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기의 과유불급] 리더는 결정하고 책임지는 사람
  • 전영기 편집인 (chunyg@sisajournal.com)
  • 승인 2021.03.02 09:00
  • 호수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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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는 결정하고 책임지는 사람이다. 결정하라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결정해야 할 때 결정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상황을 자기 식으로 끌고 가려 한다. 결정하지 않는 일이 두 번째 벌어지면 사람들은 리더를 우습게 보기 시작한다. 곳곳에서 리더를 무시하는 세력이 등장하고 불온한 기운이 퍼져간다. 리더의 무결정이 세 번째 발생하면 무정부 상태가 벌어질 수 있다. 배는 산으로 가거나 아예 폭풍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의 리더십이 롤러코스트를 탄 듯 아슬아슬하다. 야당이나 비판적 언론의 공격 때문이 아니다. 같은 편인 민주당, 심지어 내각이나 측근 그룹에서 대통령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듯한 언행이 잇따르고 있다. 한때 문 대통령의 측근 1호였던 김경수 경남지사가 "대통령이 한 말씀 하면 일사불란하게 당까지 다 정리돼야 하는 건 아니다"고 한 말은 문 대통령한테 타격이다. 생전의 노무현 대통령이라면 감히 할 수 없었던 얘기를 문 대통령에게 한 셈이다. '지 대통령한텐 받은 것보다 희생한 게 더 많다. 나도 이제 어엿한 대권후보 중 한 명'이라는 의식이 깔려 있지 않을까.

박범계 법무장관의 "저는 장관이기 이전에 여당 국회의원이다. 당론이 모이면 따를 것"이라는 언급도 문 대통령한테 장관 임명장을 받은 지 한 달도 안 돼 나왔다. 발언의 맥락이 소위 검찰 개혁과 관련해 문 대통령의 속도 조절론을 소개한 뒤 자신의 소신은 다르다는 취지로 한 얘기다. 권력의 비정한 속성을 감안할 때 민주당 안에 현직 대통령보다 더 믿을 만한 구석이 있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을 한 것 아닐까.

청와대를 윽박지르는 언행은 민주당의 김태년 원내대표한테도 나왔다. 국회에 출석한 유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이 "박범계 장관이 임명장을 받으러 온 날 문 대통령이 (검찰 개혁의) 속도 조절을 당부했다"고 하자 김 원내대표는 여러 차례 압박성 질문을 날려 "대통령이 속도 조절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아니었다"는 번복성 답변을 끌어냈다. 그렇다고 문 대통령이 '속도 조절이라는 뜻의 말'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바뀌진 않았다.   

당과 정부, 측근 그룹 등 정권을 구성하는 세력의 대표들이 거의 동시에 대통령을 포위하거나 고립시키는 형국이다. 서로 약속이라도 했나. 콘크리트 지지층과 이른바 '대깨문(대가리가 깨져도 문재인)'의 전투적 방어 속에 영원히 지속될 듯했던 문 대통령의 리더십이 순식간에 허망하게 무너진 느낌이다.  문 대통령의 추락은 권력 내부에서 전개됐다는 점에서 과거와 양상이 다르다. 청와대는 얕보이는 비서실장과 허깨비로 전락한 민정수석, 수사 대상이 되거나 사의를 표명한 비서관들로 넘쳐난다. 무슨 패잔병 집단처럼 허약해졌다. 당·정·청 어디에서도 대통령을 무서워하는 기색을 찾기 어렵다.

레임덕은 문 대통령이 자초했다. 결정해야 할 때 결정하지 않아 일찍 심각하게 왔다. 첫 번째 추미애-윤석열 사태 때 문 대통령은 아무런 결정을 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문제를 법원이 결정하도록 내버려 뒀다. 두 번째 박범계-신현수 사태가 터졌지만 역시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대통령은 당과 정부와 측근들에게 결정권을 넘겨 버렸다. 이러니 문 대통령과 청와대가 우스운 존재가 되었다. 문 대통령의 결정을 회피하는 버릇은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태도와 관계 있을 것이다. 세 번째 무결정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될까. 그땐 무정부 상태라 해도 좋을 일들이 벌어질 수 있다. 집권층뿐 아니라 온 국민이 탄 배가 폭풍 속으로 빨려 들어갈지 모른다. 리더의 결정 장애는 국민에게 너무 큰 피해를 준다.

전영기 편집인
전영기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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