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구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 소종섭 편집국장 (jongseop1@naver.com)
  • 승인 2020.07.20 09:00
  • 호수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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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서울시장의 느닷없는 죽음은 충격 그 자체입니다. 서울시라는 글로벌 대도시를 이끄는 리더가 하루아침에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삶을 그렇게 빨리 마감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목숨을 이렇게 버려도 되는 것인지 의문도 듭니다. 충격은 또 있습니다. 한 여성은 그로부터 4년간 지속적으로 성추행을 당했다며 박 시장을 고소했습니다. 고소인을 대리하는 변호사는 기자회견을 열어 내용을 공개했습니다. 인권변호사를 거쳐 참여연대와 아름다운 가게 등을 창립하며 ‘시민운동의 대부’로 불린 박 시장은 시정 내내 여성 인권을 누구보다 강조했습니다. 그런 그가 정작 자신의 비서를 성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물증도 일부 공개됐습니다. 정말 충격입니다.

13일 오전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의 영결식이 열리고 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13일 오전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의 영결식이 열리고 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지인들은 제게 “박원순까지 그럴 줄은 정말 몰랐다”면서 놀라움과 함께 배신감을 토로합니다. “성 문제와 관련해 우리 사회 최후의 보루는 박원순이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믿을 남자 없다”는 말도 합니다. 특히 여성들은 한국 사회, 특히 남성들에 대한 깊은 실망감을 토해 내며 분노를 표출합니다. “어떻게 보세요?”라며 제 입장을 밝히라고 다그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문제는 이제 모두의 문제, 우리 시대의 주요 의제가 됐습니다.

과거는 흘러갔습니다. 과거에 내가 이랬는데, 라는 것은 지나간 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변화하는 흐름에 적응해 변신하지 못하면 그 순간부터 ‘꼰대’가 되고 ‘기득권’이 되고 ‘권력’이 됩니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이 그렇습니다. 민주당은 2차 가해 위험성에는 주목하지 않은 채 박 시장 추모에만 열을 올렸습니다. 뒤늦게 이해찬 대표가 “대표로서 통렬히 사과한다”고 밝혔지만 엎질러진 물과 같습니다. ‘채홍사’를 거론한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의 말은 거론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이 구시대의 마지막 열차가 되기를 바랐지만 이번 사태는 각종 사회적 의제들과 관련해서는 아직도 구시대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낡은 것은 모습만 바꿔 여전히 건재하고 새 시대는 오지 않았습니다.

역사는 견제 없는 권력은 부패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야가 따로 없고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습니다. 자연의 법칙과 같습니다. 개인의 품성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환경이 그렇게 만들어지면 자신도 모르게 ‘나만의 왕국’이 만들어집니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객관화시켜서 보지 못하게 됩니다. 주변에 쓴소리를 하는 이들은 사라지거나 경원당합니다. 생물학적으로도 동종교배가 얼마나 위험한지는 이미 증명된 결과입니다. 이번 사태는 자기모순, 견제 없는 권력의 위험성, 기득권이 된 민주화운동 세력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우리 사회가 아픔을 겪으며 진통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새로운 발전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문득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는 《데미안》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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