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능한 정부의 포퓰리즘은 ‘독’ 아닌 ‘약’ [김상철의 경제 톺아보기]
  • 김상철 경제 칼럼니스트(전 MBC 논설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9.23 08:00
  • 호수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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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비 2만원 지급 두고 논란 가열…역기능과 순기능 명확히 구별해야

정부는 지난 9월3일 제1차 한국판 뉴딜 전략회의를 주재하고 20조원의 국민참여형 뉴딜펀드 조성계획을 발표했다. 부총리와 금융위원장은 “사실상 원금보장 상품”이라며 “국고채 이자보다는 높은 수준일 것”이라고 했다. 펀드가 원금이 보장된다면 이는 수익보장이나 손실보전을 금지하는 자본시장법 제55조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래서 ‘사실상’ 원금보장이라고 했을 것이다.

이후 2차 재난지원금 지급 계획이 발표되었다. 상반기에 우리가 경험했던 ‘긴급재난지원금’과는 다르다. 소상공인과 중소기업, 그리고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하는 이른바 ‘맞춤형’ 지원책이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7조8000억원의 국채를 발행한다. 말이 많은 것은 이 가운데 13세  이상 모든 국민에게 지급한다는 2만원의 통신비다. 9000억원이 든다고 한다.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가운데)와 김태년 원내대표(오른쪽), 홍남기 경제부총리 등이 9월10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8차 비상경제회의에 참석해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가운데)와 김태년 원내대표(오른쪽), 홍남기 경제부총리 등이 9월10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8차 비상경제회의에 참석해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내년 예산, 역대 최대 규모인 556조원대 

이재명 경기지사는 내년부터 고용 불안정 보상수당을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에, 또 비정규직 중에서도 고용기간이 짧을수록 보상 성격의 수당을 더 많이 주겠다고 한다. 이재명 지사는 ‘기본대출’이라는 제도의 시행도 주장했다. 모든 국민에게 신용도와 상관없이 1~2% 수준의 장기 저리로 원한다면 평생 한 번 쓸 수 있는 마이너스통장을 만들어주자는 제안이다. 혹여 돈을 못 갚는 일이 생기면 정부가 책임을 져주는 조건이다.

기획재정부는 역대 최대 규모인 556조원 규모의 내년 예산안을 확정했다. 올해보다 8.5% 늘어난 액수다. 고용과 노동, 복지 예산은 200조원에 이른다. 총수입이 총지출보다 많이 부족해 90조원의 국채를 발행해야 한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지난해 말 37.1%에서 올해 43.9%, 2022년 50%, 2024년에는 60%에 육박한다.

현안마다 논란이 따른다. 요즘처럼 정책을 두고 포퓰리즘(Populism) 논쟁이 많이 일어났던 적이 과거에 있었나 싶다. 포퓰리즘은 원래 인민주의라고 번역됐다가 인민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 때문에 민중주의 또는 대중주의, 혹은 인기영합주의로 번역되고 있다. 좋은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물론 실제로 포퓰리즘은 나쁜 결과를 가져온 경우가 적지 않다. 파시즘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포퓰리즘은 선악의 개념이 없는 가치 중립적 용어다. 포퓰리즘의 사전적 정의는 “보통 사람들의 요구와 바람을 대변하려는 정치사상과 활동”을 말한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포퓰리즘을 “그들의 관심사가 엘리트 그룹으로부터 무시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평범한 인민들에게 호소하고자 하는 정치적 접근”으로 해석한다.

사실 포퓰리즘은 광범위하고, 애매한 개념이어서 이견의 여지가 크다. 비판적인 시각에서 보면 무책임하고 비전문적인 정치행위일 뿐이다. 독일 출신의 얀 베르너 뮐러(Jan Werner Mueller)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가 《포퓰리즘은 무엇인가(What is Populism?》라는 저서를 통해 지적한 대로 민주주의의 타락으로 보는 시각이다.

