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생전 신격호에 “일본 문화재 수집” 권유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1.11.15 07:30
  • 호수 1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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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출간된 辛 명예회장 회고록에 일화 담겨
“민족 유산 유출 안 돼“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들을 수집하면 어떻겠소?”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회장이 이렇게 권유한 상대는 다름 아닌 롯데그룹 창업자 신격호 명예회장이다. 롯데가 11월3일 출간한 신 명예회장 회고록 《열정은 잠들지 않는다》(나남출판)에 따르면, 신 명예회장은 생전 이 회장으로부터 미술품 수집을 제안받은 적이 있다. 신 회장은 “이 회장은 대단한 문화재 수집가다. 그의 수집품을 보면 그저 부러울 따름”이라면서 “언젠가 이 회장은 나에게도 ‘일본에 산재한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면 어떻겠느냐’고 말한 적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1982년 4월 호암미술관 개관식에 참석한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연합뉴스

당시 신 회장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이른바 ‘한·일 셔틀 경영’을 펼치고 있었다. 이 회장이 보기엔 일본으로 유출된 우리 고미술품들을 다시 국내로 들여오기에 신 회장만 한 인물이 없었다. 이 회장이 주변 지인들에게도 미술품 수집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정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삼성문화재단은 1995년 펴낸 《문화의 향기 30년》에서 “이 회장은 30대 초반 대구에서 양조업을 할 때부터 이미 고서화나 신라토기, 고려청자, 조선백자, 불상 등에 매료돼 수집을 시작했다. 점차 철물, 조각, 금동상 등으로 범위를 넓혀 갔다”며 “나이가 들면서는 민족의 문화유산을 해외에 유출시켜 흩어지게 해선 안 된다는 사명감으로 고미술품 수집에 더욱 정열을 기울였다”고 설명했다. 

이 회장의 권유로 탄생할 뻔했던 ‘신격호 컬렉션’은 결국 무위에 그쳤다. 신 회장은 “이 회장의 제안을 받았을 때 정말로 그렇게 해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며 “국가에 도움이 될 테니 보람도 느껴질 것이었지만, 안목이 부족해 엄두를 낼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다른 재벌 총수 중에선 현대그룹의 창업자 정주영 명예회장이 미술품 수집에 뛰어들려 했다가 포기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 밖에 개인적으로 미술품을 수집해온 오너 일가가 종종 언론 등에 소개됐다. SK(아트센터 나비), 아모레퍼시픽(아모레퍼시픽미술관)처럼 직접 미술관을 운영하는 대기업도 있으나, 이병철 회장부터 이어져 온 삼성가의 미술계 영향력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 회고록 《열정은 잠들지 않는다》

문화재 구매 때 항상 아들 이건희 불러 

문화재를 향한 삼성가의 애착은 창업자 윗세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 회장은 1968년 일본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 기고문을 통해 “내가 서화와 골동품을 수집하게 된 데는 선친의 영향이 컸다. 선친은 찾아오는 묵객들과 시문답을 하곤 했다”며 “이런 환경이 나로 하여금 자연스레 서화나 도자기를 수집하는 길로 들어서게 한 것 같다”고 밝혔다. 

문화재를 사들일 때 이 회장은 항상 아들 이건희 회장을 불렀다. 아들이 문화재를 팔러 온 사람을 직접 맞이하게 하고, 자신 옆에 무릎 꿇고 앉아 직접 작품을 보도록 했다. 엄격하게 훈련받은 이건희 회장은 아버지를 능가하는 컬렉터가 됐다. 그는 아버지의 관심사였던 조선시대·일제시대 문화재에서 더 나아가 국내외 근현대 미술작품까지 두루 사모았다. 

아울러 이 회장이 부인 박두을 여사를 내조에 전념하게 한 반면 이건희 회장은 부인 홍라희 전 리움 관장의 미술계 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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