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워홀 자화상이 왜 380억에 팔렸지?
  • 반이정 미술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10.31 12:00
  • 호수 1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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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을 작품에 결합시킨 작품세계에 눈길
10월1일부터 열리는 전시회에 대한 시선 엇갈려

서울 청담동 에스파스 루이비통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앤디 워홀 전시장에 들어서면, 전시공간 정면에 걸린 워홀의 보라색 자화상과 빨간색 자화상 두 점을 만나게 된다. 단색조의 정사각형 캔버스 두 점의 첫인상은, 마릴린 먼로나 마오쩌둥 같은 명사나 캠벨스프 깡통 같은 다국적 상품 브랜드를 현란한 다색 판화로 옮긴 작품처럼 세간에서 곧잘 유통되는 앤디 워홀의 대표 미감과는 다르다. 대형 스케일에 단색조를 따른 점에선 미니멀리즘 미학의 기운마저 느껴진다. 특히 이번 전시의 홍보 포스터에 쓰인, 비쭉 솟구친 가방을 쓴 워홀의 자화상은 ‘워홀’ 자체에 집중한 전시임을 도드라지게 한다. 그래선지 전시 제목마저 《앤디를 찾아서》(2021년 10월1일~2022년 2월6일 전시)다. 모조리 초상화만 내놓은 이 전시 출품작 22점 가운데 익명의 복장도착자 초상화 한 점을 뺀 나머지는 전부 앤디 워홀 자화상이다.

ⓒ시사저널 박은숙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 컬렉션 소장품전 《앤디 워홀: 앤디를 찾아서》 전시가 10월27일 서울 강남구 에스파스 루이비통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시사저널 박은숙

22개 출품작 중 21개가 앤디 워홀 초상화

생전에 워홀은 자화상을 다수 제작했다. 앤디 워홀 사후 20주기를 겸해 2007년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열린 대규모 앤디 워홀 전시 《앤디 워홀 팩토리》의 전시 구성 중에는 독립된 부스가 그의 자화상에만 배당될 정도였고, 그의 자화상만 모은 기획전시는 국외에서도 곧잘 있다. 외모 콤플렉스가 많았던 워홀은 유명 인사가 되길 희망했고, 명사들과의 사교 생활과 친분이 자신의 작품으로 연결돼 나타나곤 했다. 이 전시에도 폴라로이드로 찍은 자화상이 출품되었는데, 그는 1958년부터 사망한 1987년까지 SX-70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소지하고 다니면서 그레이스 존스, 제인 폰다, 잭 니콜슨, 에디 세즈윅, 바스키아 같은 유명 인사나 지인들을 폴라로이드에 담았는데 그 수가 2만 장에 이른다. 당시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촬영 직후 인화된 사진을 현장에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지금으로 치면 디카나 폰카 정도 되겠다. 오늘날 디카·폰카는 친분 과시를 증명하는 수단 아닌가. 앤디 워홀의 창작 과정은 인정 욕구와 유명해지는 수단을 구현시키는 방편이기도 했다. 이름값이 미적 전략이었던 앤디 워홀의 작품은 대중문화가 전 지구적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한 오늘날까지도 작품의 얇은 표면만으로 인지도와 권위를 지키고 있다.

앤디 워홀의 예술세계를 풀이한 해석들을 한번 찾아보라. 흔들릴 수 없는 공식처럼 굳은 문장이 앵무새처럼 여러 화자들의 입으로 반복된다. ‘워홀은 고급 예술과 대중 예술의 위계를 파괴했다.’ 이 주장이 사실이 아님은 현실의 여러 지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워홀의 작품 발표 당시 사정이 설령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시점을 알 수 없는 어느 때부터 현재까지 앤디 워홀의 작품은 완고한 고급 예술계의 일원으로 간주된다. 공산품처럼 예술품을 찍어낸다는 취지로 이름 붙인 워홀의 작업공방 팩토리(Factory)에서 제작된 판화가 공산품 가격에 팔리지 않았으며, 그의 관심사가 유명인이 아닌 대중에 이른 적도 없다시피 하다. 앤디 워홀이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명성을 이어갈 수 있었던 데는, 그가 활동했던 시대에 너무 난해한 미궁으로 빠져드는 현대미술에 대한 거리감, 명성을 작품과 결합시킨 워홀의 작품 경향이 대중의 속물근성과 전 지구적인 대중문화 전성기와 우연히 만난 결과로 봐야 할 것이다.

