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연쇄 도산에 뿌리째 흔들리는 울산 제조업 생태계
  • 박치현 영남본부 기자 (sisa518@sisajournal.com)
  • 승인 2020.09.24 10:00
  • 호수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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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곡·효문·문산산업단지, 공장 매물 쏟아져…주변 상권도 몰락

“코로나19가 울산 경제를 집어삼켰다. 인생의 절반을 바친 회사를 지키려고 모든 걸 걸었지만, 남은 것은 빚뿐이다.”

지난 7월 공장 문을 닫은 ㅇ씨의 하소연이다. ㅇ씨는 울산 온산공단에서 29년 동안 조선 관련 2차 협력업체를 운영해 오다 올해 초부터 작업물량이 급감하자 버티지 못하고 결국 쓰러졌다. ㅇ씨는 한때 성공한 사업가로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 그래서인지 기자에게 회사 이름을 공개하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2009년부터 자동차 부품업체를 운영해 오고 있는 이아무개씨는 “IMF 외환위기 때는 그 시기만 이겨내면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모든 게 절망 상태”라고 토로했다. 그의 회사 매출은 반 토막 났고, 가동률은 60%로 떨어졌다, 이씨는 사업을 계속해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돌풍에 이리저리 날리는 연처럼 전국 최대의 공업도시 울산이 휘청거리고 있다. 실제 전국에서 코로나19 충격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곳은 울산이다. 국가통계포털 코시스(KOSIS)에 따르면, 국내 생산·수출 1위를 담당하고 있는 울산 지역 어음부도율은 지난 7월 1.88%를 기록했다. 전국 평균치인 0.05%의 무려 38배다. IMF 외환위기 직후 기록했던 2%대에 육박하고 있다.

코로나19라는 ‘블랙스완(Black Swan)’을 만나 사지로 내몰리고 있는 기업들이 날개 없이 추락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2차 협력업체인 명보산업은 지난 6월 사업 포기를 선언했다. 시트 커버와 퓨즈박스 등을 만드는 이 업체는 물량 감소와 모기업인 1차 협력업체와의 갈등으로 문을 닫았다. 업계는 명보산업의 사업 철수가 국내 자동차 부품 협력사 줄도산의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손 털게 돼 차라리 속 편할지도 모르죠. 정작 죽을 맛인 건 상급 업체에 말도 못 꺼내는 3~4차 협력업체들입니다.” 사업 포기를 선언했다가 한 번만 더 공급을 재개하기로 결정한 한 부품업체 대표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동차업계에선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이다. 중소 부품업체의 연쇄도산 우려는 올 초부터 꾸준히 제기돼 왔다. 코로나19 재확산이 단지 그 시기를 앞당겼을 뿐이다. 산업단지에 불이 꺼지고 있다. 제조 현장 가동률이 곤두박질치면서 시장에 나온 ‘공장 매물’이 급증하고 있다. 자동차·조선·기계 등 핵심 제조업에 소재·부품을 공급하는 협력업체들이 대부분이다. 

일거리가 없어 공장 가동이 중단된 울산 산업단지 내 한 협력사 ⓒ박치현 기자

3차 협력사부터 시작된 위기, 확산 조짐 

울산 효문공단의 한 자동차 부품업체 공장 매물은 최근 경매에서 두 번이나 유찰됐다. 지난해 3월부터 2·3차 협력업체들이 매물로 나오기 시작하더니 쌓인 매물만도 10여 개에 달한다. 매물은 넘쳐나지만 찾는 사람이 없다. 과거에는 매물이 나오자마자 곧장 팔렸다. 경매나 유찰은 상상도 못 했다. 기반이 취약한 3차 협력사부터 시작된 위기가 1차 협력사까지 순식간에 확산될 조짐이다.

전문가들은 시장이 악화되면서 심각해진 유동성 문제로 동종 업체의 ‘인수’ 등을 통해 이어왔던 울산 제조업 생태계가 바닥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법원경매 정보업체인 지지옥션 오명원 선임연구원은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연말부터는 공장 경매 물건이 봇물처럼 쏟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울산 조선업계에도 ‘한파 경보’가 내려졌다. 대우조선해양 자회사인 신한중공업은 지난 6월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살아남기 위해 인적·물적 구조조정을 과감히 시도하고 있다”며 “올 연말이 지나면 일감이 바닥난다. 수주에 목숨을 걸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조선 경기 침체에다 중국의 저가공세에 밀려 마땅한 돌파구를 찾기 힘든 상태다. 신한중공업 200여 개 협력업체 중 30개 업체가 이미 문을 닫았다. 내년에는 상황이 더 나빠질 것으로 예측되면서 연쇄도산이 우려된다.  

기록적인 수주 가뭄에 대형 조선사에 딸린 협력사들이 잇따라 문을 닫으면서 근로자들도 함께 일자리를 잃고 있다. 업계에서는 올 하반기 최대 8000명가량이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우려가 번지고 있다. 현재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은 1개 프로젝트, 삼성중공업은 3개 프로젝트만을 수주잔고로 갖고 있다. 새 일감이 없는 상황에서 기존 프로젝트가 종료되면 협력사들은 현장을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조선업은 구조적인 위기에 처해 있고 세계 경기가 반등하기까지는 뚜렷한 해법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울산 산업단지에 임대로 나온 건물들이 속출하고 있다. ⓒ박치현 기자

