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알리바이’를 제공한 ‘이준석 현상’
  • 김종일·이원석 기자 (idea@sisajournal.com)
  • 승인 2021.06.11 15:00
  • 호수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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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대선 승리 위한 보수층의 ‘전략적 선택’ 작용

돌풍은 지속되면 하나의 현상이 된다. ‘이준석 돌풍’은 ‘이준석 현상’이 됐다. 그리고 ‘이준석 현상’은 1985년생 36세 ‘0선’ 정치인을 제1야당 대표로 만들어냈다. 1987년 체제에선 찾아볼 수 없었던 전인미답의 청년 대표다. 낡은 정치와 늙은 정치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탄생시킨 이준석 현상은 제1야당을 넘어 집권여당과 여의도 정치권 전체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민의 변화에 대한 열망이 분출한 결과이고 정치에 대한 엄중한 경고”라는 이재명 경기지사의 진단은 사실 무서운 얘기다. 변하지 않으면 내년 대선 결과는 불 보듯 뻔하고, 바꾸지 않으면 앞으로 기성 정치권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진단이기 때문이다. 

6월11일 이준석 신임 당대표는 합계 43.8%의 득표율로 나경원 전 원내대표의 추격을 따돌리고 당선됐다. 이 대표는 당초 당원조사(70% 반영)에서 중진들에 밀릴 수도 있다는 일각의 예상을 뒤엎고, 37.4%의 높은 득표율로 나 전 원내대표 득표율(40.9%)에 거의 육박했다. 하지만 예상대로 국민여론조사(30% 반영)에서 58.8%라는 압도적 득표율을 올리며 합계에서 6.7%p 차로 나 전 원내대표를 이기고 1위를 차지했다. 나 전 원내대표는 당원조사에서 이 대표에 불과 3.5%p 차 밖에 앞서지 못하면서 합계 37.1%의 득표율로 다시 한 번 분루를 삼켰다. 국민여론조사에서는 28.3%에 그쳤다. 주호영 전 원내대표는 합계 14.0%로 3위에 머물렀다. 압도적인 국민여론을 등에 업은 이 대표의 돌풍이 결국 당심도 움직이면서 이변을 허락하지 않았다. 신임 이 대표는 당대표 수락연설에서 “우리의 지상과제는 대선에서 승리하는 것이고, 저는 다양한 대선주자 및 그 지지자들과 공존할 수 있는 당을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이 대표는 국민의힘의 첫 당 대표다. 제1야당은 탄핵 이후 전국 단위 선거에서 내리 4연패했다. 그래서 당명이 자주 바뀌었고 지난해 4월 총선 이후부턴 ‘비대위 체제’를 유지해 왔다. 국민의힘 입장에서 이번 당 대표는 내년 대선 승리를 이끌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다. 그 임무를 보수정당 당원들과 지지층들은 ‘0선’의 30대 당 대표에게 맡겼다. 특출한 세력도, 조직도, 자금도, 계파도 없는 그다. 기존 정치문법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렵다. 지금 보수 유권자들과 국민이 정치권에 분명한 어떤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준석 현상은 ‘개인 이준석’이 오로지 만들어내지 않았다. ‘안철수 현상’이 ‘개인 안철수’의 것이 아니었듯 이준석 현상도 마찬가지다. 그가 대전환의 시기에 걸맞은 정치철학과 시대정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개인에 부여된 현상은 또 다른 개인을 찾아 떠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준석 현상’을 불러온 민심과 그 중심에 자리한 ‘제1야당 대표 이준석’을 동시에 살펴봐야 한다. 왜 민심은 이준석을 통해 이준석 현상이라는 배를 띄웠을까. 시사저널이 핵심 포인트를 중점적으로 톺아봤다. 

이준석 국민의힘 당 대표 당선자가 6월11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국민의힘 당사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당선 확정 후 당기를 흔들고 있다.ⓒ시사저널 박은숙
이준석 국민의힘 당 대표 당선자가 6월11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국민의힘 당사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당선 확정 후 당기를 흔들고 있다.ⓒ시사저널 박은숙

이준석이라는 ‘준비된 그릇’

‘이준석 현상’에는 다양한 담론이 담겨 있다. 먼저 세대교체에 대한 대중의 갈망이다. 기성정치에 대한 미래세대의 실망과 반감이 표출된 것이란 분석이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민심은 새 인물과 정당정치 쇄신에 대한 기대를 계속 표출했는데, 충족되지 못했다”며 “4월 보궐선거 후 새 그릇을 바라는 2030세대들의 희망이 ‘이준석’이라는 준비된 그릇에 담기며 이준석 현상을 만들어냈다”고 분석했다. 

이준석 현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국민의힘의 존재감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점이다. 전당대회 흥행과 여론의 주목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이준석 현상이 ‘대안 부재’를 호소하던 어떤 유권자들에게 대안을 제공했다는 얘기다. 아무리 정권심판을 하고 싶어도 차마 제1야당을 찍을 수 없었던 유권자들에게 ‘심리적 알리바이’를 제공해 제1야당을 대안으로 선택할 수 있게 했다는 논리다.

