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범인까지 내세우며 스스로 함정 빠진 경찰
  • 정락인 객원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8.27 08:00
  • 호수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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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락인의 사건추적] 2005년 강릉 노파 쪽지문 살인 사건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덕현리에 사는 장아무개 할머니(69)는 인심 좋기로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다. 자식들은 모두 도시에 나가고 장씨 혼자 살면서 주변 사람들과 허물없이 지내왔다. 2005년 5월13일 장씨는 아침 일찍 양양으로 침을 맞으러 갔다가 점심 무렵인 오전 11시40분쯤 집에 돌아왔다. 이를 목격한 주민들도 있었다.

오후 4시쯤, 이웃 주민은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장씨 집에 들렀다. 대문에 들어서서 “할머니 계세요”라고 몇 차례 불렀으나 안에서는 인기척이 없었다. ‘어디 가셨나’ 하고 나가려던 찰나 평소 장씨가 신고 다니던 신발이 그대로 있었다. 인기척은 없는데 TV 소리가 나고 안방 문도 열려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방 안을 들여다봤다. 그러고는 눈앞에 펼쳐진 참혹한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장씨는 손과 발이 결박된 채 머리에는 포장용 테이프가 칭칭 감겨 있었다. 주민은 급히 마을 이장에게 전화를 걸어 “빨리 와달라”고 했다. 얼마 후 도착한 이장은 심폐소생술을 실시했으나 장씨는 이미 숨진 상태였다.

ⓒ 일러스트 오상민
ⓒ 일러스트 오상민

“내가 범인이다” 자수한 마을 주민

이장의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했다. 집 안은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방 안의 옷장과 서랍장은 모두 열려 있었고 내용물이 어지럽게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부엌도 마찬가지였다. 없어진 물건은 할머니가 착용하고 있던 시가 78만원 상당의 금반지와 금팔찌뿐이었다.

부검 결과 사망원인은 테이프로 인한 질식사였다. 범인은 살아 있는 장씨의 얼굴을 테이프로 물건 포장하듯 둘둘 감았던 것이다. 시신에는 폭행 흔적도 있었다. 갈비뼈 다수가 골절됐고 후복막강 출혈이 있었으며, 신장 주변 출혈이 상당히 심했다. 범인이 장씨를 결박한 후 무차별 구타한 흔적이다.

경찰은 현장을 정밀 감식했지만 깨끗했다. 범인은 지문, DNA, 발자국 등 범행 후 현장에 남아 있을 자신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 도주했다. 그나마 장씨 옆에 있던 포장용 테이프 심지 부분에서 1cm 정도 되는 흐릿한 쪽지문이 발견됐다. 경찰은 범인이 테이프를 자르기 위해 끼고 있던 장갑을 잠시 벗었다가 남긴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당시의 지문 분석 기술로는 지문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범인을 찾으려면 지문의 끊긴 점이나 곡선 등 13가지 특징점이 뚜렷해야 하는데 발견된 쪽지문은 융선과 돌출되는 선이 불분명했고, 글자와 겹쳐 있어 정확한 식별이 어려웠다.

경찰은 강도로 위장한 면식범의 범행에 무게를 두고 수사에 들어갔다. 가족은 물론 지인, 마을 사람들까지 모두 조사를 벌였다. 이 중 용의자로 특정할 만한 인물은 찾지 못했다. 경찰은 고민에 빠졌다. 수사 결과물이 없어 빈손 상태였다. 당시 마을에는 폐쇄회로(CCTV)가 설치돼 있지 않았고, 목격자도 없었다.

이런 때 마을주민 박아무개씨(여·45)가 “내가 범인이다”며 경찰에 자수해 왔다. 박씨는 숨진 장씨와는 아주 가깝게 지내며 수양딸로 불릴 정도였다. 또 장씨에게 200만원의 채무가 있었다. 사건 이후에는 무속인을 찾아가 “범인이 언제 잡히느냐”고 묻기도 했다. 박씨는 경찰 조사에서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해 순간 화가 나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없어진 장씨의 귀금속에 대해서는 “밭에 버렸다”고 말했다. 경찰은 박씨를 범인으로 지목해 검찰에 송치했다. 이렇게 이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검찰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검찰은 박씨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사건 상황이 박씨의 설명과 전혀 맞지 않았고, 범행 도구도 달랐다. 밭에 버렸다는 금반지와 금팔찌도 발견되지 않았다. 거짓말탐지기 조사에서는 ‘진실 반응’이 나왔다.

