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기업 회장 놀음’에 목맨 프로 스포츠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1.02.21 10:00
  • 호수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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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 적자에 코로나19 겹쳐 운영방식 재편 가속화할 듯

‘야구는 투수 놀음’이라는 야구계 격언이 있다. 팀 성적이 투수 운영이나 영입에 달렸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무리 실력 좋은 투수도 구단의 경영 상황까지 좌우하진 못한다. 1982년 국내 프로야구(KBO리그) 출범 이후 각 구단은 모기업의 의지에 따라 힘을 받기도, 쇠락하기도, 심지어 없어지기도 했다. 이는 다른 프로 스포츠에서도 마찬가지다. 모기업이 대부분 재벌그룹이다 보니 ‘프로 스포츠는 오너 회장 놀음’이란 말이 적지 않았다. 

사상 유례없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이런 분위기는 더욱 노골화됐다. 대기업들은 총수의 진두지휘 아래 모든 사업 분야에서 ‘리빌딩’을 감행하는 중이다. 만성 적자 속 관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까지 맞은 프로 스포츠계엔 풍전등화의 위기감이 흐른다. 모기업 회장의 동향을 살피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빅딜’ 후 최태원·정용진에 집중된 이목 

최근 SK그룹이 SK 와이번스 프로야구단을 신세계그룹에 매각하기로 결정한 직후 세간의 시선은 딱 두 사람에게 쏠렸다. 바로 최태원 SK 회장과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다. 과거 삼미 슈퍼스타즈,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쌍방울 레이더스, 해태 타이거즈 등이 모기업의 재정난으로 야구단을 정리한 반면, SK는 핵심 계열사의 호황에도 갑작스레 와이번스를 신세계에 넘겼다. 선수단, 프런트 등 수많은 핵심 관계자들이 배제된 ‘빅딜’이었다. 성사 배경에는 두 오너의 결단만 있었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SK와 신세계 측은 이런 반응을 부담스러워하는 모습이다. 시사저널 취재 결과 두 기업은 2월23일 본계약 때 오너 참석 행사 등 화려한 퍼포먼스를 자제할 예정이다. 무엇보다 SK 측에서 최 회장의 매각 결단이 두드러지는 상황을 최대한 피하려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양사는 지난 1월26일 인수 양해각서(MOU) 체결 이후 수차례 실무진 미팅을 통해 구단 상황과 현안, 재창단 계획 등을 논의했다. 새 구단은 오는 3월 정식 출범할 예정이다. 

신세계는 SK의 입장을 고려하면서도 야구단 소유 기업으로서의 존재감을 착착 드러내고 있다. 신세계 관계자는 “적극적으로 투자해 팬들에게 더욱 사랑받는 구단으로 성장해 나가겠다”며 “다양한 성장 비전을 마련하고 로드맵에 맞춰 차질 없이 투자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미 신세계는 MOU 체결과 동시에 돔구장 건설, 야구장 내 신세계 유통시설 대거 입점, 야구 관련 상품과 서비스 개발 등 비전을 과감히 제시했다. 이달 들어선 ‘일렉트로스’의 상표권을 출원해 새 야구단 이름에 대한 궁금증을 키우는가 하면,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전지훈련 중인 선수단을 위해 매일 계열사 스타벅스의 커피 100잔을 전달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를 두고 수많은 야구팬 내지 소비자가 정용진 부회장을 떠올렸다. 평소 파격적인 경영 행보, SNS 소통 등으로 유명한 정 부회장의 이미지와 어울리는 이슈들이기 때문이다. 야구광으로 알려진 정 부회장은 벌써 야구팬들 사이에서 ‘용진이형’으로 불린다. NC 다이노스 구단주인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이사가 ‘택진이형’으로 통하는 것처럼 말이다. 

2011년 NC 다이노스를 창단해 구단주를 맡아온 김택진 대표 역시 극진한 야구 사랑으로 유명하다. 김 대표의 진두지휘 아래 NC는 2013년부터 자유계약(FA) 선수 영입에 451억원을 투입했다. 김 대표는 감독 및 코칭스태프는 물론 선수들과도 격의 없이 만나 구단 운영 방향을 논의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NC는 지난해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봤다. 

모기업 오너가 모든 이슈의 시작과 끝 

향후 벌어질 신세계 야구단과 롯데 자이언츠의 대결을 유통재벌 맞수인 정 부회장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간 장외 대결로 보는 시각도 있다. 공교롭게도 KBO 2021 시즌 정규리그에서 신세계 야구단의 첫 공식 경기이자 개막전 상대는 롯데 자이언츠로 정해졌다. 본업인 유통업에서 신세계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는 롯데 입장에서는 신경이 쓰이는 대목이다. 

신세계가 SK 와이번스 인수를 결정한 지 3일 뒤인 1월29일 롯데 자이언츠는 FA 이대호와의 계약 협상을 극적으로 마무리했다. 구단과 이대호 측의 줄다리기 속 지지부진하던 협상은 신 회장의 개입으로 한순간에 타결됐다. 

야구판에서 정 부회장이 ‘재벌 오너 구단주’ 대열에 합류하며 기대감과 이슈를 만들어내는 반면, 최태원 SK 회장에게는 서운함이 표출되고 있다. 최 회장이 2018년 SK 와이번스의 KBO 한국시리즈 우승 후 선수들로부터 헹가래를 받은 장면, 불과 8개월여 전 화상간담회에서 SK 와이번스 하재훈 선수 등 계열 스포츠단 관계자들을 격려하던 모습 등이 겹쳐 더욱 충격을 줬다. 

특히 모기업이 어렵긴커녕 승승장구하고 있는데도 21년 전통과 4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에 빛나는 야구단을 팔아치운 점, 매각 사유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점 등이 도마에 올랐다. ‘사회적 가치와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에 매진한다는 그룹 기조에 따른 것 아니겠느냐’는 추측만 나돌 뿐이었다. 

