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도발] “일본은 더 이상 한국에 미안해하지 않는다”
  • 구민주 기자 (mjooo@sisajournal.com)
  • 승인 2019.07.15 08:00
  • 호수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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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주일대사 5인이 본 한·일 관계
反韓 여론, 외교 무능, 달라진 미국 등이 포인트

한·일 관계가 언제 좋은 적이 있었나 싶지만, 이번엔 정말 다르다. 7월1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강화 선언은 한국 정부는 물론, 일본 여론도 예상하지 못한 ‘강펀치’였다. 일본도 함께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초유의 경제 보복 조치를 단행했다. 그래서 한·일 간 역사적 특수성에 의해 반복돼 온 지난 갈등들과 이번 사태는 농도가 같지 않다. 따라서 아베의 이번 공격은 비단 근래 한두 가지 사건으로 인한 갈등이라거나, 혹은 참의원 선거를 앞둔 일본의 정치적 상황만으로 해석하는 것은 적확하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일 관계가 이처럼 극단적인 상황까지 간 근본 요인은 무엇일까.

시사저널은 아베 정권 전후 한·일 관계의 여러 굴곡을 최일선에서 겪은 역대 주일대사 5인을 인터뷰했다. 이들은 자신의 재임 시절과 비교하며 하나같이 “지금의 한·일 관계가 해방 이래 최악”이라고 진단했다. 지금의 갈등 국면이 장기화할 것이라고도 입을 모았다. 자신이 속했던 정권의 성향과 관계없이 문재인 정부의 ‘외교 무능’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비판했다. 시사저널은 역대 주일대사 5인 인터뷰와 더불어, 한·일 양국에서 활동하는 한·일 전문가들을 취재했다. 이를 바탕으로 아베가 공세를 편 진짜 이유와 한·일 갈등이 왜 장기화할 것인지 등 이번 사태와 관련한 네 가지 포인트를 분석했다.

ⓒ EPA 연합
ⓒ EPA 연합

▒ ‘반한(反韓)’ 높은 일본 여론 - “친한파들도 등 돌렸다”

아베의 거침없는 결단 뒤엔 이에 동조하는 일본 여론이 있다. 주일대사들에 따르면, 오늘날 한·일 갈등에 있어 한국의 책임이 크다고 여기는 반한(反韓) 인식이 일본 내에 지배적이다. 아베가 본격적으로 한국에 등을 돌린 시작점으로는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이 주로 꼽힌다(16면 상자 기사 참고). 이후 아베 정권이 과거사 문제로 여러 차례 도발하며 일본 내 반한 감정을 부추겼지만, 여론의 무게추는 쉽게 아베 쪽으로 쏠리지 않았다.

주일대사들은 지난해 말 우리 정부의 위안부 합의 재검토와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등이 일본 여론을 본격적으로 움직이게 했다고 지적했다. 일본 국민 사이에 ‘한국은 약속을 안 지키는 나라’라는 인식이 점점 굳어졌다는 것이다. 유명환 전 대사는 “내가 재임하던 시절엔 일본 국민들 사이에 한국에 대한 미안함이 깔려 있었고, 한·일 양국 국민들 모두 한·일 관계가 좋게 유지돼야 한다며 서포트해 주는 분위기였다”며 “지금은 그런 미안함도 없고, 일본 내 친한파도 대부분 등을 돌렸다”고 분석했다. 권철현 전 대사 역시 “이전의 일본 내 혐한 감정은 소수 우익세력이 주도하는 무시할 만한 수준이었는데, 최근 일반대중으로 확장될 만큼 확장돼 아베가 (반한 감정을) 더 부추길 필요도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아베가 이러한 자국 내 여론을 감지하고, 지난해 말을 기점으로 이번 초강수를 계획했을 거라고 짐작했다.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수출규제를 발표한 것 역시, 현재 일본 여론상 ‘반한’ 행보가 표를 끌어올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실제 이번 규제 조치에 대해 60%가량이 ‘적절했다’고 응답한 일본 여론조사가 최근 발표되는 등 여론은 아베의 행보에 점점 힘을 실어주는 모양새다. 이에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아베가 이러한 여론을 등에 업고, 한국이 굴복 의사를 나타낼 때까지 여러 이유를 대며 계속 공격할 가능성이 크다”며 현재 갈등이 장기화할 거라고 점쳤다. 일본 동양대의 시마가와 다카시 교수 역시 “과거 애매했던 태도와 달리 이번엔 아베도 새로운 카드를 내놓으며 한국의 대응에 상응하는 추가 조치를 낼 것”이라고 내다봤다.

