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근심을 다 감당할 순 없지만 [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6.13 16:00
  • 호수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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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페미니스트인가

“세상 모든 근심을 우리가 다 감당할 순 없지만 / 병들어 서러운 마음만은 없게 하리라.”

코로나19 대유행 시대에 국민들에게 안심과 위로를 전하는 의사들 중 맨 앞줄에 명지병원 이왕준이 있다.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인천사랑병원과 명지병원은 바로 저 문장을 병원의 주제처럼 쓴다. 인천사랑병원 개원 당시 내가 쓴 병원가의 마지막 구절이다. 생명을 다루는 모든 사람이 저렇게 생각한다면 설령 병을, 예컨대 코로나19를 정복하지 못할지라도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은 줄어들지 않을까를 염원하고 기도하며 썼던 시다.

학대받는 아이들이 없게 하리라. 차별당하는 사람들이 없게 하리라. 모욕당하는 사람들이 없게 하리라. 억울한 사람, 가난한 사람, 고통받는 사람 없게 하리라. 과로사하지 않게 하리라. 산업재해로 죽지 않게 하리라. 성범죄를 당하지 않게 하리라.

계속 없어야 할 것의 목록을 작성하면서 공연히 가슴이 뛴다. 정말로 그리 되면 얼마나 좋을까. 첫머리 저 시를 썼을 때의 마음이 그러했다. 세상 모든 근심을 다 감당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인간만 슬프겠는가. 캣맘들은 말한다. 세상 모든 고양이를 우리가 다 감당할 순 없지만 굶주려 서러운 우리 동네 길냥이만은 없게 하리라. 비자림 지킴이들은 말한다. 지구의 모든 숲을 지켜내지 못할지라도 당신이 숨 한 번 쉴 수 있는 이 숲만은 지키리라. 이 모든 감정들을 느낄 수 있게 하리라.

대구 달서구 보건소에 마련된 선별진료소에서 의료진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구 달서구 보건소에 마련된 선별진료소에서 의료진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대로 페미니스트답게 살고자

나는 언제나 시보다는 시인이, 페미니즘보다는 페미니스트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무슨 차이냐고? 객관적으로 말하긴 어렵지만, 내 식의 구분은 있다. 시와 페미니즘은 지식 또는 이론이다. 시인과 페미니스트는 실천하는 사람 또는 바로 그 실천의 이름이라고. 그래서 한때는 감히 시인 되기 두려웠던 마음만큼이나, 페미니스트라는 이름표를 달기가 두려웠다. 제대로 페미니스트답게 살기가 결코 쉽지 않음을 자주 깨닫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질러놓으면 사랑이 저절로 길을 낸다. 페미니스트란 세상과 이웃을 사랑하고 감당하려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므로. 나도 그렇게 살면 되지 않을까? 어렵더라도 살면 되지.

어느 날부터 저는 페미니스트예요, 라고 흡사 신앙고백하듯 말하기 시작했다. 나쁘지 않았다.

페미니스트로서 나는, 옳고 그름을 따져서 심판하거나 단죄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적은 없다. 조금 더 섬세한 사람이 되고 싶었을 뿐이다. 워낙 명백히 잘못하는 일을 권력 가진 자들이 잘못이 아니라 할 때, 자신이 권력을 휘두른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칼부림하는 사람들을 볼 때는 싸운다. 사회통념과 관습이라는 권력을 등에 업고도 그걸 모른 채 저지르는 폭력은 페미니스트들을 분노하게 하는 단골 폭력이다. 예를 들어 스토킹하는 옛 남친 사건에서 그 남친의 행태뿐 아니라 스토킹에 관대한 남성중심사회 전체가 보이는 것은 페미니스트를 자임하기로 한 내가 받은 선물이고 자초한 고생이다.

페미니스트란 사랑을 키우고 미움을 줄이려는 사람들이라 나는 다시금 정의한다. 성소수자를 배척하는 페미니스트가 있을 수 없고, 난민과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사람들을 차마 페미니스트라 못 부르는 이유다.

갑자기 드는 생각은, 이 다짐은 왜 이리 수동적인가. 학대하는 사람 없게 하리라, 차별하는 사람 없게 하리라. 모욕하는 사람 되지 않으리라. 생각 좀 하고 살리라. 중간점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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