박씨는 경찰에서 “청소 도구 손잡이로 쓰는 길이 1m 정도의 알루미늄 막대로 장씨를 때려 숨지게 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증거로 제출된 막대는 비닐 커버를 벗기지 않은 새것이었고 표면에는 흠집 하나 없었다. 알루미늄 막대와 장씨의 얼굴에 난 상처의 면적도 달랐다. 더욱이 박씨에게는 알리바이가 있었다.

검찰은 박씨에게 “당신이 범인이 맞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나는 장씨 할머니를 죽이지 않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런데 박씨는 왜 자신이 범인이라고 주장했던 것일까. 여기에는 기막힌 사연이 숨어 있었다. 박씨에 따르면 사건 이후 한 여승이 집으로 자신을 찾아왔다. 그는 대뜸 “당신이 살인을 했다고 말하지 않으면 당신 아들에게 큰일이 생길 것”이라며 무서운 말을 했다.

덜컥 겁을 먹은 박씨는 혹여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봐 거짓 자백을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경찰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박씨를 진짜 범인으로 몰아갔다. 그런데 여승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경찰이 지탄을 받게 된다. 그는 다름 아닌 수사를 담당했던 전아무개 형사의 친누나였다.

사건 해결에 혈안이 됐던 담당 경찰이 죄 없는 사람을 범인으로 만들기 위해 비구니인 누나를 이용했던 것이다. 경찰은 이처럼 ‘가짜 범인’까지 내세우는 무리수까지 뒀다. 박씨는 용의선상에서 배제됐지만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으로 인해 마을을 떠나야만 했다. 결국 경찰이 초동수사에 실패하면서 이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쪽지문 ⓒ 강원지방경찰청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쪽지문 ⓒ 강원지방경찰청

12년 만에 용의자 검거했으나 결국 무죄

그렇게 12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사이 경찰의 과학수사는 놀라운 발전을 거듭했다. 지문 감정 장비의 성능도 월등해졌다. 2017년 경찰은 이 사건의 유일한 증거인 ‘쪽지문’에 대해 지문자동검색시스템(AFIS)으로 재검색했다. 먼저 비슷한 후보 지문 3000개를 추려냈다.

같은 지문을 찾기 위해서는 특징점 12개 이상이 일치해야 한다. 그리고 한 사람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그는 지문 특징점 15곳이 일치한 동해시에 살던 정아무개씨(50)였다. 정씨는 절도 등 전과가 있었다. 1991년에는 동거녀를 폭행하고 억압해 강간하고 현금과 목걸이 등을 강취해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기도 했다.

정씨는 사건 당시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태였다. 알리바이도 정확하지 않았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동해시의 한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고 했지만 거짓으로 드러났다. 거짓말탐지기 조사에서도 ‘거짓 반응’이 나왔다.

당시 질문을 보면 ‘변사자를 결박한 도구가 테이프인가?’ ‘범인이 훔친 반지가 금반지인가?’ ‘2005년 5월13일 피해자를 때리고 손발을 묶은 사람이 당신인가?’ 등이었고 정씨는 모두 ‘아니요’라고 답했으나 ‘거짓’으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정씨는 혐의 내용을 완강하게 부인했다. 당시 자신은 강릉에 간 적도 없고, 전과자라는 이유로 경찰이 범인으로 몰아간다고 항변했다. 문제의 테이프에 대해서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 적이 있는데 그 안에 테이프가 있었다”고 말했다.

용도는 주로 낚시를 하면서 나무로 받침대를 만들 때 테이프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후 오토바이가 분실되면서 테이프도 사라졌다는 것이 정씨의 주장이다. 경찰은 정씨 주변인들에게 그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 적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의 동거인 등은 정씨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답변했다. 경찰은 여러 정황을 근거로 정씨를 살인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고 기소가 이뤄졌다.