그러나 경제계의 평가는 조금 다르다. 실리주의자인 최 회장이 평소 스타일대로 과감히 사업 재편에 나섰다는 평가가 많다. 국내 프로 스포츠 대부분은 모기업의 지원 없이 생존하기 어려운 구조다. 해마다 수십억~수백억원이 투입되는 프로 스포츠단 운영에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우려도 항상 뒤따랐다. 당장 신세계의 SK 와이번스 인수를 놓고도 한국신용평가는 “비우호적인 대형마트 업황 속 프로야구단 인수 자금 지출과 비용 부담이 확대되는 점은 부정적”이라고 지적했다. 

프로 스포츠단을 운영하는 기업의 한 관계자는 회사 공식 입장이 아니라는 이유로 익명을 요구하며 “요즘처럼 대내외 불확실성이 커진 시점에 기업 대부분은 비용이 워낙 많이 들어가는 프로 스포츠단을 운영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다”면서 “일부 사례를 제외하면 아무리 스포츠를 좋아하는 오너가 있다 하더라도 수익성이 낮은 사업에 맹목적으로 투자하긴 어렵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최태원 회장이 욕은 먹었지만 빠르게, 또 적합한 기업에 야구단을 잘 매각한 듯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SK 와이번스와 같은 인천 연고의 프로농구팀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도 매각 이슈의 한복판에 서 있다. 모기업인 전자랜드가 2020~21 시즌을 끝으로 구단 운영을 접기로 한 가운데 한국프로농구연맹(KBL)은 새 주인 찾기에 나섰다. 

전자랜드는 2003년 8월 인천 SK를 인수해 프로농구에 뛰어들었다. 농구 마니아인 홍봉철 회장이 인수전에 적극 나섰다. 프로농구 인기가 예전만 못한 상황에서 준수한 성적에도 모기업 홍보 효과나 추진 사업과의 시너지 등은 미미하다. 중견기업인 전자랜드가 매년 60억원에 이르는 구단 운영비를 충당하기는 버거웠다. 

전자랜드는 2011~12 시즌이 끝난 뒤에도 같은 이유로 농구단 매각을 추진한 바 있다. 당시 전자랜드 선수단이 “좋은 성적을 내서 구단주(홍 회장)의 마음을 돌려놓겠다”며 매각을 만류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구단이 유지됐다. 지난해 코로나19로 모기업 경영 환경, 프로농구 운영 상황 등이 급변하자 홍 회장은 이번엔 무조건 프로 스포츠 사업을 접기로 결단했다. 전자랜드 관계자는 “앞으로 프로 스포츠단을 통한 기업 홍보보다는 주력 분야인 유통사업에 더 투자하고 매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프로야구단, 수익 활동에 더 전념해야” 
최동호 스포츠 평론가 미니 인터뷰 

“프로야구 전체의 위기로 바라보는 시각엔 동의하지 않는다.” 

30년 가까이 스포츠 현장을 취재하고 분석해 온 최동호 스포츠 평론가는 ‘프로야구단 운영의 메리트가 사라졌다. SK 와이번스 매각을 계기로 다른 대기업들도 돈 안 되는 야구단을 포기할 수 있다’는 분석을 경계했다. 최 평론가는 “SK는 팔았지만, 반대로 신세계는 샀다”며 “프로야구의 부가가치를 평가하는 기업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무분별한 위기론은 지양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프로야구를 바라보는 기업들의 시선이 변한 건 사실”이라며 “시대가 변한 만큼 프로야구단이 (대기업 계열) 사업체로서 수익 활동에 더 전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프로야구단을 새로운 사업 플랫폼으로 활용하겠다는 신세계가 변화의 촉진제가 될 수 있을 거란 기대도 내비쳤다. 다음은 최 평론가와의 일문일답이다. 

프로야구단 경영 악화에 모기업 총수의 영향력이 더욱 부각되는 모습이다. 

“모기업 지원 없이는 야구단 존속이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태생적 한계라고도 볼 수 있다.” 

SK처럼 오너의 결단에 따라 프로야구단을 매각하는 사례가 추가로 나오진 않을까. 위기감이 감돈다.  

“SK 와이번스 매각을 프로야구 전체의 위기인 것처럼 판단하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 SK는 팔았지만, 프로야구를 새로운 플랫폼으로 활용하겠다고 시장에 신규 진입한 신세계가 있지 않나. 프로야구의 부가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기업들이 분명 존재하기에 위기는 아니라고 본다.” 

기업의 프로야구단 운영에서 과거와 달라진 점은. 

“프로야구를 바라보는 기업의 시선이다. 예전에는 재벌그룹들이 서로 (사세를 놓고) 자존심 싸움을 하면서 프로야구단을 운영했다. 지금은 좀 더 각 기업이 영위하는 산업별 특성에 좌우되는 측면이 있다. 예컨대 신세계는 프로야구를 유통 플랫폼으로 활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시장에 진입했다. 신세계 입장에서는 야구단 운영으로 100억원의 적자를 보더라도 동시에 그들의 진짜 시장(유통업)에선 200억원 이상 벌어들일 수 있겠다는 판단을 내렸으리라 본다.”

프로야구단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시대가 변했으니 프로야구단도 하나의 사업으로서 수익 활동에 더욱 전념해야 한다. 돈을 벌어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구단들도 여기에 공감은 하겠지만, 그간 (구단 차원에서) 새롭게 내놓은 상품은 거의 없었다. 게으름이랄까, 생산성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 ‘협소한 국내 시장’, ‘광고권 문제’ 등 고루한 얘기는 제쳐두고 눈에 보이는 변화를 보여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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