▒ 대일 외교가 없다 - 일본통 없고 외교는 불통

주일대사들은 지난 몇 년간 우리 정부의 ‘대일 외교’가 사실상 전무했다고 한목소리로 질책했다. 이 같은 ‘외교 무능’이 진작 일본 여론의 변화를 감지해 내지 못하고 사태를 키웠다는 지적이다. 그 원인으로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을 비롯해 일본과 시시때때로 만나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정부 내 ‘일본통’의 부재를 꼽았다. 라종일 전 대사는 “대사 시절, 양국 수뇌들이 넥타이 풀고 평상복 차림으로 만나 얘기 주고받는 회담도 열곤 했었다. 그런 데서 진정한 대화가 풀리는 건데, 지금 정부에선 전혀 볼 수 없는 움직임”이라고 말했다. 권철현 전 대사는 “근래 중국이 부상하면서 대일 외교의 중요성이 너무 떨어져버렸다”면서 “지난 7~8년 사이 주일대사가 6명이나 바뀌었는데, 대일 외교가 제대로 이어졌을 거라 기대하는 게 어불성설”이라고 꼬집었다.

한국의 역대 정부가 국내 정치용으로 반일 감정을 활용하는 데만 치중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당시 주일대사였던 유흥수 전 대사는 “외교적 관계 악화가 국민들끼리의 적대로까지 발전하면 안 되는데, 그런 흐름이 보여 우려스럽다”고 평했다. 권철현 전 대사 역시 ‘외곽을 때리는 수법으로 내부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이라는 표현을 썼다. “일본도 우리 정부도 국내 정치를 의식해 서로를 때리고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도 이에 의견을 보탰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일본하고 잘 지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 자체를 국내에선 색안경 끼고 보는 분위기’라며 “정부가 국민의 반일 감정을 돋우거나 싸움을 붙여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외교부 산하 국립외교원 일본연구센터 최은미 교수 역시 “민간 차원의 불매운동과 같은 대응은 좀 더 신중해야 한다”며 “정부가 좀 더 이성적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정상회담 추진 등 향후 행보에 대한 대사들의 생각은 조금씩 달랐다. 유흥수 전 대사는 “실무진들끼리 해결할 수 있는 선을 넘었다”며 조속한 정상회담 진행을 강조했다. 신각수 전 대사 역시 “수개월간 우리가 일본의 대화 제안을 사실상 거부해 온 게 상황을 키운 만큼, 이제라도 적극 협상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반면 라종일 전 대사는 섣부른 정상회담은 아무 영양가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지금 정상회담을 제안하는 건, 가만히 있다가 한 대 얻어맞고 나서야 대화하자고 나서는 것과 다름없다. 지금 상황에서 만나봤자 무슨 얘길 나눌 수 있겠는가”라며 “양쪽 모두 체면이 설 수 있게 물밑 조율이 진행된 후 정상회담을 해도 나쁘지 않다”고 설명했다.