반면에 긍정적으로 보면 민중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통해 실현 가능한 민주적 생활방식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언론인이며 정치평론가인 존 주디스(John B. Judis)는 《포퓰리즘의 세계화(The Populist Explosion)》에서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는 측면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포퓰리즘이 근본적으로는 특정한 사회 집단이나 계층의 절망과 분노를 반영했다고 보는 시각이다.

생각해 보면 선거를 통해 뽑힌 지도자가 국민이 위임한 권한을 이용해 국민에게 노력하는 것은 바람직하면 했지 나무랄 일이 아니다. 민주국가에서 정치권이 표를 얻기 위해 국민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민주주의야말로 포퓰리즘이 낳은 정치체제다. 더구나 사회의 기득권층이 더 많은 책임을 지도록 하고, 약자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는 정책을 펴는 것은 잘못된 방향이라고 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구호가 아니라 역시 능력이다. 포퓰리즘으로 불리는 모든 정책이 늘 부정적 결과만 가져오는 것도 아니다. 실패한 사례가 많지만, 성공한 사례도 있다. 정치적 포퓰리즘과 경제적 포퓰리즘을 나누고 이 중 후자에 대해서는 때때로 그 정당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정당성이 인정되는 경제적 포퓰리즘의 대표적 사례로는 흔히 뉴딜정책이 거론된다. 필요한 것은 역시 유능한 정부다. 포퓰리즘은 기본적으로 대중과 서민을 위하는 노선·정책이고, 기득권 엘리트 세력에 대해서는 견제하는 방향을 지향한다. 포퓰리즘의 정치는 갈등을 통해 작동한다. 그러나 유능한 정부는 조정과 타협으로 사회적 형평과 통합을 모색한다. 정부가 하고 싶다면 무엇이든 일단은 가능하다. 하지만 국가가 가진 자원은 한정돼 있다. 정부가 무능하고 비효율적이라면 나라의 장래는 어둡다. 감염병 사태로 인해 개인의 사생활까지 정부의 간섭이 당연해진 지금은 더 그렇다.

성공한 포퓰리즘에는 전제가 있다. 우선 정부는 정직해야 한다. 대중을 오도하기 위해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거나 진실을 숨기거나 왜곡해서는 안 된다. 단기적으로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어도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부정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면 그것은 또 그것대로 공개하고 인정하면 된다. 정답을 찾기 쉽다고 생각하는 것부터 바람직하지 않다. 정책 결정은 대부분 선택의 문제, 가치의 문제고 그래서 과학이 아니라 정치다. 그리고 정치에서 어느 한쪽이 완전히 옳은 경우는 드물다.

 

요란한 구호보다 실행 능력이 중요

필요한 것은 공론장의 역할이다. 포퓰리즘이 민주주의를 낳았지만 동시에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지적받는 것은 나쁜 포퓰리즘은 국민을 가르기 때문이다. 포퓰리스트는 흔히 국민의 뜻을 대변한다고 하지만 나쁜 포퓰리스트가 말하는 국민에는 정치적 반대자는 포함되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공론장의 정상적인 작동을 막는다면 나쁜 포퓰리즘이다. 나쁜 포퓰리즘을 구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도 하다.

결국은 지속 가능성이 중요하다. 재정지출 확대에는 전력을 기울이면서도 재정 기반을 확대하는 일에는 노력하지 않는다면 제도의 지속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어떤 제도든 지속을 원한다면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가치관을 인정하고, 이견을 조정하고, 가능한 합의점을 중심으로 타협하는 것이 필요할 때가 많다. 자기 확신은 조금 자제하는 것이 낫다. 지나친 확신은 오히려 무지의 결과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어느 경우에나 어떤 방법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인지에 대한 고민은 항상 필요하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유능한 정부 역시 권력의 기반은 포퓰리즘이다. 진보와 보수의 차이도 없다. 능력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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