워홀의 작업 스타일을 표절에 가깝게 계승해도 비난받지 않는 분위기가 있는데, 제3자가 제작해 유통시키는 ‘워홀 스타일의 작품’은 역으로 워홀의 몸값을 배가시킨 면까지 있었다. 그가 활동했던 1960년대 후반에는 리처드 페티본이 워홀의 작품을 작은 크기로 고스란히 옮긴 작품을 발표하더니, 2000년대 후반께 등장한 미스터 브레인워시는 워홀의 대표작인 마릴린 먼로 초상화 프레임에 대중 스타들의 얼굴을 번갈아 등장시킨 작품을 발표했는데 거의 표절에 가깝다. 그렇지만 ‘앤디 워홀’풍 작품으로 미스터 브레인워시는 인지도와 명성 그리고 부를 모두 얻었다. 채플린과 마릴린 먼로, 미키마우스 등 낯익은 대중 도상을 무분별하게 뒤섞은 회화 작업에 대한 불특정 다수의 지지는 미스터 브레인워시의 입지를 굳혔고 부지불식간에 워홀의 영향력도 부풀렸을 게다.

앤디 워홀을 향한 동어 반복적인 예찬이나, 그의 작업 스타일을 후대 미술가가 자성 없이 따라 해도 인기를 얻게 되는 분위기 등이 워홀의 진가를 거듭 이해하지 못하게 만든다. “앤디 워홀에 대해 알고 싶다면 제 회화, 그리고 제 영화가 보여주는 표면만 보면 됩니다. 그 이면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작품에 심오한 이면이란 달리 없고 표면의 매혹이 작품의 전부라는 앤디 워홀의 사뭇 정직한 실토가, 끊임없이 사고팔아야 순환하는 시장경제의 생태계에선 본래 의미대로 해석되긴 어려웠을 것이다.

앤디 워홀 자체를 앞세운 루이비통 소장품 전시의 간판 격인 1986년 자화상을 보자. 가로세로 거의 3m에 육박하는 스케일의 이 회화 작품은 다섯 가지 버전(초록, 파랑, 보라, 노랑, 빨강) 중 보라색 작품인데, 2010년 뉴욕 소더비에서 익명의 응찰자에게 3250만 달러(380억875만원)에 낙찰됐다는 기사가 잡힌다. 아크릴 물감과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검정과 보라 투톤으로 앤디 워홀의 얼굴을 큼지막하게 찍은 자화상을 가까이서 아무리 뜯어본들, 멀리서 오랜 시간 뚫어져라 응시한들 이 작품이 왜 380억원대 시장 가치를 갖는지, 세계적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이 소장을 결정했는지 등의 객관적인 사실들과 연결되지 않을 것이다.

ⓒ시사저널 박은숙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 컬렉션 소장품전 《앤디 워홀: 앤디를 찾아서》 전시 모습ⓒ시사저널 박은숙

현대미술은 인지 부조화와의 만남

그게 정상이다. 현대미술과의 만남이란 대개 이 같은 인지 부조화를 겪는 과정과 통하는 것이다. 이때 세 갈래 길이 열린다. 5할은 현대미술은 터무니없다며 상식선에서 선을 긋는 길을 택한다. 4할은 해당 예술가를 향한 기성의 평가를 자성 없이 따라 하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고 자기암시를 주는 길이다. 4할의 감동 작동 방식에 화답해 성공한 사례가 미스터 브레인워시 같은 후대 대중미술가일 텐데, 4할의 수요자와 생산자 간의 상호 피드백이 왜곡된 감동이라는 전염병을 확대 재생산시킨다. 남은 1할은 앤디 워홀의 작품 자체가 대단한 것이 아니며, 앤디 워홀을 둘러싼 복잡한 이해관계가 그를 비평적으로나 시장 가치적으로나 몇 갑절 위대한 것으로 인지하게 만든다는 걸 깨닫게 되는 길이다(혹은 그런 맥락을 깨닫고 감동받는 길이다). 1할의 자각은 앤디 워홀을 평가절하하지 아니하되, 과대평가하지도 않으면서 그의 예술세계를 즐긴다. 1할은 “이면에는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털어놓은 워홀의 고백의 진가를 이해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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