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최연소 총리’ 부패 혐의가 오스트리아에 불러온 나비효과
  • 이수민 독일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11.04 11:00
  • 호수 1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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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츠 오스트리아 총리, 여론 조작 등 드러나며 결국 사임
정언(政言) 유착의 민낯 적나라하게 드러나

지난 9월 독일 총선이 끝난 후 언론들이 새 연정 협상에 대한 보도만 쏟아내고 있을 때, 조용한 이웃 나라 오스트리아에서 충격적인 뉴스 하나가 전해졌다. 당시 총리였던 제바스티안 쿠르츠의 부패 혐의로 각 정부부처가 압수수색을 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이는 곧 ‘31세 최연소 총리’로 한때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쿠르츠의 사임으로 이어졌다.

1986년생인 쿠르츠는 젊은 나이에 비해 정치적으로 탄탄대로를 걸어왔다. 2009년부터 국민당 청년부의 수장을 8년간 맡았고, 연이어 당 대표가 되었다. 청년부 시절 그는 100%에 가까운 지지율을 받으며 국민당 청년부장을 맡았고, 이내 국민통합업무 총비서(2011~13년)와 연방 외교부 장관(2013~17년)을 지냈다. 당 대표가 되고 나서 시행된 2017년 총선에서 국민당이 제1당이 됨으로써 그는 ‘최연소 총리’ 자리를 거머쥐었다. 이처럼 빠른 속도로 정치권 정상에 오른 그는 예상보다 빨리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EPA 연합
제바스티안 쿠르츠 오스트리아 총리가 10월9일 총리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임을 발표하고 있다.ⓒEPA 연합

2년 전 탄핵됐다 부활했으나 결국 다시 낙마

사실 쿠르츠는 처음 총리가 된 후 2년 만에 불신임 결의로 탄핵을 당한 이력이 있다. 2017년 당시 쿠르츠가 소속된 국민당은 자유당과 연정을 맺고 내각을 구성했다. 그런데 약 1년6개월 후인 2019년 5월17일 자유당 소속 두 정치인이 나눈 대화가 찍힌 영상이 공개되면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해당 영상은 2017년 7월24일 스페인 이비자에서 촬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상 속 인물은 총 4명으로, 당시 부총리이자 자유당 대표였던 하인츠-크리스티안 스튜라헤와 빈의 전 부시장이자 당시 국민의회 의원이었던 요한 구데누스, 그리고 구데누스의 부인과 스스로를 러시아 석유 및 가스 사업자인 이고르 마카로브의 조카라고 밝힌 미지의 여성이 나온다. 이들은 부호인 이 러시아 여성이 대규모 자금을 오스트리아에 투자하는 내용, 그리고 자유당을 후원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내용은 스튜라헤가 러시아 여성의 자본금으로 오스트리아 최대 발행 부수를 가진 일간지 ‘크로넨 차이퉁’을 매수해 언론 조작을 하자는 말을 자주 반복한 부분이다. 특히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크로넨 차이퉁이 선거 2~3주 전에 자유당을 밀어주는 기사를 내보내기만 한다면 선거에서 분명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러시아 여성에게 정당을 후원할 때 어떻게 세금을 내지 않고 몰래 후원금을 전달할 수 있는지 그 방법에 대해 설명한다. 스튜라헤의 설명에 이어 구데누스가 그의 말을 러시아어로 통역하는 모습까지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약 6분 정도 지속되는 해당 영상의 파급력은 상당했다. 영상이 공개된 지 하루가 지나 스튜라헤는 모든 보직에서 사임했고, 구데누스 역시 사임과 동시에 탈당했다. 이러한 자유당과 연정을 맺은 국민당 역시 책임을 피할 수는 없었다. 쿠르츠 내각을 믿을 수 없다는 정치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는 영상이 공개된 지 열흘 후, 국민의회에서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을 가결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이로 인해 쿠르츠 역시 총리직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는 2019년 9월29일 다시 총선을 치렀다. 그리고 국민당은 탄핵됐던 쿠르츠를 다시 한번 총리 후보로 내세웠다. 결과는 당선. 국민당은 이전보다 더 높은 득표율 37.5%를 달성하며 제1당이 되었고, 쿠르츠 역시 다시 한번 총리직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 문제가 되는 혐의들은 이 이비자 스캔들과 무관하지 않다. 현재까지 검찰이 발견한 쿠르츠의 부패 혐의는 총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 번째 혐의는 지난 9월말 보도된 내용으로, 과거 이비자 스캔들 관련 조사가 이뤄질 당시 쿠르츠가 영상 속 인물들과 관련해 중대한 위증을 했다는 점이었다. 또 하나는 여론조사 조작 혐의다. 10월6일 오스트리아의 주간지 ‘팔터’는 2018년 국민당 재무부 장관 대변인 짐 레페브레와 당시 재무부 차관이었던 토마스 슈미트 사이에 오갔던 왓츠앱 메신저 대화를 공개했다. 이 대화는 어떻게 언론을 돈으로 매수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기사를 낼 수 있는지에 관한 논의로 채워져 있었다. 정계에서 언론을 ‘사고팔 수 있는 대상’으로 논의해온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쿠르츠 총리 역시 2016년 총리 후보가 되고자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여론조사를 조작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팔터는 이비자 스캔들 영상 속 ‘언론 조작’ 논의를 쿠르츠가 몸소 실행했다고 분석했다.

ⓒAFP 연합
쿠르츠 총리의 여론 조작 혐의가 드러난 다음 날인 10월7일 빈 시민들이 총리 사퇴를 요 구하는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다.ⓒAFP 연합

국민 세금 16억원 써 여론 조작한 혐의

더 큰 문제는 단지 언론 장악만 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재무부와 결탁해 국민 세금으로 여론 조작을 시행했다는 점이었다. 추정되는 액수만 약 120만 유로(약 16억원)라고 알려졌다. 검찰은 쿠르츠와 그의 측근인 일부 직원이 2016년 재무부의 돈을 이용해 여론조사 결과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조작했을 뿐 아니라, 슈미트 재무부 차관을 통해 언론사 사주에게 뇌물을 건넸다고 보고 있다. 팔터 기사가 공개된 같은 날 검찰은 국민당 본부와 총리실, 재무부까지 압수수색에 나섰고 이내 전 세계에 보도됐다.

쿠르츠는 압수수색 다음 날까지도 사임 의사가 전혀 없다고 발표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공영방송에 출연해 자신을 향한 혐의점들은 모두 근거가 없다며 결백을 주장했다. 그러나 다수의 여론조사에서 그가 정계를 완전히 떠나길 바란다는 국민 여론이 압도적이란 결과가 발표됐다. 결국 사임할 의사가 없다고 밝힌 지 불과 이틀 후인 10월9일, 그는 총리직을 내려놓겠다고 발표했다.

오스트리아 사회에선 이 문제가 비단 쿠르츠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관련 파장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란 전망도 있다. 현재 이와 관련해 조사를 받고 있는 이는 쿠르츠뿐만 아니라 슈미트 재무부 차관, 국민당 전 총비서이자 쿠르츠의 고문이던 슈테판 슈타이너, 쿠르츠의 대변인, 그리고 일간지 ‘오스트리아’가 속한 미디어그룹 창립자이자 쿠르츠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가 있는 볼프강 펠너 등 정계와 언론계 인사 다수다. 정치와 언론 간 오랜 유착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 셈이다. 향후 검찰 조사가 어떤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킬지 오스트리아를 넘어 유럽 전역의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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