▒ 높아진 일본의 경계심 - 한국 너무 크고 있다

주일대사들과 전문가들은 과거에 비해 한국과 일본의 경제 규모의 차이가 좁혀진 데다, 최근 북한·미국 등과의 외교 무대에서 한국의 존재감이 급부상하는 반면 일본의 입지가 좁아지는 분위기도 이번 아베의 규제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짐작했다. 더 이상 한국이 일본의 영향권 아래 있는 ‘2등 국가’가 아니라는 인식이 아베의 위기감을 높였다는 것이다. 유명환 전 대사는 “세계자유무역의 선도 국가로 불려온 일본이 ‘일본답지 않게’ 무리한 경제 보복을 한다는 건 적절성 여부를 떠나 끝까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한국 수출의 30%를 차지하는 반도체 산업에 아베가 직격탄을 쏜 것은 “중국의 성장을 찍어누르기 위해 트럼프가 시작한 미·중 무역전쟁을 ‘벤치마킹’하려는 것”이라고도 봤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한국이 지금 일본의 영향하에서 벗어나고 있고, 북한과의 평화 국면이 굳어지면 (한국이) 더욱 힘을 갖게 될 거란 걸 알기 때문에 그 전에 약화시키겠다는 의도”라며 “아베가 중국을 대하는 트럼프를 어설프게 따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봤다. 국회 대표적인 일본통인 강창일 더불어민주당 의원 역시 “일본이 부당한 의도로 부당한 대응을 하고 있다는 게 분명한 만큼, 국제사회에 이를 최대한 알리는 게 최우선”이라며 “이 기회에 일본 한 나라에 의존해 온 시장 체질도 고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남북 평화 국면이라는, 아베에게 다소 ‘불편한’ 상황에서 그가 존재감을 드러낼 포인트가 필요했을 거란 분석도 나온다. 그동안 아베는 국내 지지층을 결집하기 위해 북한 문제를 자주 거론해 왔다. 그러나 한반도 평화 분위기에서 과거만큼 북한 문제에 대한 여론의 동조가 떨어지자 이에 대한 고민도 있었을 거란 지적이다. 규제 조치 후 아베가 “한국이 북한에 전략물자를 반출했다”고 주장하며 북한을 끼워넣는 것 역시 국내 여론을 더욱 효과적으로 모으기 위함으로 읽힌다. 신각수 전 대사는 “아베의 규제 결단에 있어 과거사 갈등보다 영향은 덜 미쳤겠지만, 지속돼 온 일본 외교 소외 분위기나, 확실한 북핵 해결보다 남북관계를 우선하는 한국과의 대북 입장차를 충분히 염두에 뒀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일대사들은 대체로 우리 정부가 “자존심을 접을 필요가 있다”고 냉정하게 조언했다. 이번 조치로 우리 기업들이 타격을 받는 동안 중국 시장이 맹추격할 것을 강하게 우려했다. 권철현 전 대사는 “일본이 제한하는 품목들이 빨리 대체하기 힘든 것들이고 신기술 개발에도 시간이 상당히 소요된다. ‘다른 나라 찾으면 된다’ ‘몇조원 투입해 기술 개발하면 된다’고 하는데, 모두 중국이 재미 볼 대로 다 본 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에 대한 우리 정부의 WTO 제소에 대해서도 주일대사들은 “필요한 조치”이긴 하지만, “실질적인 해결엔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신각수 전 대사는 “WTO 결과까지 시간도 오래 걸릴 뿐 아니라, 일본에선 한국에 줘왔던 혜택을 거둬들이는 거지, 한국에 불이익을 주겠다는 게 아닌 만큼 우리가 이길 가능성도 확실치 않다”며 “WTO 제소는 우리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조치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 달라진 미국 - 트럼프는 수수방관 중

“미국의 대통령이 오바마가 아닌 트럼프라는 것도 이번 갈등의 중요한 변수다.” 익명을 요구한 일본인 한국 특파원은 한·일 관계에 있어 미국의 중재 역할이 결정적이라고 강조했다. 과거 오바마 정부의 경우, 위안부 문제 등 한·일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한·미·일 3국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직접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입장을 내놓는 등 즉각 개입했다. 2015년 위안부 합의 체결에도 미국 정부의 개입이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주일대사들과 전문가들은 “지금은 일본만큼이나, 한·일 관계의 전통적 중재자였던 미국과의 긴밀한 대화가 절실한 때”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그러나 일본의 규제 발표 후 트럼프 대통령은 줄곧 중재자가 아닌 관망자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권철현 전 대사는 “아직 며칠 안 돼 일단 지켜보고 있겠지만, 한·일 갈등이 한·미·일 삼각 동맹에 영향을 주고, 북한·중국·러시아 3개국 동맹에 비해 약해진다고 판단할 경우 (트럼프가) 개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최은미 교수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이 트럼프 취임 후 달라졌다. 북한 문제를 비롯해 어떤 협상이든 본인 스스로 담판을 짓기 때문에 동맹에 대한 가치를 낮게 평가한다”고 지적했다. 시마가와 다카시 교수는 “한국과 일본이 싸우면 한·미·일 관계에서 (몸값이 오를) 미국만 좋아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과거와 달리 미국에 의한 해결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지금의 한·일 관계가 출구를 못 찾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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