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 그룹 총수 모임이 작지만 강력한 이유
  • 엄민우 시사저널e. 기자 (mw@sisajournal-e.com)
  • 승인 2020.11.19 14:00
  • 호수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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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나 정치권 개입 없이 ‘그들만의 모임’ 가능...과거 재계 의견 조율하던 전경련과 차별화

과거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단 회의는 재계에서 가장 큰 이벤트 중 하나였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등 내로라하는 대한민국 기업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국 경제 현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목소리를 내는 자리였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거치며 주요 그룹 총수들이 잇따라 전경련 탈퇴를 선언했고, 이후 재벌 총수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은 사실상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이들의 후손, 특히 4대 그룹(삼성·현대차·SK·LG) 총수들이 최근 세대교체를 마치고 회동을 이어가고 있어 주목된다. 소규모지만 대한민국을 이끄는 주요 그룹 총수들이 모인, 그것도 정부 관계자가 빠진 그들만의 비공개 회담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와 힘을 갖는다는 분석이 나온다.

1월2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신년합동인사회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이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1월2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신년합동인사회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이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태원 회장 주도로 4대 그룹 총수 모임 잇따라

재계에 따르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최태원 SK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구광모 LG 회장은 지난 11월5일 서울 광장동 워커힐 애스톤하우스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 모임을 주도한 이는 재계 맏형 격인 최태원 회장으로 알려졌다. 이 모임을 두고 ‘부친상을 당한 이 부회장을 위로하기 위한 자리’라거나 ‘미국 대선 결과에 대응하기 위한 것’ ‘공정경제 3법에 대응하기 위함’이라는 등 호사가들의 갖가지 해석이 난무했다.

하지만 재계에선 이번 총수들의 모임이 단순히 특정 이슈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한 재계 관련 단체 인사는 “4대 그룹은 대외활동을 할 때 여러 가지 조율할 것이 많다 보니 공식적으로 모이는 기회가 많지 않다. 현재 알려진 것 외에 몇 번 더 만났을 것이란 이야기가 있다”며 “총수들이 구체적 사업 이야기를 하진 않겠지만 서로 협력할 것은 협력하자는 공감대가 있기에 가능한 회동”이라고 분석했다. 네 사람은 지난 9월에도 한 번 모인 바 있다.

특히 과거의 경우 공식적으로 총수들의 의견을 조율했던 전경련 회장단 회의가 있었다. 이 모임이 사실상 와해되면서 제계의 맏형 격인 최 회장 주도로 모임을 정례화해 이어가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 재계 인사는 “재계 순위로만 보면 이재용 부회장이 주도하는 게 맞지만 나이와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 최 회장이 총대를 멘 것으로 본다”고 전했다.

재계 일각에선 이 모임이 과거 전경련 회장단 회의의 진화된 형태에 가깝다는 해석도 나온다. 비록 멤버는 4대 그룹 총수로 한정됐지만 이들 그룹은 국내 기업들의 리더 역할을 해 왔다. 지난 2017년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재벌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후 가장 우선적으로 만남을 추진한 곳도 4대 그룹이었다. 해당 그룹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상징성을 감안할 때 대한민국 재계의 주요 방향이 이 모임에서 정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4대 그룹 총수 모임이 소수정예, 비공개로 이뤄진다는 점도 주목할 포인트다. 과거 전경련 회장단 회의는 공식 행사로 이뤄졌고 총리를 초청해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일부는 비공개로 진행되기도 했지만 언론 취재가 허용되는 행사였다. 하지만 네 사람의 모임은 철저히 비공개로만 이뤄지고 있다. 정치인이나 정부 관계자 배석 없이 4대 그룹 총수만 허심탄회하게 고민을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과거 모임과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대내외적 불확실성 대응 등 단순한 친목 모임 이상의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워낙 소수만의 모임이기 때문에 이야기가 새어나갈 우려도 적다. 오너 일가를 가까이서 지켜봤던 한 대기업 인사는 “재벌 총수들도 고민이 있을 텐데 그 고민을 누구와 나눌 수 있겠느냐. 결국 같은 총수들일 수밖에 없고, 그들끼리 가깝게 지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라고 전했다.

 

산업 간 융합으로 상호협력 유인 더 강해져

산업 환경 자체가 달라져 상호협력이 필수인 상황이 됐다는 점이 총수들을 과거보다 부담 없이 모일 수 있게 하는 배경으로 꼽힌다. 박주근 CEO스코어 대표는 “4대 그룹은 사실상 국내에서 다툴 이유가 없는 글로벌 기업이고, 산업 간 융합으로 상호 협력할 필요성도 과거보다 커져 함께 공동대응 방안을 고민할 수 있게 됐다”고 분석했다.

4대 그룹 총수의 모임이 그룹경영 활동에 도움이 될 것이란 시각도 많다. 최근 들어 국내 경영 환경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고, 또 바이든의 미국 대통령 당선으로 국내 기업으로서 공동으로 대응하고 논의해야 할 일이 더욱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개별 기업별로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 의견을 모아 입장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도 해당 모임의 장점으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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