이 사건은 경찰이 12년 만에 용의자를 검거했다고 해서 언론에도 대서특필됐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완전히 뒤집어졌다. 정씨는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해 재판부가 받아들였다. 1심에서 배심원 9명 중 8명은 정씨의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다. 재판부가 같은 판단을 내리면서 정씨에게는 무죄가 선고됐다.

핵심 쟁점은 ‘쪽지문’ 하나로 정씨의 범행을 입증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재판부는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증거는 범죄 현장에서 발견된 박스 테이프 안쪽 속지에서 발견된 정씨의 지문이 유일하다”며 “이 지문은 사건 범행과 무관하게 알 수 없는 경위로 남겨졌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즉 심증은 가지만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본 것이다.

2018년 10월24일 열린 항소심에서도 같은 판단을 내렸다. 항소심 재판부는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피고인의 쪽지문만으로는 유죄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된다”며 “원심의 판단은 적법하고 검사의 항소는 이유 없어 기각한다”고 밝혔다. 무죄 선고 직후 법정을 나선 정씨는 “죄가 없으니까 무죄 판결이 난 거 아니겠느냐”며 “나는 모르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검찰은 번복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해 상고를 포기했다. 이로써 이 사건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영구 미제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아울러 피해자와 유족들의 피맺힌 한과 억울함도 풀지 못하게 됐다. 

범인이 남긴 단서들

1. 범행은 강도가 목적이다

범행 현장에서는 범인의 ‘목적’을 엿볼 수 있다. 이 사건의 현장도 마찬가지다. 피해자 장씨의 집에는 범인이 귀중품을 찾기 위해 뒤진 흔적이 역력하다. 귀중품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곳에는 범인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만약 범인이 피해자의 목숨을 노렸다면 ‘흉기’를 사용하거나 목을 졸라 살해하는 것이 더 확실하다.

하지만 이 사건의 범인은 살해 도구로 ‘테이프’를 사용했다. 범인이 처음부터 살인을 염두에 뒀다기보다 범행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범죄 전문가들도 범행의 목적이 ‘강도’에 가깝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2. 범인은 비면식범이다

경찰은 처음부터 수사를 한쪽 방향으로 몰고 갔다. 그 이유가 장씨 집에 있던 3000만원이 들어 있던 통장과 현금이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토대로 ‘강도로 위장한 면식범의 범행’으로 단정했다. 이것은 경찰의 오판을 불러왔다.

평소 장씨는 귀중품을 자신만의 ‘비밀 장소’에 숨겨뒀다. 통장과 현금도 이곳에 보관돼 있었다. 그런데 범인은 그 장소를 찾지 못했다. 다른 곳은 다 뒤졌지만 그곳은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이것은 범인이 일부러 놔둔 것이 아니라 찾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이런 정황을 뒷받침하는 것이 장씨의 몸에 있는 무수한 폭행 흔적이다. 범인은 장씨를 제압한 후 테이프로 손과 발뿐 아니라 얼굴까지 감았다. 또 반항할 수 없는 장씨를 심하게 폭행했다.

이것은 장씨에게 귀중품을 숨겨놓은 장소를 추궁하면서 폭행한 흔적으로 보인다. 장씨가 끝까지 입을 다물자 범인은 피해자의 손에 끼거나 차고 있던 물건만 강탈해 갔던 것이다. 이를 간과한 경찰은 외부인의 범행 가능성을 배제하면서 스스로 모순에 빠졌다. 마을 안에서 용의자를 찾다보니 박씨 같은 가짜 범인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3. 범인은 범죄 전력이 있다

범인은 장씨를 결박하면서 포장용 테이프만 사용한 것이 아니다. 방 안에 있던 전화선과 휴대전화 충전기 선으로 세 번에 걸쳐 결박했다. 장씨를 결박한 매듭도 특이한 형태였다. 범인은 왜 이미 제압한 피해자를 이중 삼중으로 결박했을까. 이에 대해 일부 범죄 전문가들은 범인의 ‘범죄 습관’에 따른 행동으로 분석했다. 범인은 이와 유사한 범죄 전력이 있을 것으로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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