금지된 것은 조선 성종 때 경국대전 반포를 전후해서다. 

고려와 조선은 소송의 나라였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지만 양반이든 노예든 차별 없이 소송을 할 수 있었다. 노비가 양반인 주인을 상대로 소송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왕족이나 양반, 토호는 직접 법정에 나가는 것을 꺼렸고 서민들은 대부분 문맹이라 글자나 복잡한 법률 규정을 알 수 없었기에 직접 소송 수행이 어려웠다. 이런 경우 똑똑한 친척이나 노비를 시키거나 전문가를 고용해 소송했는데 이를 대송(代訟)이라 했다. 

대송하는 전문가를 ‘외지부’라 불렀는데 그 연유가 재미있다. 고려 문종 때 노비에 관한 소송을 관장하는 도관(都官)이 설치됐고 조선조에 ‘장예원(掌隷院)’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고려와 조선조에서 가장 흔한 것이 노비 소송(奴婢 訴訟)이었기에 도관의 책임자인 ‘지부사(知部事)’가 최고의 법률전문가였다. 그래서 바깥 세계의 소송 전문가를 도관지부에 빗대 ‘외지부’라 부른 것이다.
이들은 무지몽매한 서민들의 소송을 대신하거나 법률적으로 조력해서 권리를 지켜주는 등 나름의 긍정적 기능을 수행했다. 하지만 결국은 궁박한 사람들을 속여 무리한 송사를 일으키고, 법률 조문을 왜곡해서 억울한 일을 만들고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등 심각한 사회문제가 됐다. 

성종 9년(1478년) 외지부를 전면 금지하고 적발되면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 삼수·갑산의 변방으로 쫒아내는 전가사변(全家徙邊)의 형사처벌을 과했고 이 법령은 조선말까지 지속됐다. 외지부를 신고하거나 잡아온 자는 강도를 잡은 경우처럼 면포 50필의 보상금까지 지급했다니 요즘과 비슷한 느낌이다. 

우리나라에 변호사 제도가 도입된 것은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 직후였다. 고도의 전문성과 직업윤리를 갖춘 법률전문가들로 하여금 공적인 대국민 법률 서비스 업무를 전담시키려는 것이다. 외지부와 같은 법조 브로커에게 면허를 주고 감독하려는 것은 아니다. 국민들도 변호사에게 단순한 법조 브로커(중개인) 이상의 헌신과 책임을 요구하고 기대한다. 

얼마 전 미국 뉴욕의 대형 로펌이 인공지능(AI) 변호사 ‘로스(ROSS)’를 채용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로스는 주로 파산 관련 판례를 수집·분석하는 업무를 맡을 예정인데 벌써 탁월한 능력을 과시했다고 한다.

미래에 사라질 직업 중 법률가들이 우선순위에 꼽힌다는데 전문적 법률지식 이상의 법조윤리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볼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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