무슨 이야기일까. 4월 보궐선거에서 드러났듯 지금 민심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그럼에도 대선은 얘기가 다르다. 대선은 회고적 투표가 아니라 미래 지향적 투표다. 어떤 유권자들에게 지난 보궐선거 결과는 집권여당에 ‘정신 차려라’ ‘더 잘해라’라는 의미의 회초리였다. 

그리고 이들에겐 더 큰 문제가 있다. 문재인 정부의 무능과 내로남불은 밉지만 그렇다고 헌정 체제를 부정한 ‘탄핵 세력’에게 표를 주는 것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대선주자 윤석열’은 아직 개인이다. 정의당과 국민의당이 수권정당은 아니다. 그렇다면 사실상 대안은 부재하다. 이런 정치지형에선 ‘미워도 다시 한번’이란 마음이 발휘되기 쉽다. 

그런데 이때 ‘이준석 돌풍’이 불었다. 그는 ‘탄핵의 강’을 건너겠다고 천명했다. 지역과 계파 대신 세대와 젠더 등 새 이슈를 호출했다. 이런 점들은 제1야당이 탈바꿈하고 있다는 신호로 작동했다. 그리고 어떤 유권자들에겐 민주당의 대안으로 국민의힘을 택할 수 있게 했다. 이준석 현상이 제1야당을 지지할 수 있게 하는 ‘심리적 알리바이’를 제공한 셈이다. 

익명을 요구한 민주당 현역 의원의 설명이다. “한동안 적잖은 유권자가 민주당에 실망해도 제1야당으로 떠나지 않았다. ‘탄핵 세력에게 표를 줄 순 없다’는 심리적 마지노선 같은 게 있었다. 그런데 이준석이 ‘탄핵의 강’을 건너고 수구세력 등 구시대와의 결별을 선언하자 민주당을 떠나 중도·무당층에 머무르던 이들이 제1야당을 지지할 수 있는 ‘심리적 알리바이’가 생겼다. ‘김종인 체제’ 등에선 볼 수 없던 모습이다.”

유승찬 스토리닷 대표도 비슷한 진단을 내렸다. 그는 4월 보궐선거가 유권자들의 인식을 바꾼 분기점이라고 본다. 유 대표는 “탄핵 이후 ‘민주당이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민의힘은 아니다’는 기존의 인식이 깨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국민은 탄핵과 민주당 정권의 무능과 부패, 내로남불을 하나의 프레임 안에서 바라보면서 ‘파격적인 변화’를 갈구하게 됐다. 이른바 좌우 기득권의 수평이동이 갖는 무력함을 넘어 적어도 세대의 틀을 뛰어넘기를 바랐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날카로운 진단이다.

이준석 국민의힘 당 대표 당선자(가운데)가 6월11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국민의힘 당사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당선자 지명 후 인사하고 있다.ⓒ시사저널 박은숙
이준석 국민의힘 당 대표 당선자(가운데)가 6월11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국민의힘 당사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당선자 지명 후 인사하고 있다.ⓒ시사저널 박은숙

“무너진 보수 일으켜라”…보수의 ‘전략적 사고’

국민의힘은 당 역사의 시발점을 1997년 한나라당 출범으로 잡는다. 한국 정당사의 한 축을 써내려온 보수정당의 역대 당 대표 면면을 보면 ‘30대 이준석’이 어떤 인물들과 어깨를 견주고 있는지가 보인다. 조순-이회창-서청원-박희태-최병렬-박근혜-강재섭-박희태-정몽준-안상수-홍준표(한나라당), 황우여-김무성-이정현(새누리당), 홍준표-황교안(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 그리고 이준석(국민의힘). 그야말로 낯선 풍경이다. 

국민의힘 당원들이 누군가. 영남권 당원이 절반 이상이며 그 당원의 70%가 50대 이상이다. ‘보수의 심장’ 대구에서 “탄핵은 정당했다”고 외치는 ‘박근혜 키즈’를 당 대표로 선택한 이 민심은 무엇을 의미할까. 전문가들은 정권교체를 간절히 바라는 보수 유권자들의 ‘전략적 선택’이라고 본다. 이준석이라는 인물이 지금의 시대정신을 가장 잘 실현시켜줄 이상형이라기보다는 정권교체를 바라는 보수진영의 간절함이 ‘당 대표 이준석’을 상징으로 만들어냈다는 설명이다. 

양승함 연세대 명예교수는 “보수 유권자들이 대오각성을 한 결과로, 혁명적 사건이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판단을 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탄핵의 강’을 건너서라도 기득권 정치세력을 심판하고 정권교체를 해야겠다는 간절함이 담긴 전략적 선택이라는 분석이다. 박성민 정치컨설팅그룹 ‘민’ 대표는 “보수진영은 선거에서 60대 이상에선 강한 우위, 50대에서는 우위, 40대에서는 절대 약세라는 판단을 한다. 결국엔 2030세대의 표심이 관건이다. 이들의 지지를 이끌어내야만 내년 정권교체가 가능하다는 보수 유권자들의 전략적 판단이 작동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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