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정치가 문제다 [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7.18 17:00
  • 호수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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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자에게 물어봅시다

지난 몇 주간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 정도로 사건이 휘몰아쳤다. n번방과 웰컴투비디오가 불러온 공황은 나아질 기미가 없다. 비서를 성폭행해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복역 중인 전 도지사의 모친상이 정치적 소란을 일으킨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비서에게 성추행 고소를 당하고 세상을 등진 현역 시장의 장례가 있었다. 아아,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

지난 지자체 선거를 싹쓸이하다시피 했던 더불어민주당은 당장 내년 4월의 대형 보궐선거를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에 빠지게 됐다. 당헌상으로는 부정부패로 낙마한 자리엔 후보를 내지 않기로 돼 있다는데, 부산시 하나가 아니라 서울시가 추가됐다. 들은 소식은 첫째, 당원들에게 물어 당헌을 고쳐서 후보를 낼 것이냐, 둘째, 성추행은 부정부패가 아니므로 당헌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유권해석할 것이냐. 거의 고려되지 않고 있는 셋째, 당헌대로 이를 악물고 후보를 내지 않을 것이냐.

자치단체장의 성폭력 낙마는 당의 책임이 맞다. 권력에 취하면 두뇌가 달라진다는데, 이를 경계하지 못했다. 형식적 성평등 교육, 후보를 심사할 때 성인지 감수성을 고려하지 않았을 뿐이랴. 문제가 발생하면 쏟아져 나오는 ‘빻은’ 말을 제어하지 못했다. 정치는 그 자체로 과거와 싸우며 미래를 열어가는 거대한 계몽의 향연이고, 그 과거를 끈질기게 지속시키려는 세력을 온몸으로 막아내는 댐 역할이 바로 민주당이었기에 더 책임이 크다.

민주당은 ‘미투’로 대선후보급 단체장을 두 명이나 잃게 된 정당이다. 이 책임이 횡령, 배임, 부정축재보다 작다고 판단한다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라도 심판받아야 할 당이다.

7월15일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운데)가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7월15일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운데)가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성폭력=중대범죄’라는 인식 가져야

책임여당이 서울과 부산의 후보를 내지 않는 결단을 내린다면 어떻게 될까. 시장 자리를 미래통합당이 차지하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면 민주당 당원들과 지지자들은 고민할 것이다. 아니 모든 유권자가 고민할 거다. 과연 그래도 되는 거냐고.

2000년 선거 이래 지자체 선거 투표에 민주당 아닌 다른 후보를 찍은 적이 딱 한 번 있다. 엄밀히 말해 민주당이 좋아서라기보다 반대편 유력후보를 물리치기 위해 민주당 후보에게 투표해야 하는 게 아닌가 고민하는 사람이 많았다. 나도 늘 그랬다. 내가 녹색당 후보에게 투표하던 지난 선거에서는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리라는 것이 너무나 분명해 보였다. 안심하고 ‘옆으로 새’도 될 정도로. ‘안심하고 소신투표’를 해도 될 정도로. 이런 수동적 진보성과 전혀 다른 고민이 민주적 유권자 앞에 주어질 것이다. 고민할 기회, 고민하고 결단할 기회.

만약 이 사안을 무겁게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벌을 준다면 어떻까. 성폭력은 후보를 내면 안 되는 중대범죄라는 인식을 지켜가는 것이 후보를 내는 일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할 줄 아는 선진성과 성숙성을 보고 싶다. 후보를 낸다고 당선된다는 보장도 없지만, 내지 않는 결단은 그 자체가 공당의 책임정치다. 정치공학과 단순한 승부를 훌쩍 뛰어넘어 새로운 정치로 나아가는 놀라운 발판이 될 것이다. 혹시 정말로 도저히 안 되겠어서 후보를 내게 된다 하더라도, 충분히 반성하고 숙고한 다음에야 꺼낼 이야기다. 주권자들, 특히 청년/여성들과 제대로 대화한 다음에. 후보를 낸다/안 낸다가 아니라 왜/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한 다음에.

한때 성누리당이라는 별칭까지 있던 어떤 당의 몰락에서 교훈을 얻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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