수출·내수 부진에 코로나 확산까지…못 버텨

기자는 9월14일 울산 매곡·효문·문산산업단지를 잇따라 찾았다. 이곳에는 400여 개 자동차·조선 협력업체가 입주해 있다. 곳곳에 ‘공장부지 매매’ ‘공장 전문 매매·임대’ 같은 광고 플래카드가 붙어 있고, 휴업에 들어간 업체도 늘고 있다. 자동차 내장재 생산업체 대표 양아무개씨는 “매출이 65%까지 떨어졌지만, 임금 등 고정비용은 그대로 나간다. 세금 체납은 물론 사채까지 쓰면서 버티고 있다”고 호소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이곳 중소 협력업체들은 잇단 조업중단과 휴업 등에 따른 자금압박이 극에 달했다. 조선업체 2차 협력사 대표 ㅍ씨는 “3월부터 마이너스 경영을 해 왔다. 적자 누적으로 인력을 20% 이상 감축했지만, 언제까지 버틸지 모르겠다”고 했다.

특히 올해 다양한 신차 출시에 맞춰 금형·설비투자를 단행한 업체들은 도산 위기에 직면했다. 코로나19로 해외시장이 막히면서다. 현대·기아자동차 내외장부품 1차 협력사인 한 업체는 220억원을 들여 신규 수주 부품 생산라인을 증설했다가 물량을 따지 못해 낭패를 보고 있다. 정부 특별운영자금과 코로나19 피해 긴급경영안정자금 대출을 신청했지만, 이마저 거절당해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다. 정만기 한국자동차산업협회 회장은 “자동차부품업체들은 코로나19로 인한 일감 축소에, 금융권의 대출 기피로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300억원의 신규 설비투자를 단행한 또 다른 1차 협력업체도 자금난에 허덕이며 근근이 버티고 있다. 협력업체들의 붕괴는 국내 자동차 산업의 위기로 이어진다. 그래서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지난 6월 열린 ‘자동차 살리기 간담회에서 “자동차 산업은 40만 명의 일자리를 책임지고 있으며 자동차 산업을 떠받치고 있는 게 부품업계”라며 “완성차업계도 부품업계를 지켜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단이 무너지자 주변 상권도 급속히 몰락하고 있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에 따르면, 2분기 3개월 동안 전국 상가 점포 중 하루에 1100여 개꼴로 사라졌다. 그중 울산의 감소폭은 6.2%로 전국 17개 시도 가운데 가장 컸다. 9월11일 울산 북구 명촌동 식당가. 이곳은 작년까지만 해도 회식과 모임 등으로 근로자들이 빼곡했다. 하지만 지금은 고객을 기다리는 빈 테이블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고깃집을 운영하는 조수근씨는 “매출이 반 토막 났다. 우리처럼 자기 건물에서 장사하는 업주들은 어렵게 버티고 있지만, 월세 주는 사람들은 답이 없다. 300여 개 식당 중 100개 정도는 문을 닫았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한 노래방 업주는 “현대중공업이 잘나갈 때는 업소마다 방이 없어 난리였는데, 요즘은 일주일에 한두 팀을 받기도 힘들다”며 “망해서 떠나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했다. 중구 구도심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빛바랜 임대 현수막이 한 집 건너 한 집꼴로 걸려 있다. 오랜 기간 임차인을 구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부동산 중개업자는 “월세 100만원짜리 가게를 60만원대로 낮춰도 찾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시사저널이 최근 둘러본 울산의 산업 현장은 예상보다 심각했다. 미국 변방에 불과했던 디트로이트의 부흥은 자동차 산업이 이끌었다. 하지만 자동차 업종의 파산으로 디트로이트 인구의 70%가 줄어들었고, 중산층들은 거리로 내몰렸다. 디트로이트의 몰락은 태평양 너머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울산의 현주소다. 현대자동차 협력사들은 위기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조선사 협력업체들은 수주 절벽에 연쇄폐업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북유럽 조선업 몰락의 상징이었던 ‘말뫼의 눈물’이 ‘울산의 눈물’로 겹쳐 보였다. 여기에 코로나 ‘불청객’까지 나타나 울산 제조업 생태계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 강영훈 울산발전연구원 박사는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는 울산공단의 돌파구를 찾기가 쉽지 않다“며 ”포스트 코로나 시대 울산 경제는 어디로 갈 것인가”라고 걱정했다. 

울산 제조업 가동률 역대 최저치…고용시장도 휘청

조선과 자동차산업 추락의 후폭풍은 예상보다 거세다. BNK금융경영연구소의 '2020 상반기 동남권 경제 리뷰' 보고서에 따르면, 상반기 울산 제조업 생산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10.5%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자동차가 19.9%로 가장 많이 줄었다. 백충기 BNK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울산 경제는 코로나19 사태의 2차 대유행 가능성 등으로 불확실성이 여전히 높다"고 진단했다. 9월 현재 울산지역 중소 제조업 평균가동률도 67.6%에 그치며 역대 최저치다. 정상 수준으로 가동하고 있는 업체는 10곳 중 4곳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올 상반기 울산지역 총 수출도 269억8000만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23.5% 감소했다. 지난 2006년 상반기 이후 14년 만에 최저치다. 모든 경제지표가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최대 감소폭을 기록했다.

고용시장도 휘청거리고 있다. 동남지방경제청에 따르면, 지난 8월 울산의 취업자 수는 56만1000명으로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1만1000명 감소했다. 고용률은 57.6%로 전년 동분기 대비 1.7%p 하락했다. 일자리가 많은 공업도시인데도 전국 평균 고용률 60.0%를 밑돌았다. 실업률도 3.2%로 전년 동월 대비 0.1% 상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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